최근 수정 시각 : 2019-10-09 03:08:27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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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잉글랜드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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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리처드 1세
(Richard I of England)
별명 사자심왕 리처드
(Richard the Lionheart / Cœur de Lion)
부왕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모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생몰년 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41년 210일)
재위기간 1189년 7월 6일 ~ 1199년 4월 6일(9년 9개월)
대관식 1189년 9월 3일

영어: Richard I (리처드 1세)
중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차르드 1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샤르 1세)
라틴어: Ricardus I (리카르두스 1세)

1. 개요2. 생애
2.1. 십자군 전쟁2.2. 존 왕의 배신, 죽음
3. 제3차 십자군 전쟁: 초인적인 무용담
3.1. 아크레 해전과 아크레 공성전(Siege of Acre)3.2. 아크레 포로 학살 사건3.3. 카이사레아 전투(Battle of Kesarea)3.4. 아르수프 전투(Battle of Arsuf)3.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3.6. 야파 전투(Battle of Jaffa)3.7. 평화협정
4. 정치적인 면5. 살라딘과 무슬림에 대한 태도6. 평가7. 그 외8. 대중문화에서의 사자심왕 리처드

1. 개요

He was a bad son, a bad husband, a bad king, but a gallant and splendid soldier.
"나쁜 아들이었고, 나쁜 남편이었으며, 나쁜 왕이었으나, 용감하고 빛나는 군인이었다."[원문]
스티브 런치만 경(Sir Steven Runciman), <A History of the Crusades> 3권 75p.
사자심왕 (The Lionheart)
잉글랜드이자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2]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아일랜드의 영주.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 토머스 F. 매든 교수의 경우에는 그를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리처드는 예나 지금이나 용맹함으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슬람의 영웅이었던 살라흐 앗 딘의 유일한 맞수로 맹활약했다.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번 나섰다 하면 불리하던 전투도 뒤집혀버리는 초인적인 무용담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무용담으로만 따진다면 항우와 비견될 정도인데, 그 때문에 "사자심왕 리처드"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 사자심왕을 줄여서 사심왕(獅心王)으로 적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사자왕 리처드'라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사자심왕이나 사심왕이라는 말이 익숙치 않아서 그런 듯하다. 사실 의미를 따져보면 결국 사자왕이나 라이온하트나 똑같이 사자와 같은 용맹을 지녔다는 뜻이라 오역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의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3]

2. 생애

1157년 9월 8일생.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 헨리 2세의 3남이자 후대 왕인 존 왕의 형이다.

첫째 형으로 기욤 9세가 있었는데 2살 때 열병으로 죽어서 둘째 형 청년왕 헨리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런데 리처드는 아버지와 둘째 형과의 관계가 막장이다.(…)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얻었는데[4][5] 나중에 가서는 이슬람 털러 나가 있는 동안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옥스퍼드에서 출생하였고 프랑스 아키텐 리무쟁 샬뤼에서 죽었다. 잉글랜드의 왕이지만, 10년의 재위 동안 실제 잉글랜드에 있었던 건 6개월 정도라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서 보냈으며, 그 가운데 몇 년간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 종군했던 중동 지역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당시 귀족들이 그랬듯이 영어[6]가 아닌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구사했다.

그는 전투 후 약탈을 일삼고 소작농의 아내와 딸, 여자 친지들까지 겁탈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킨 뒤에는 그녀들을 자신의 기사들에게 넘겨 취하게 하였다.

8살에 잉글랜드로부터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아키텐에 건너와 11살이 되던 해인 1168년에 영지를 물려받아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며 1172년에는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다. 1183년에 리처드가 통치하던 가스코뉴의 주민들이 그의 가혹한 통치방식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사이가 좋지 않던 리처드의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란군에 가세했다. 그러나 6월 11일 헨리가 급사한 후 반란군이 와해되었고 리처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격파, 확실한 왕위계승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도 헨리 2세는 "내가 왕위를 물려줄 테니 대신 네가 통치하는 아키텐을 네 동생 에게 물려줘라"라고 명령했는데 이 의견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키텐은 원래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영지였기에 헨리 2세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버지 헨리 2세와 표면적으로 화해하긴 했지만 1188년,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 필리프 편에 가세하며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1년 후인 1189년에 헨리 2세가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2.1. 십자군 전쟁

1189년 국왕에 오른 리처드 1세는 난데없이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에 기생충같은 인간들이라고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고 잉글랜드 왕국의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관식 날에 리처드에게 선물을 바쳐 혹여 발생할 화근을 피하려던 유대인들을 붙잡고 내쫓아 옷을 벗기고 후드려 팬다. 이후 그의 대관식 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였다. 이후 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전쟁비용으로 무거운 세율을 매기고 재정적으로 나라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국가를 아주 말아먹을 생각까지 없었고, 동생인 존 왕의 문제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놓았다. 이는 하단 참고.

어쨌거나 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대활약하였고, 용맹무쌍하기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라흐 앗 딘을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내정을 말아먹으면서까지 상당한 자금과 물자를 준비해두고 출정했고, 출정 후에도 예루살렘으로 직행하기보다는 보급로를 단단히 다지면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해 가는 등 신중한 면도 보였다.

그런데 살라흐 앗 딘을 수차례나 무찌르는 눈부신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이탈이 속출한 데다 초반에 "10만 대군"이라 자칭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대군[7]황제의 익사로 와해되어 버리는 악재도 있었다. 결국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한다. 그래도 살라흐 앗 딘의 공격으로부터 일부 지방은 지켜내고 해안의 여러 도시를 수복하는 전과를 올릴 수는 있었다.

이런 군사적인 성과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군이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급사로 이탈하지 않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살라딘도 지친 군세를 정비하고 시리아를 비롯한 각지에서 원군이 도착하고 있던 상황이고 게다가 십자군에 대한 아랍의 적개심도 대단했으며 전투에서 아크레 공성전을 비추어 보면 아랍인들이 독을 품고 필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속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 전법인 유인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 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이다.

2.2. 존 왕의 배신, 죽음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와는 프랑스에 있었을 때 친했기에 한때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대립한 적이 더 많다. 십자군 전쟁 중엔 필리프 2세가 동생인 을 사주해 형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통에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귀환하던 도중에 배가 두 번이나 난파되고, 템플기사단원으로 위장해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 전에 자신이 모욕했던 레오폴트 5세 공작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정에 기소되었지만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키며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8]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에서 리처드의 죄목으로 내걸은 것이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9]'을 이끌던 '산의 노인'에게 의뢰해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산의 노인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니라는 서신을 보냈고 리처드의 명성은 이미 기독교 세계에 퍼져 있었다. 참고로 이 산의 노인은 실질적인 어새신의 시조라 불리는 라시드 앗 딘 시난이다.[10]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은 리처드에게 국왕에 걸맞은 예우를 할 것이며 몸값을 내면 석방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리처드 1세의 모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존과 필리프 2세보다 먼저 잉글랜드에서 모금된 16만 마르크를 하인리히 6세 황제에 전달해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리처드 1세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존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의 주요 내용을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

이 편지를 받은 존은 자신이 머물던 에브뢰 요새의 프랑스 수비병을 죽이고 형에게 에브뢰 요새를 바치면서 용서를 빈다.[11] 어머니인 엘레오노르까지 달래자 리처드 1세는 존을 경멸했지만 "괜찮아. 넌 아직 애니까" 말하고 공개적으로 용서한다.

리처드 1세는 윈체스터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하고 필리프 2세를 사로잡을 것을 명령하며 프랑스 출정 준비를 했다. 그런데 때마침 런던에서 윌리엄 피츠오스버트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어 리모주 자작 아데마 5세(Adémar V de Limoges)와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며 프랑스 출정은 연기되었다.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령과 프랑스 간의 중요한 국경지대로 리처드의 형인 청년왕 헨리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라, 리처드는 직접 출군했다. 또한 리모주의 영지에서 로마 제국 시절의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리모주 자작이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해 리처드가 공격했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물을 언급한 출처는 호버든의 연대기, 코제샬의 랄프의 연대기, 마르간의 연대기, 프랑스 궁정의 연대기들이 있고 특히 마르간의 연대기를 제외한 것들은 12세기 후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다. 다음은 코제샬의 랄프가 라틴어로 쓴 잉글랜드 연대기인데, 보물이 나왔다는 말을 기록한다. 연대기에는 하단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리모주 자작은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는데, 리처드는 사순절 기간 필리프와 평화 조약을 맺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리모주 자작의 땅에서 발견되어, 이 보물을 넘기라고 했는데 자작이 거절해 더욱 화가났다는 말도 있다. 마치 사순절 기간에는 무기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양 리처드는 자작의 땅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다.'[12]

리모주는 로마 제국 시절에도 별로 큰 도시도, 중요한 도시도 아니여서 왕이 군대를 끌고 갈만큼 막대한 보물이 나왔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또한 막대한 보물의 존재를 액면 그대로 듣지는 않고 리모주의 수도사 베흐나의 기록인 '잉글랜드의 왕의 목적은 리모주 백작의 성과 마을의 파괴였다'와 보물의 존재는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리모주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목적과 필리프가 개입한 권위 문제가 얽힌 전투로 파악하는 의견도 있다.

지도를 참고하면 당시 리모주 자작령은 중요한 곳이다.[13] 당시 프랑스는 크게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현재 크뢰즈 주)이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차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나 화살촉은 이미 그의 어깨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다. 군의사는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내었다. 그렇지만 상처가 심하게 곪아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14]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 1세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나를 죽이려 하였느냐?"라고 하자 이에 구르동이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그것도 실컷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도 죽을 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소년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노라. 몸 성히 가거라."라며 구르동의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를 일기로 모친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15] 영웅의 죽음치고는 개미에게 당한 사자로 비견될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urch_of_Fontevraud_Abbey_Richard_I_effigy.jpg
"나는 내 야심을 성전 기사단에게, 내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내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긴다."
리처드 1세의 유언.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16]

3. 제3차 십자군 전쟁: 초인적인 무용담

A skilled warrior, gifted leader, and superb tactician.
숙련된 전사이자 타고난 리더, 그리고 뛰어난 전술가.
토머스 F. 매든 교수. 십자군 전쟁의 진짜 역사(The Real History of the Crusades)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장기적인 전략의 측면에서 본다면야 살라딘이 리처드보다 우수했지만 전투의 측면에서 리처드가 개인 용력이 대단했던 것과 별도로 적의 전술을 눈치채고 재빠른 대처를 하는 점에서 볼 때 전술적으로는 명백히 리처드가 뛰어났다. 워낙 뛰어난 무용 때문에 리처드를 닥돌 용장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리처드의 용력은 확실히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뛰어나긴 했지만 한 개인의 무력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기기는 어렵다.

리처드는 용력뿐만 아니라 맹수와 같은 전술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승부의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전세를 뒤집어엎는 결단을 내리곤 했다. 또 직접 닥돌해 싸운 건 이슬람과의 전투뿐이고[17] 프랑스와 전쟁할 당시에는 직접 나가 싸우지 않고 지휘관으로서 적군을 박살낸 걸 볼 때 결코 닥돌만 가능한 인간이 아니었다. 리처드는 전술가로서 공격적이지만 차분했으며, 전략적인 판단력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리처드는 보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에 진격할 때 반드시 이를 고려해서 속도가 느릴지언정 매우 안정적으로 나아갔고,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한 십자군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 협상과 무력시위,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는 리처드의 쿨가이적 성향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세에 리처드의 이미지는 전략/전술가라기보다 무적의 전사로 남았는데 그의 용력이 워낙 상식 외였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진정 초인에 가까웠다. 오직 왕 개인의 무력만으로 적 전체를 쓸어버리는, 중국의 항우에 필적하는 무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런 신화적 용력이 발휘될 때마다 적과 아군 전체를 압도시키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내뿜어졌다. 중국 역사에도 초인적인 영웅담을 자랑하는 초인적인 전투가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론 중국 특유의 과장이 많이 섞인 영웅담에 가깝고 정사와 연의를 구분하지못한 일반인들의 착각이 많은데 인간의 탈을 쓴 사탄 리처드는 유럽측의 기록과 중동측의 기록이 교차검증이 되는, 상대하는 적군도 인정한 진짜 괴물같은 전투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파일:external/paintingandframe.com/richard_the_lionheart_during_the_crusades.jpg
리처드는 항상 전선에 나서서 자신의 부하들보다 맹렬하게 검이나 도끼를 휘둘렀는데[18], 살라딘의 병사들이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전열이 리처드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너졌다. 그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라딘이 전열이 마구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저 자가 바로 사탄 아니냐?"는 슬픈 농담을 던졌고, 한 아미르(지휘관)가 "사람이 아닌거 같은데요."라고 말하자 이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남아있다.[19]
(야파 전투때 혼자의 힘으로[20] 6만 2천의 살라딘 군을 박살내버린 리처드를 회상하며)

"세계가 창조된 이래로 우리는 그렇게 용감하고 그렇게 무기를 잘 다루는 기사를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한 아미르가 말했다.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그를 능가하는 자는 없으며,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진군하고 가장 늦게 퇴각합니다. 우리는 그를 사로잡으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그의 검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의 공격은 무시무시하고 그와 싸우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일과 매한가지 입니다. 그는 인간이 아닌듯 행동합니다."

놀랍게도 살라딘은 이런 두려움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이런 생각은 리처드 1세의 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일 수도 있다. 동생 존의 반란을 지원하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풀려났다는 말을 듣고 존에게 "악마가 돌아왔으니, 네 목숨은 네가 챙기기 바람."이란 편지를 보내놓고 재빠르게 존을 버리고 자기 살 궁리만 하기 시작했다. 적의 입장에서는 그만한 악마도 없던 모양.

야파 전투 당시 리처드가 을 타고 전투를 치르다 말이 죽어버리자, 그냥 칼 한 자루 쥐고 우랴! 하면서 병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게 된 살라딘은 "리처드 같이 위대한 왕이 병사들과 어깨를 맞대고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21] 부하를 시켜 그에게 가장 좋은 말을 가져다 주라고 했다. 리처드는 그 말을 받고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탄 뒤 방금 전 감사를 표한 살라딘의 병사들을 썰기 시작했다. 사실 전쟁 중인 만큼 리처드의 행동은 당연한 거다.

둘은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와중에 살라딘의 죽음을 전해듣자 "우리가 있었다면 그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3.1. 아크레 해전과 아크레 공성전(Siege of Acre)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키프로스에서 군을 정비한 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피터 데 바레스라라는 선원을 불러 저 배의 정체를 알아오라 일렀고, 잠시 후 자신들이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혀왔다. 호버든의 연대기는 이 배가 프랑스의 배라고 주장하지만 편력기는 이를 명백히 부인한다.

유유히 지나던 그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을 해왔다. 리처드 왕은 반격을 지시했고 양측은 바다 위에서 활을 주고받는 교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왕은 대뜸 휴식을 취하겠다며 양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버렸다(...).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제군은 이 배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고이 보내주겠다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라! 그토록 많은 승리를 거두고 이제와서 게으름뱅이가 되어 겁쟁이처럼 무너지겠다는 건가! 적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휴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대 제군은 똑똑히 들어라! 이 적들을 그냥 도망치게 하면 모두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크군이 갤리선에 도선, 갤리선에 탄 병력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막심해지자 그제서야 리처드 1세는 직접 일어나 칼을 들고 충각전술을 지시했다. 결국 이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 이후 6월 8일에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토착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한동안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병이 나았다.

여담으로 공성전에서 열병[22]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 있던 침대채로 전선으로 이동해서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쏴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3.2. 아크레 포로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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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포로들을 처형하는 십자군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 십자가[23]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했다.[24]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겠고 나중에 마저 지불하겠다고 재협상을 했는데,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살라딘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포로들을 학살한다.(1191년 8월 20일)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포로 학살 맞지만, 이유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이슬람 측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했으니까.
이세한 : 어떤 역사학자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도 해요. (리처드와 십자군이) 2,7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급이 조금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몇천명의 포로를 먹여 살린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거든요?
허준 : 그렇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리처드 왕께서 밤하나 나눠주기 아쉬워서...
임용한 : 포로를 안 죽여야 한다는 거는, 20세기 전쟁때에 간신히 말로 나왔어요. 말로. 우리가 독소전쟁도 다루고 제 2차 세계대전 때도 말했지만, 2차 대전때도 기사도가 지켜진 전쟁이 몇개 없어요.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쟁 포로를 죽이면 범죄야.", "도시를 폭격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면 범죄야."라고 말한지 불과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이세한 : 지금 (인권이라는) 이런 개념이 나온지가 50여년 밖에 안됐어요.
허준 : 죄송합니다. 중세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임용한 : 아니, 중세라서가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니까요. 지금도 쿠르드족에게 가스 뿌리고, 아프가니스탄독가스 뿌리고, 지금도 그런 짓을 해요. (제네바 협약 준수를) 하는 나라가 적어요. 지금도.[25]
토크멘터리 전쟁사 42부, 십자군 전쟁 4편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에 대해 이야기 하며.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살라딘이 시간을 끌지 않을까 염려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도 봉건주의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의해 지방 영주들이 병력을 몰고 와서 참전하는 식이라 시간이 지날 수록 살라딘의 군대는 모여들었으므로 이를 염려한 것이다. 게다가 리처드는 추가 증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몇 배나 달하는 이슬람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26]에서 3,000여 명이나 되는 포로를 남겨두고 진군한다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참고로 살라딘이 데리고 있던 기독교인 포로 1,500명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풀려났다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에서 미루어 역시 처형당했거나 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살라딘이 당대로서는 유례없을 만큼 자비로운 군주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런 그조차도 이 사건 말고도 여러 번 포로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 당시 전쟁 상황이었다.

참고로 하틴 전투가 끝난 이후 포로로 잡힌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의 기사 230명이 살라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27] 보병의 수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병력구성상 말탄 기사가 230명이나 포로로 잡혔으면 말 없는 보병은 그 10배 이상 잡혔다고 봐야 한다.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 용병은 모두 죽였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으니 리처드가 학살한 3000명과 별 차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측에서조차 이를 두고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이교도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전혀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3.3. 카이사레아 전투(Battle of Kesarea)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딘의 정찰대가 맞붙었다. 살라딘이 곳곳에 매복시켜 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면서 나아갔다. 그런데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프랑스군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느림보 행군 때문에 끔찍한 재앙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중략) 군대가 좁은 길목에 다다랐고 그 길목을 따라 군수품 마차가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길의 비좁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눈치 챈 투르크군은 대번에 짐마차를 덮쳐 부주의한 병사와 군마들을 쓰러뜨리고 짐의 대부분을 약탈한 다음, 저항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사정없이 쳐죽이며 물가로 내몰았다. 양측은 그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씩씩하게 싸웠다. 이런 와중에 한 투르크군 병사가 에버라드라고 하는 사람-솔즈베리 주교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팔을 베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는 투르크군과 격투를 벌여 그 모든 적군으로부터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후위에서 아군이 공격당하는 걸 보자 리처드 1세는 혈혈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투르크군의 머리통을 직접 따버렸으며 좌우 안가리고 닥치는대로 투르크군들을 죽여댔고, 투르크군들은 이 모습에 질려버려 모두 혼비백산해버렸다.'''
그것을 본 리처드는 당장 구조에 나섰다. 그러고는 벼락 같은 고함을 치며 투르크군에게로 달려들어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투르크군은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28]이 마카베오[29]의 얼굴을 보고 사방천지로 도망친 것처럼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 머리 없는 투르크군의 시체 몇 구를 우리 손에 남겨놓고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그의 초인적인 패기로 거둔 이날의 승리로 십자군은 살라딘의 본군이 머물고 있는 지역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3.4. 아르수프 전투(Battle of Ars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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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수프 전투

카이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딘으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 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는데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하지만 제안을 한 리처드도 살라딘이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리처드 1세는 2만 명의 십자군을 동원했고 그중 12개의 기병대를 뽑았고 보병을 5개로 재편성시켰다. 그 후 전위와 후위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보병들은 밀집대형으로 해변가를 따라 움직였다. 오후 3시에 3만여 병의 투르크군이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왕은 오로지 밀집대형만 유지한 채로 전진하도록 했고 전투 양상은 공격하는 투르크군과 수비하며 조금씩 전진하는 프랑크군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전투가 벌어진 후 한참이 지난 상황에서 구호기사단이 붕괴되어버릴 지경에 이르자 지휘관들이 리처드 왕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리처드 왕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수비만 하도록 지시했다.

구호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 갈 때쯤, 2명의 기사가 참지 못하고 "성 조지(제오르지오)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갔는데 리처드 왕도 그 타이밍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를 본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Baha ad-Din ibn Shaddad)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들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30]

이 타이밍에 리처드 왕은 일부 지원 병력을 구호기사단으로 보내고, 본인은 홀로 칼을 뽑고 나아가 살라딘의 병력들을 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무쌍난무를 펼쳤는데 그의 활약은 기록으로 보아도 인간이 아닌 느낌을 들게 만든다.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 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 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사납고 비범한 왕은 사방에서 아랍인의 머리를 베었다. 아무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널따란 길이 났다. 그는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 아랍인들을 베어 나갔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낫을 든 농부가 곡식을 베는 것과 같았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이후 3번의 전투가 더 치러졌고 살라딘이 적극적으로 지휘하면서 군을 이끌었으나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십자군이 700여 명의 병력 피해를 입은 반면 투르크군은 최대 7천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편력기에는 참패 이후 살라딘이 총공세를 한번 더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리처드는 단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 적을 그들의 본거지로 밀어 붙였다고 한다.
(프랑크군이) 막사 준비에 전념이 없던 틈을 타 투르크 대군이 우리 군의 후위를 덮쳐왔다. 왕은 격투소리를 듣고 병사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그대로 말에 올라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하느님성모께서 우리를 보우하사"를 큰 소리로 외치며 투르크 군에게도 돌진해 갔다. 그는 이 구호를 두세 번 연달아 외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적에게로 돌진해 사라센 군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르수프 숲까지 밀어붙였다. 그후 왕은 막사로 돌아왔고, 격렬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병사들과 그곳에 가보니 32명의 아미르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여기에서 리처드 1세의 전투 기록 중 일기토가 드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미르는 유럽으로 따지면 영주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리처드 1세는 일기토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을 영주들을 그냥 학살하고 지나간 것이다.(...)

3.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31]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 왕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32]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 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33]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만약 전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 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에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개발살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3차 십자군 당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34]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뒤에 어찌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온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 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호락호락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35]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 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데 당시 성지 예루살렘의 공략에만 몰두해 있었던 부르군디의 공작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이때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 소식도 듣게 된다. 결국 리처드는 다시 한 번 군대를 추스릴 겸 해안으로 군대를 되돌린다. 그때 수세에 몰려 있던 살라딘의 군대가 야파를 공격한다.

3.6. 야파 전투(Battle of Jaf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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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 전투
1192년 7월 27일, 살라딘과 6만 2천여명의 이슬람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십자군은 이 전투에서 맹렬하게 저항하는데, 그 맹렬한 저항은 무슬림의 역사가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투르크 병사들의 어그로는 올라갈 데까지 올라가,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군대가 저런 짓들을 하면 상층부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통제가 안 되고 군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닌데, 설령 살라딘이 명한다고 하더라도 증오범죄를 막을 수 없으리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 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결국 살라딘의 우려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한편 막 팔레스타인을 떠나려던 리처드는 야파가 함락당했단 소식을 알려오며 '슬픔에 겨워 자신의 옷까지 쥐어뜯는' 전령들의 통곡에 크게 분노,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달려갔다.

살라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했고 이 때문에 49명의 수비대원과 49명의 수비대원의 아내, 49필의 말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짱박혔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해, 무슬림군만 가득한 야파 요새의 공략 중요성을 토의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 기다리던 자들 입장에서는 속터지겠지만, 이는 리처드가 매우 신중하고 냉정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36]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 갔다. 잉글랜드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숭고한 왕이시여. 우리 병사들은 지금 전하의 구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 도살자들의 칼날에 쓰려져가고 있나이다.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양들처럼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수비대는 전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는 한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에 리처드가 노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때까지 굳이 공격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고 고민하던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들더니 갑옷을 벗고 석궁과 함께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제 도끼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무슬림 병사들을 베어내었고 혼비백산한 무슬림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잉글랜드군에게 내주었다. 리처드 1세는 개인의 용력을 이용해 80명의 병사들만으로 야파 요새 안에 들어왔던 수많은 살라딘의 병사들을 모조리 몰아낸 것이다!
왕은 성전기사단 건물의 계단 위쪽으로 혼자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성벽 위에는 수비대 구조를 알리는 영국 기가 펄럭였다.
스탠리 레인 풀, `살라딘`
이 장면을 보고 살라딘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살라딘은 헐떡거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우리의 보병과 기병이 훨씬 우세하지 않은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p418

살라딘이 질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 무슨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마냥 맨몸으로 나가 싸운 사람 하나와 80여명의 병사가 야파 요새를 가득 메운 7만여명의 병사들이 뒤엉킨 전장을 쓸어버린 것이다. 이러니 저자가 사탄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던 것. 야파에서의 첫번째 교전이 끝난 후, 살라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웃으며 물었다.
"당신들의 그 전능하신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도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신발[37]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대체 살라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실제로 이때 리처드군은 단 3필의 말만을 가지고 공격을 감행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건 기독교 쪽 역사가도 이슬람 쪽 역사가도 똑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니...이때 살라딘 왕 옆에서 야파 요새가 단 1명의 무력으로 허무하게 빼앗기는 걸 지켜본 역사가는 리처드를 두고 "저 새낀 인간이 아님"이라 단정지었다.[38] 결국 살라딘은 6만 2천이라는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요새를 점령할 뻔 했지만 시간만 끌다가 리처드라는 희대의 괴물 때문에 야파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강화를 제의했지만 아스칼론의 소유권 문제 때문에 결렬되었다.

야파에서 큰코 다친 살라딘은 8월 5일 새벽,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리처드 왕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기사 15명, 보병 2천 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투르크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며 리처드 왕의 무쌍난무로 인해 또다시 불리한 전황도 뒤집어 엎었다.
마침내 리처드는 쇠뇌병들을 앞쪽으로 내보내 사라센 기병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자 창병들은 쇠뇌병들이 지나갈수 있도록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사이로 길을 내주었고, 이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전투는 적의 궤멸로 막을 내렸다. 퇴각의 순간 리처드는 15명의 말 탄 기사와 함께 돌격해 그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사라센군을 덮치며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냈다.

투르크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 1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리처드 1세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리처드는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했던 살라딘이 그에게 말 2필을 보내준다.
그렇게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마 리처드의 말이 쓰러져 죽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투르크 군 한 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날쌘 아랍말 2필을 보내준 것이었다. 리처드도 똑같은 기백으로 그 말들을 받아들여 싸움을 계속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말을 선물받은 리처드는 그 답례로 투르크군을 공격하고, 이런 정신없는 난전중에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후미로 침투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리처드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를 뒤따르던 15명의 기사와 함께 적들을 저지했다.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인데, 이 내용은 편력기뿐 아니라 살라딘의 서기관이었던 "바하 앗 딘"도 동일하게 기술했다.[39]

결국 살라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의 전투로 십자군 측은 단 2명만이 사망[40]했던 반면에, 살라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2마리의 말을 잃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리처드 1세가 아무리 사탄 같은 자라고 하더라도 성을 혼자서 점령할 수는 없다. 유튜브 같은매체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다 보니 "단신으로 성을 점령"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소개되었듯이 전투가 일어나는 중이었고, [email protected]명의 사람이면 적들은 저게 80명인지 8만 명인지 구분할 껀덕지가 전혀 없다. 리처드 1세가 앞에서 다 썰며 밀고 들어오면 무슬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게 되고, 공포는 전염되기 마련이다. 높은 곳에서야 판단할 수 있겠다만은 전화도 없는데 어떡할 것인가. 방어가 굳건한 성을 리처드 1세 혼자서 돌격해서 점령한 게 결코 아니다. 물론 80명 가지고 6만 2천 명을 성에서 몰아내버린 전공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지만.

3.7. 평화협정

살라딘은 야파 전투의 패배로 리처드와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으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이벨린의 발리앙을 살라딘에게 보내서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그럼에도 만약 강화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십자군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통첩을 보냈다.

살라딘도 계속 십자군이 이곳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통합했지만 수백 년간 군웅할거나 다름없던 이슬람 세력은 아직 단단히 통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이미 54세인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들이 영주들의 병력을 계속 동원해 십자군과 싸우는 것이 새롭게 일으킨 왕조에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살라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41]

이로써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강화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42]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또한 살라딘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성지 순례를 쾌히 인정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것도 흔쾌히 승낙했고, 양쪽 다 무사히 포로들을 반환했다.

리처드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인지 다른 십자군 병사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도중에도 끝내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이슬람과의 충돌에 대비해 순례자들을 4무리로 나누고 그 지휘자들에게 어떤 도발행위에도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살라딘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도발행위를 엄금했으며,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과 그의 부하들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윈윈이라서 조약을 맺었는데 재전을 치른다면 기껏 조약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충돌 없이 순례는 끝났다.

이 조약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는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4. 정치적인 면

여기까지만 보면 엄청난 무장인데, 상당 기간동안 군사적인 재능에 비해 정치력은 부족한 암군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그가 단순히 장군으로서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능력, 대전략안, 용인술 역시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리처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리를 선택하는 능력, 특히 휴버트 월터(Hubert Walter)의 선택이었다. 재판관으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그리고 교황의 사절로서, 휴버트 월터는 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앙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잉글랜드에서도 리처드의 오랜 부재 기간중 윌터의 감독하에 중앙정부의 효율적인 통치기구가 발달하였다. 신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하였지만, 전쟁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앙주 제국이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옥스퍼드 영국사(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中

유능한 기사로 알려진 윌리엄 마셜을 기용하거나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를 대법원장을 기용하고 잉글랜드의 재정을 알아서도 돌아가게 할 정도로 인사배치는 무질서한 매관매직이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메시나를 점령하고 나아가 헨리 2세를 본받아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넓히고,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리프 2세와의 반목을 악화시켰다.

신성로마제국에서의 포로 시절,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인맥을 다지기도 한다. 수녀원까지 손을 뻗쳐 엘레오노르가 긁어모은 16만 마르크를 존과 필리프가 모은 6만 마르크보다 먼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전달한 결정적인 요인 덕에 포로에서 풀려난다. 바로 잉글랜드에 가지 않고 외교 관계를 탄탄히 다진 후 잉글랜드에 입성에 왕위를 되찾고 대관식을 다시 치르고 필리프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보급과 재정 상태 안정화에 열중한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조직한 잉글랜드 정부는 리처드가 런던 입성 후 몇 개월 뒤 프랑스와의 전쟁 선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간 세간에 알려졌던 영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가 십자군 전쟁을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아키텐의 군주이자 잉글랜드 왕의 대리인으로서 내정 부분을 상당수 처리해줬다는 것과 휴버트 월터라는 걸출한 신하가 존재했다.

그는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렸으며(이로 인해 도적이 잉글랜드에는 도적이 들끓었고 바로 그것이 로빈 후드.), 심지어는 십자군에서 귀환하던 도중 오스트리아에 포로로 잡히는[43] 실책 등을 저지르기도 했다.

5. 살라딘과 무슬림에 대한 태도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나[44]를 화평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45]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이 계획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냐?"고 열받은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도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또한 리처드는 평화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46]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47][48]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보내려던 계획이나,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평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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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리처드의 기마상

적어도 당대에 전쟁에 관해서는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흔히 그의 라이벌이자 호적수로 손꼽히는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궤멸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런 살라딘도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리처드를 상대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49]

리처드 1세의 무용담을 보면 단순한 야전지휘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50] 덕분에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상병은 회향시켜 전비를 아끼고자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이처럼 리처드는 일신의 무예와 용맹도 대단했지만, 그뿐 아니라 전략·전술적인 안목에 있어서도 당대에는 따를 이가 없었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토머스 매든은 리처드 1세를 중세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로 평하였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집트를 공략하려 했다. 프랑스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십자군 원정 후 귀국한 뒤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51][52] 공성전의 대가인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6천의 병력으로 6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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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가야르(Château Gaillard)

당시에도 리처드와 3차 십자군의 무용담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후에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 사로잡힌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이 거두어졌음에도 오히려 잉글랜드에서는 영웅적인 왕으로서 평가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인기는 1198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세금을 거두자 크게 낮아지게 된다.
리처드 왕은 노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정말, 그대는 주위에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두었군, 로빈. 내 생각에는 리처드 왕조차도 이런 근위대는 몹시 마음에 들어할 것이네." 그러자 로빈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내 부하들 전부는 아니오. 지금 50여 명 정도는 내 오른팔 리틀 존과 함께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 있고. 하지만,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내 말해 두는데,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마치 물처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쏟아 붓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당신들 성직자들은 우리의 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 용사들은 우리의 행동과 꼭 닮은 그분의 용감한 위업 때문에 그분을 충심으로 좋아한다오."
『로빈 후드의 모험』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무훈담의 주인공으로 등장, 대단히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로빈 후드 민담에서는 로빈 후드의 든든한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에서부터 '왕의 모습에 어울리는 준엄한 용모'라고 묘사되기 때문. 기록에 따르면 '얼굴이 멋지고 키가 크고 몸의 형태가 나긋하고 균형잡혔으며 머리는 적갈색으로 나풀거리고 팔이 길어 일반사람보다 검술에 더 걸맞았다'고 한다. 이런 후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리처드의 매력에 매료되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이렇게 사랑받는 인물도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의 무용담은 아직도 자국민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의외로 프랑스인들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태어난 곳은 옥스포드지만 자란 곳은 푸아티에라서 은근히 프랑스인으로 분류하는 주장도 있다. 영국 영사가들은 아예 리처드를 남부 프랑스인으로 분류한다. 실제로 상술한 것처럼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 공위와 아키텐 공위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54] 그의 치세에는 노르망디 공국과 아키텐 공국이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프랑스의 군주로도 분류할 수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어가 모어였던 노르만 왕조 이후의 영국 왕족 및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후대 영국 국왕인 에드워드 1세 때부터의 일이었다. 따라서 영미권 사극에서 리처드 1세를 포함하여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부터 에드워드 1세 치세 초기까지의 기간 내에 살았던 잉글랜드 왕족 및 귀족들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건 엄밀히 말해 고증오류이자 극적 허용이며, 동시기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사극에서 잉글랜드의 왕족 및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고증에 가깝다.

7. 그 외

  • 미트스핀의 의혹을 받고 있는 왕이기도 하다. 필리프 2세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약혼자(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와의 결합에 대비해서 "정조를 지키고 소돔을 기억해서 불법적인 성교를 삼가라"라는 경계를 들었다는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55] 리처드는 동성애 성향이 명백한 윌리엄 롱챔프[56]를 신뢰하고 계속해서 동행한 점도 있다. 첫 약혼자[57]리처드의 아빠의 불륜 상대였고 그로 인해 결국 파혼하고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와 결혼하여 필리프 2세의 원한을 샀다. 이전 항목에 '자기 애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란 서술이 있었지만, 그 시절 프랑스 왕에게 성직 서임권이 없었다. 과거 존 길링엄을 필두로 정말로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동성연인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 들어서 존 길링엄을 통틀어 그가 속한 런던정치경제대학이 이런 식의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취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 필리프 2세의 목표는 프랑스 내에 잉글랜드가 차지한 영지를 점거하는 것이었고, 카페 왕가가 이전부터 헨리 2세에게 농락당해 왔기 때문에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플랜테저넷 왕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실제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아버지 헨리 2세 플랜테저넷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지원하면서 방대했던 잉글랜드령(잉글랜드, 아키텐, 앙주, 노르망디 등 프랑스 왕령의 수배에 달했음)의 분열을 꾀했으나, 헨리 2세가 급사하고 형 둘이 전사한 리처드가 왕위를 이으면서 실패하여 원한이 쌓였다. 더군다나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도 자주 충돌하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 배 멀미가 심한 편이었다. 잉글랜드군이 성지로 향하는 도중 과도할 정도로 자주 정박하곤 해서 지중해 항해가 예상보다 늦어졌는데 이게 리처드의 배멀미 때문이라는 것. 귀국길도 군대와 함께 함대로 오지 않고 육로를 택한 것도 배멀미가 원인이었다는 말도 있다. 배멀미를 심하게 안 했으면 오스트리아에서 포로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도...
  • 잉글랜드의, 아니 영국과 더 나아가 유럽 최고의 기사, 기사도의 꽃으로도 불리운 윌리엄 마셜에 의해 패배한 적이 있다는 자료가 국내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알려져 있는 자료를 자의적으로 호도한 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윌리엄 마셜 항목을 참조.

8. 대중문화에서의 사자심왕 리처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리처드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기사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라서인지 '간사한 국왕 필리프 2세[58]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 리처드 1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왕으로서의 역량으로 둘을 비교하면 명군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프에 비해 리처드는 막장이지만. 뭔가 현대물에서 각색된 삼총사에서의 리슐리외와 버킹엄 공작과 비슷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영국 인물의 관계라는점도 비슷하다.
  • 로빈 후드와 자주 엮이며, 로빈 후드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등장한다. 열에 아홉이면 찌질이(...) 동생 존 왕과는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일단 로빈 후드부터 존 왕보다는 리처드 1세를 더 존경하기도 했고. 전설에 의하면 사제로 위장했다가 로빈에게 잡혀갔는데, 로빈 무리가 마침 활쏘기 내기를 해서 실패하면 벌로 쳐맞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명궁 로빈이 실수를 해서 최초로 맞을 위기에 처했는데, 이에 로빈이 나는 두목이니 니들에게 맞을 수는 없고 저 포로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에게 맞겠다고 주장하여 리처드 1세가 로빈을 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로빈은 '나를 원펀치로 쓰러뜨리면 돈 돌려주고 풀어주겠지만 시원찮았다간 알거지로 만들어놓겠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리처드는 태연하게 '콜'을 부르고 원펀치로 로빈을 날려버렸다고 한다(...). 로빈이 리처드 왕을 따라 십자군 전쟁에 나서는 전설은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한다고.
  • 디즈니 애니메이션 로빈 후드에서는 이름으로만 언급되다 결말 부문에서 등장. 로빈 후드의 결혼식을 축하해준다. 해당 작품은 등장인물이 전부 동물을 의인화한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양반 역시 사자 수인인데, 동생인 존은 갈기도 제대로 안 난 찌질한 성격의 사자로 나온 반면 리차드는 풍성한 갈기를 가진 모습으로 그의 이명인 사자심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판 성우는 박상일.
  • 월터 스콧의 중세 로맨스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홀로 모험을 찾아 돌아다니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약 1세기 전 침략을 당해 피지배층이 된 색슨족과 바이킹의 후예로서 침략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차지한 노르만족 사이의 갈등인데, 리처드는 기득권층인 노르만 혈통의 왕이면서도 색슨과 노르만 사이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노르만 귀족이 색슨족에 대해 불의를 저지르자 로빈 후드와 힘을 합쳐 그 귀족의 요새에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킨다든가.
  • 그가 장수하여 영불제국을 건설했다는 랜달 개릿의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가 있다.
    파일:attachment/리처드 1세/리처드1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선 전통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였다.《원조비사》와《징기스칸 4》때 와서도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정치는(…).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이 E라서 체력이 무려 칭기스 칸과 동일한 15임에도 내정에 필요한 행동력을 너무 먹어 한 턴에 실행할 수 있는 명령 횟수가 적어서 내정에 애를 먹는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전투만 무려 98이다. 칭기즈 칸이나 라이벌 살라흐 앗 딘보다 더 높은 수치. 전투 중 공격하면 전용 대사가 뜨기도 한다.[59] 여러 가지로 우대한 느낌. 또한 정치가 낮긴 하지만 부하 중에 그걸 커버할 '월터'[60]라는 재상이 있어서 내정은 월터에게 맡기고 폭주하듯이 친정하고 다녀도 상관없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의 한계상 중동으로 원정가기 전에 프랑스를 밟고 가야 한다. 지중해로 돌아가려고 해도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걸리적거린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런 나라들은 외국 군대가 자기 영토에 들어오면 공격해버리니까. 일본의 징기스칸 시리즈 관련 웹에서는 로빈 후드를 얻자마자 프랑스를 쳐서 필리프 2세를 잡고, 신성로마나 스페인을 무시하고 바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가 십자군 원정을 재현했다는 플레이 경험담도 있었다.[61]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1시나리오 시작 후 10년 뒤에 사망했지만 자연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게임상 수명은 실제 역사보다 비교적 긴 편이다.
  • 일본 전국시대우에스기 겐신과 묘하게 이미지가 겹친다. 무력으로는 당대 상대할 자가 없었으며, 신실한 성격에 여자를 멀리하는 등. 일생의 라이벌 살라흐 앗 딘의 경우는 다케다 신겐과도 비교가 가능할 듯?[62] 그런데 사실 징기스칸 4에서 다케다 신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둘의 능력치를 보면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신겐, 겐신 능력치와 비슷하다.

    다만 역시나 차이는 존재하는데, 겐신은 싸움도 잘한 동시에 장사하자를 몸소 실천하여 거성에 금덩이를 쌓아놓던 사람이라 내정 다 말아먹은 리처드랑 비교하기 뭐한 감이 있으며, 신겐은 이마가와의 통수를 치고, 미카타가하라 전투로 오다가의 통수를 치는 등 통수왕이라(...)[63] 십자군 측에서도 '진정한 기사'라는 평을 받은 살라흐 앗 딘과는 비교가 안 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에이지 오브 킹에서 바바로사 캠페인 6번째에 동맹군으로 등장한다. 체력 220의 패러딘으로 등장하는데 마지막 미션에서 사라센 공격시작 후 바바로사는 이미 죽었고 지원군은 한 줌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성벽 + 공성무기에 닥돌하다가 죽어버린다(…). 닥돌해서 죽는 리처드를 살리는 방법이 있는데 동맹을 풀고 수도사로 개종을 시도하여 자기유닛으로 만들어보자.[64] 관련 캠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캠페인 내내 바바로사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헨리(하인리히)의 별명이 '사자왕'이라서 제대로 스토리를 안 본 게이머들은 그를 리처드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왕이 아니고 공작이었기 때문에 원래 별명은 사자이며 '사자왕'이라 한 것은 오역이다.[65]
    파일:external/www.cheatcc.com/ageempirerev3.jpg
  • 위와 같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DS 에이지 오브 킹스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리처드 1세의 미션이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에선 초반에 아크레의 포교자들이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의 포교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고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등장한다. 아크레에서 말을 타고 몬테페레스의 월리엄과 신경전을 벌었고 템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인 로베르트 사브레가 마시아프의 암살단을 삭쓸이하기 위해 리처드가 있는 아르수프로가 그를 설득하려 했다. 허나 도중에 알테어가 도착해 그의 앞에서 로베르트의 실체를 폭로하자 이에 리처드는 두사람에게 대결을 제안했고 그 대결에서 승리한 알테어는 살라딘과 화친하라는 조언을 하면서 마시야프로 돌아간다.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인간흉기답게 권왕님이 되셨다.# 그리고 지상 최강의 생물이 된 아버지와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 이후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는 모습과 그에 걸맞는 마마보이 버전(단행본 2권의 모습)도 등장한다. 여담으로 큰형인 헨리는 토키, 제프리는 켄시로, 동생인 존은 쟈기.
    리처드: 십자군은 기사의 의무다무다무다무다

    헨리 2세: 네놈이나 실컷 다녀오라오라오라오라

    필리프와의 동성애설을 채택했는지, 그와 필리프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한다. 결국 리처드 1세가 살라딘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하고,[66]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략 직후에 그 충격으로 몸져 눕다가 복수를 다짐하며 유럽행 뱃길에 오른다.
  • 어쩨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는 대우가 영 좋지 못한데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발리앙에게 자신의 군세에 합세하라는 권유를 던졌지만[67] 이미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열정을 잃은 그에게 자신은 그저 대장장이일 뿐이라며 거절당한다.[68]

    또 다른 작품인 로빈 후드에서는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상태로 나오면서도 화살비가 내리는 전장에서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맨몸으로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는 로빈 후드에게 아크레 대학살에 대한 뼈아픈 직언을 들으면서 그를 가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잠시 병사들이 식사하는 사이에 석궁을 들면서 대등했던 취사병에 의하여 목에 화살이 꿰뚫려 생을 마감하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킹덤 오브 헤븐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킹덤 오브 헤븐의 후속작으로 리처드 1세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후속작 떡밥을 염두해 둔 등장이었다고.
  • 인기 있는 왕답게 Fate 시리즈에도 출연하였다. 세이버(Fate/strange Fake) 문서 참조.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크루세이더 캠페인에서도 당연히 등장. 예루살렘 왕국에 3차 십자군으로 파견 온다. 특수 기능으로 '사자의 심장'을 쓸 수 있는데 광범위 사기(morale)회복 기술이라 전투 중에는 매우 쓸만하다. 패주하겠다 싶은 부대도 이 버프를 받으면 거의 전멸할 때까지 싸운다. 보두앵이랑 같이 붙어 다니면 군대가 패주를 안하는 괴랄한 포스를 선보일 수 있다. 이웃집 웬수 필리프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지원하는 걸로 나온다. 즉 여기서도 적(...)이 될수 있다.[69]
  • 크루세이더 킹즈 2에도 등장하는데, 외교7 무력 19 관리 8 음모 9 지식2(...)라는 지휘관으로써는 매우 뛰어난 능력에 좋은 트레잇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라이벌 필리프 2세(14/19/25/12/13)에게는 한참 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영토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보다 우월하므로 실지왕 존에게 왕위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프랑스를 밀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원문] his lands had been exposed to the intrigues of his brother john and the open attacks of King Philip. When he returned to them he had for too many tasks to do ever to contemplate another journey to the East. For five years he fought brilliantly in France defending his inheritance against the cunning Capetian, till, on 26 March 1199, a stray arrow sht from a rebel castle in the Limousin brought his life to a close. He was a bad son, a bad husband, a bad king, but a gallant and splendid soldier.[2] 이건 웬만한 왕보다 영지가 넓었던 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푸아티에 백작 작위도 동일.[3] 다만, 다른 시대도 아니고 리처드의 선왕인 헨리 2세와 리처드 본인의 시대에, 잉글랜드의 바로 위쪽 스코틀랜드에 '사자왕'이라고 불린 왕 윌리엄이 있기 때문에, 리처드 한 명만 뚝 떼서 사자왕이라고 하면 모를까 당대 영국 근방의 정치, 외교 상황을 서술하며 '사자왕'이라고 리처드를 일컫는다면 혼동이 올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여담으로 사자왕 윌리엄은 적국의 아비(헨리 2세)와 아들(존)에게 모두 일개 봉신으로 격하된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4] 이 과정을 다룬 영국 연극/영화 <겨울 사자들>이 명작이다. 당대의 명배우들이 참여하여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다.[5] 정확하게는 협박 수준이 아니라 부자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무력충돌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신적 충격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 헨리 2세가 코에서 피를 토하며 급사한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인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의 첫 번째 타이틀 획득.[6] 정확히는 앵글로-색슨족이 사용하던 고대 영어다. 현대 영어는 고대 영어와 프랑스어가 혼합된 것.[7] 실제로는 그에 못 미치지만 중세 유럽 기준으로는 상당한 규모의 대군이고 살라딘도 그 이동에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다.[8] 중세의 그림에서 리처드 1세가 하인리히 6세의 발밑에 엎드려 간청하는 듯한 그림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는 잉글랜드 왕은 오만하며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위인이라고 평했다.[9] 이들이 어쌔신(암살자)의 시초이자 그들이 피우던 마약, 해시시가 그 어원이다.[10] 실제로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를 포로로 잡은 일로 교황 첼레스티노 3세로부터 파문당한다. 또한 이때 레오폴트 5세의 바벤베르크 가문 영지가 홍수로 황폐해지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붉은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레오폴트 5세의 행위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레오폴트 5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활약한 상징은 당시 왕이 새로이 문장을 제작하고, 현 국기에도 빨강과 백색으로 자랑스럽게 이어져 오고 있다.[11] 후에 리처드가 석궁에 맞아 죽은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필리프 2세는 에브뢰에 즉시 군사를 보내 재차 보복한다.[12] 출처:Richard I p.323 저자 존 길링엄(런던정치경제대학 역사학 명예교수)[13] 잉글랜드의 프랑스령[14] 전근대에는 항생제가 없다보니 수술하고 나서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흔했다.[15] 하지만 구르동은 리처드의 부하 장군(주군이 구르동의 화살에 맞았을 때 자신이 직접 환부를 헤집으며 화살을 꺼내려 했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고 한다. 물론 위생적 관점으로 보면 그게 화가 된 것이지만)에게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다음에 교수형 당해 죽었다. 다른 일설에서는 리처드의 부하 장군이 리처드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구르동을 리처드의 누이 조안에게 보냈다. 조안은 구르동을 참혹한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16]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테브로 수도원. 각 지방이 인기 좋았던 왕의 유해를 모시길 원했고, 왕 사후에도 지배권이 있음을 보이려는 퍼포먼스 성격이었다.[17] 이교도와의 싸움인 만큼 전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그런 것으로 보인다.[18] 전투 시 애용했던 무기는 덴마크식 도끼였다고 한다. 또 후술할 활약들의 수많은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검도 상당히 애용했다.[19] 심지어 우호적인 유럽 쪽의 기록이 아니라 적대국 아랍 쪽의 문헌 기록이다.[20] 정확히는 3필의 말과 소수의 기사들도 포함.[21] 이건 당시 중세에서의 기사와 말에 대한 정서를 염두에 둬야 하는 부분인데, 당시 기사가 말이 없다는 것은 큰 수치로 여겨지던 때였다. 원탁의 기사 전승에서도 기네비아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말을 잃어버린 랜슬롯이 짐마차를 빌려탔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 심지어 기네비아에게까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살라딘 입장에선 비록 적이지만 평소 존경했던 리처드가 그런 수치를 당하게 생겼으니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임용한은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데 바로 말을 건네 준 것도 살라딘의 전략이었다는 것. 영상 39:26부터 당시 리차드의 십자군은 말이 10여 필에 불과했다. 만약 리처드가 말 위에 올라타 있다면 훌륭한 타겟이 되는 셈. 문제는 리처드는 그 말을 타고 온몸에 화살이 박혔지만 죽지 않고 오히려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거다(...).[22] 일사병이나 열사병이라는 설도 있다.[23] True cross. 즉 예수 그리스도십자가형을 받은 진짜 십자가[24] 혹은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25] 현대(21세기)의 시각으로 12세기를 봐선 안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26] 리처드가 통솔한 병력은 2만 이하, 보통 18,000명 정도로 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이슬람 세력은 다 합친다면 20만 정도로 파악되지만 봉건주의 시대라 저 병력을 전부 살라딘이 통솔할 수는 없었고 살라딘이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최대 5만 명 정도였던 걸로 파악된다. 특히 이슬람 세력도 기독교 세력만큼 단합이 되지 않아 서로 배신을 일삼고 말을 안 듣다보니 동원력이 떨어졌다. 예루살렘 왕국이 100년 동안 버틴 여러 에피소드들을 듣고 있으면 당시 봉건영주의 관계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수적으로는 많아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십자군도 이슬람군도 모두 전문적인 직업군인들로 질적으로는 훈련도도, 무장상태도 삼국지 등에 나오는 징집된 농민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27] 성전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드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다가 아크레 공성전에서 죽는다.[28] 옛날 팔레스타인 서남부에 살며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했던 민족. 성경골리앗이 필리스티아 사람이다.[29] 기원전 167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교적 박해에 대항해 일어난 마카베오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유다"이고,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는 그의 별명이다.[30] 바하 앗딘이 쓴 살라딘의 일대기.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로 직역하면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Sultany Anecdotes and Josephly Virtues)".[31] 십자군 원정을 온 병력들 +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 일대에 위치한 기독교 병력들.[32]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33] 후에 이 일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보두앵 2세는 이들을 불러서 혼내고 이후는 적어도 십자군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다. 1108년 10월의 일로 알레포 영주 라드완+안티오크의 탄크레디 vs 모술 영주 자왈리+에데사의 조슬랭 간의 전투였다. 전투 자체는 라드완과 탄크레디 연합이 승리했지만, 가뜩이나 1차 십자군 대다수가 유럽에 귀환해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보두앵 2세는 십자군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어쨌든 보두앵 2세의 중재로 탄크레디와 조슬랭은 화해했다. 이렇듯 이 시절 이슬람 세력은 일치단결해 십자군과 맞서는건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영토싸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34] 뭐, 엄밀히 말하면 살라딘도 누르 앗 딘이 어느 정도 통합해놓은 걸 물려받은 점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고 아이유브 왕조가 끝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살라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35] 이슬람도 봉건시대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영주들이 병력을 끌고 와 참전하는 식이였는데 살라딘이 오랜 기간 소집하자 병력의 유지비를 부담했던 영주들은 해산을 요구한 것이었다.[36] 하지만 최근 프랑스의 중세 연구에서는 필리프 2세의 귀환 후 리처드가 병력 손실을 우려했다는 분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37] 이 시대의 선박용 신발은 튼튼한 샌달 내지는 슬리퍼에 가까운 물건이다.[38] 리처드의 적들은 리처드를 '악마'라고 불렀는데, 아마 이때를 기점으로 리처드의 적들이 공통적으로 '무시무시한 악마'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39] 참고로 바하 앗 딘은 이날 패배 원인을 살라딘이 너무 관용을 베풀어 줘서라고 분석했다. 하긴 말에서 떨어졌다고 말을 갖다줬으니[40] 다만 부상자는 다수 발생했다.[41] 실제로 살라딘은 다섯아들들에게 영지를 각각 나누어주었고 실질적인 후계자는 알 아지프로 삼아 영주들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게 했지만, 살라딘 사후에 아들들간에 권력투쟁으로 전투까지 벌어져 알 아지스가 알 아지프를 추방하고 후계자가 되었다. 이 혼란은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1198년 알 아지스의 사후(병사)에 술탄이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때 십자군까지 팔레스티나에 남아있었다면 대단히 골치아팠을 것이다.[42] 이때 리처드는 "3년 조약이 끝나면 와서 예루살렘을 되찾겠소."라는 편지를 보냈고 살라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기왕 뺏긴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리처드 그대에게 기꺼이 잃겠노라."라고 답장을 보냈던 것은 유명하다.[43] 아크레 공성전이 끝난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는 자신의 깃발을 리처드 1세의 깃발과 필리프 2세의 깃발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공작의 깃발을 왕의 깃발과 나란히 거는 행위는 오만함으로 해석되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리처드의 병사들이 똥물이 가득한 아크레의 해자에다 내던져 버렸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령관이 되어 적을 막아낸 레오폴트 5세는 바로 귀국하고, 이 일로 앙심을 품게 되었다.[44] 시칠리아의 군주인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으나 굴리엘모 2세가 1189년에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사촌인 탄크레디가 계승했다. 그런데 탄크레디는 굴리엘모 2세가 조안나에게 지참금으로 준 토지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포로로 잡아두자, 이에 빡친 리처드는 3차 십자군을 나서는 길에 먼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해 탄크레디부터 박살내고 여동생의 상속분을 돌려주었다.[45] 살라딘 사후에 술탄이 된다.[46] 알 아딜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으며 비교적 기독교도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협정을 맺는다.[47] 출처: War and chivalry the conduct and perception of war in england and normandy p26 저자 Matthew Strickland 출판:케임브리지대학 출판국[48] 이에 대한 1차 사료는 1200년경에 라틴어로 쓰여진 Itinerarium Regis Ricardi(리처드 왕의 여행기)이다. 이 책에 의하면 리처드는 아버지인 알 아딜을 따라 리처드를 방문한 11살의 알 카밀에게 기사작위와 함께 작위수여에 쓰인 기사검을 선물로 주었고, 알 카밀은 무척 기뻐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라면 또 다른 사료로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간의 회담을 다룬 공식문서상에 '기사작위를 받은 사라센의 왕 알 카밀'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정황상 살라딘의 조카이자 이집트 대영주인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에게 작위를 줄만한 인물은 리처드 1세밖에 없었을 것이다.[49] 그러나 이렇게 리처드가 회복한 프랑스령은 실지왕 존이 모조리 까먹고 만다.[50] 참고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3차 십자군이 결성하게 된 계기가 된 하틴 전투의 패배는 바로 보급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사막을 행군하는데 물이 부족했던것. 정확히는 살라딘이 티베리아스를 공격해 예루살렘군을 물이 부족한 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티베리아스의 영주인 레몽 3세는 자기 영지와 가족을 잃는 한이 있어도 공격을 반대했는데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옹은 오히려 겁쟁이라고 비웃으면서 무모하게 공격에 나선 것.[51] 특히 샤토 가야르에 물자와 식량, 식수를 가득 쌓아놓아 장기전을 대비할수 있었다. 특히 당시 샤토 가야르에는 수비병력이 고작 400~500명밖에 없었는데 무려 8개월을 버틴것이다.[52] 다만 이 물자들은 어디까지나 성의 병력이 버틸 물자였기에 성 주변의 주민들이 성에 들어올 경우 물자가 고갈될까봐 샤토 가야르의 성주는 성으로 피신온 성 주변의 주민 1,400명을 성에서 쫓아내버렸다. 그래서 주민들은 프랑스군에 항복했으나 프랑스군은 받아줄 여유가 되지않은터라 프랑스군에도 쫓겨난다. 이때문에 주민들은 전장터에서 숨어지냈으나 절반이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다. 나중에 필리프 2세가 군영에 도착했을때 숨어있던 주민들을 보고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고 구제해준다.[53] 이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데, 원래 이 성은 리처드 1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해 사실상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나...존 왕 시절에 성을 개수하면서 화장실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동안 노출이 되지 않았던 하수구가 노출되었고 침투방지용 쇠창살을 하수구에 설치하지 않았던것이 큰 실수였다. 덕분에 필리프 2세가 이 성을 공격할 당시에 8개월동안 갖은 수를 써서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도저히 공략방법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존 왕 시절에 개수되어진 하수구를 보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기어 올라가게 했고, 똥과 오물로 범벅이 된(...) 프랑스 병사들이 화장실을 통해 성 안의 예배당으로 출현해 영국군이 혼비백산한 사이 침투한 프랑스 군이 성문을 열어 리처드 1세가 그토록 아꼈던 샤토 가야르가 함락당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치를 떨게 만든 이 샤토 가야르를 일부를 남기고 파괴하도록 지시해 그 이후로는 요새로써의 기능은 물론 도시로써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했다. 근본적으로 리처드가 설계한 상태에선 어떤 약점도 없었지만 존이 손을 대면서 한순간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존의 무능력을 상징하는 사례로도 언급된다.[54]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칭호는 '리샤르 4세'이며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칭호는 '리샤르 1세'다.[55] 이 당시 소돔은 남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방종의 총체적인 의미였고 불법적인 성교란 배우자가 아닌 자와의 성교를 의미했다는 논박이 있다. 학계에서 소돔의 의미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는 상태다.[56] 그는 키가 작고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되었고 리처드의 친우였다. 기랄두스는 윌리엄 롱챔프를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고 이성애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동성 간 성행위가 괴이할 수록 좋아했다.'라고 비난했다.[57] 알레 공주(Alys, Princess of France)라는 여인이고 필리프 2세의 누나인데 지참금까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헨리 2세가 리처드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약혼녀의 불륜을 알고 있던 리처드는 이 둘을 흥미롭게 방관하기만 했다고. 정부인 로자문드가 삼도천을 건너자마자 왕비인 엘레오노르와 이혼하고 알레와 결혼하려 했다는 정황이 보였고 추후 국왕이 된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애첩(?)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58] 실제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무훈담에서 필리프 2세는 악역을 자주 맡는다. 본인부터가 정략과 권모술수의 대가였기 때문인데 이런 무훈담에서는 비열한 인물로 많이 묘사되는 편.[59] "나야말로 리처드 더 라이온하트! 너의 불운을 원망해라!"그야 원망할 만도 하다라거나, "싸움이야말로 내 삶의 보람! 우와아! 피가 끓는다!"[60] 위에 언급된 행정관 휴버트 월터. 정치가 90이다.[61] 요컨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십자군이고 뭐고 자국령에 들어오면 무조건 공격해버리는 인공지능의 한계. 하긴, 살라딘이 아바스 칼리프를 공격하는 세계니 상관없나?[62] 서로를 인정하고 때로는 흠모하기도 하였던 애증의 관계.[63] 오다는 결혼동맹한다고 하면서 통수를 거하게 때렸고, 이마가와는 말할 것도 없다.[64] 킹스에서만 가능하고 정복자 이후부터는 불가능하다. 영웅 유닛은 전향이 안 되기 때문.[65] 둘이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아서 리처드의 누나인 마틸다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이라 하인리히와 리처드는 인척 관계다.[66] 이때에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앞에서만 보여준다는 애교모드까지 발동시켰다(…).[67] 발리앙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지만 리처드는 이미 그의 정체를 눈치챈듯 자신이 대장장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굳이 발리앙을 찾고 있다고 말하며 합세하라는 권유를 은근히 내비쳤다.[68]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발리앙은 이후 도시국가였던 티레에 머물렀으며, 3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라는 리처드 1세의 요청을 씹어버려서 십자군 사이에서 비난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1세의 요청에 훗날 살라딘과의 중재를 담당하기도 했다.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사람을 기용한 리처드나, 욕먹었지만 결국 양측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간자 노릇을 한 발리앙이나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들이다.[69]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이 어지간히 털어먹지 않는 이상 안티오크는 바로 다시 휴전 후 동맹을 맺어주는 호구라서 필리프 2세의 잔머리가 빛이 바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