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0:54:12

엘레오노르 다키텐

파일:1200px-Encyclopædia_Britannica.svg.png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

파일: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
프랑스 왕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카페 왕조
위그 로베르 2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이탈리아의 로잘라 부르고뉴의 베르타 아를의 콘스텐체
앙리 1세 필리프 1세
프리슬란트의 마틸다 키예프의 안나 홀랜드의 베르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
루이 6세 루이 7세
로슈포르의 루시엔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콩스탕스
(루이 7세)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아델 에노의 이자벨 덴마크의 잉에보어 메라니의 아녜스
루이 8세 루이 9세 필리프 3세
카스티야의 블랑카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아라곤의 이사벨 브라반트의 마리아
필리프 4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헝가리의 클레망스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샤를 4세
부르고뉴의 블랑슈 룩셈부르크의 마리아 에브뢰의 잔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장 2세
부르고뉴의 잔 나바라의 블랑슈 보헤미아의 보나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샤를 5세 샤를 6세 샤를 7세 루이 11세
부르봉의 잔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앙주의 마리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브르타뉴 여공작 안 프랑스의 잔 브르타뉴 여공작 안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잉글랜드의 메리 프랑스의 클로드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로렌의 루이즈
부르봉 왕조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마리아 데 메디치 오스트리아의 아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 15세 루이 16세
마리아 레슈친스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 카페 왕조 국왕 · 프랑스 발루아 왕조 국왕 ·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 ·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60719 0%, #cf091f 20%, #cf091f 80%, #a60719);"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웨식스 왕조
에드먼드 1세 이드위그 에드거 1세
셰프트베리의 엘프기푸 다머햄의 애설플레드 엘프기푸 데본의 엘프스리스
애설레드 2세 에드먼드 2세 참회왕 에드워드
요크의 엘프기푸 노르망디의 엠마 엘드기스 웨식스의 엘드기스
해럴드 2세
머시아의 엘드기스
덴마크 왕조
스웨인 크누트
폴란드의 시비엥토스와바 노샘프턴의 엘프기푸 노르망디의 엠마
노르만 왕조
윌리엄 1세 헨리 1세
플랑드르의 마틸다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루뱅의 아델리자
블루아 왕조
스티븐
불로뉴 여백작 마틸다
플랜태저넷 왕조
헨리 2세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프랑스의 마르가리트 나바라의 베렝겔라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존)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 리처드 2세
프랑스의 이자벨 에노의 필리파 보헤미아의 안나 발루아의 이자벨
랭커스터 왕조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6세
마리 드 보헌 나바라의 호아나 발루아의 카트린 앙주의 마르그리트
요크 왕조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
엘리자베스 우드빌 앤 네빌
튜더 왕조
헨리 7세 헨리 8세
요크의 엘리자베스 아라곤의 카탈리나 앤 불린 제인 시모어
(헨리 8세)
클레페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1세 찰스 1세 찰스 2세 제임스 2세
덴마크의 아나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모데나의 마리아
}}}}}}}}}}}}}}}

<colbgcolor=#FFD6D1><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루이 7세의 왕비
잉글랜드 왕국 헨리 2세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
Éléonore d'Aquitaine
파일:아키텐의 엘레오노르.jpg
상상화[1]
이름 프랑스어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영어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출생 1122년[2]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사망 1204년 4월 1일 (향년 82세)[3]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재위 아키텐 공국의 여공작
1137년 4월 9일 ~ 1204년 4월 1일
배우자 루이 7세 (1137년 결혼 / 1152년 무효화)
헨리 2세 (1152년 결혼 / 1189년 사망)
자녀 마리, 알릭스, 기욤 9세, 청년왕 헨리, 마틸다,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엘리노어, 조앤, 존 왕[4]
아버지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
어머니 에노르 드 샤텔로
형제 페트로닐, 기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프랑스의 왕비: 루이 7세와의 결혼과 이혼2.3.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2세와의 재혼
2.3.1. 결혼 생활2.3.2. 남편과의 전쟁
2.4. 왕국의 섭정
3. 여담

[clearfix]

1. 개요

<colbgcolor=#FFD6D1><colcolor=#000> 영어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프랑스어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오크어 Alienòr d'Aquitània
알리에노르 다키타니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중세 프랑스어 Aliénor d'Aquitaine
알리에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라틴어 Alienora
알리에노라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던 인물.

중세의 대표적인 여걸이자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프랑스루이 7세와 결혼했으나 자식 없이 이혼했고 이후 잉글랜드헨리 2세와 재혼해 리처드 1세존 왕을 낳았다. 12세기 서유럽 역사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영토였던 아키텐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점찍어져 당시 중세 유럽 여성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온갖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총명한 머리는 물론 아름다운 외모와 주변을 사로잡는 당찬 성격에 아키텐 여공작 지위까지 가진 엘레오노르는 당대 최고 엄친딸이었으며 특히 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있어 음유시인, 즉 트루바두르들을 후원하였다고 한다.[5] 동생인 기욤이 사망하여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아키텐 지방의 영주들의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6]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단, 카페 왕조가 영지를 낼름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상속권은 결혼한 루이 7세가 아닌 둘 사이의 아들로 한정하는 조건으로 했다. 이는 훗날 그녀가 루이 7세와 아들없이 딸 둘만 있는 채로 이혼한 뒤 헨리 2세와 재혼할 때 그 영지가 고스란히 플랜태저넷 왕조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2.2. 프랑스의 왕비: 루이 7세와의 결혼과 이혼

1137년 4월 9일에 기욤은 스페인 쪽으로 성지순례 중에 죽었고, 그해 7월 25일에 엘레오노르는 보르도의 상 앙드레 성당에서 프랑스의 왕자 루이와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루이 6세의 죽으면서 루이는 루이 7세로 즉위했고, 엘레오노르는 그렇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로서 직접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친정했으나, 프랑스 군은 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부터 쌓여왔던 둘 간의 불화[7]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는 숙부인 안티오키아의 레몽과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한다. 엘레오노르가 직접 십자군에 참여한 것도 루이 7세예루살렘의 순례에 더 중점을 둔 데 반해 엘레오노르는 숙부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이유로 인해 원정이 진행될 수록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7세는 이혼에 합의한다. 결국 1152년 3월 11일 교황은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8] 결혼을 무효화했다. 하지만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은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갔다. 대신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루이 7세에게 독립되어 있던 아키텐 영지의 여공작에 다시 올랐다.

2.3.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2세와의 재혼

결혼 취소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이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의 혼인이 10촌 지간이란 이유로 무효화되었는데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는 그보다 더 가까운 8촌 지간이었다. 사실 당시는 팔촌을 넘어 사촌간 혼인도 일상이던 시대로, 왕족이나 귀족들은 친척과 정략결혼을 할 때는 "기독교 군주들 사이의 결합은 대의명분이 있다."는 구실로 근친혼을 하고 나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의 가치가 다하거나 혼인을 종료하고 싶어지면 그제서야 "근친혼이므로 유효한 혼인 관계가 아니다."라는 명분으로 이혼(= 혼인무효)을 했다.

1152년 5월 18일, 둘은 푸아티에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154년 10월 25일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성탄절에 다시 왕비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후에 지속적으로 전개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9]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이런 수법은 200여 년 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받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여자들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별로 치르지도 않고 영토 확장에 성공한다.

2.3.1. 결혼 생활

첫 결혼에서는 딸 둘만 얻었던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의 결혼에서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으면서 왕가의 핏줄을 번창시켰으나, 당시의 권력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리고 헨리 2세가 상당히 호색가였던 만큼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워대자 둘 사이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삼남 리처드위대한 사람이라 부르며 우상시했고 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아들은 그녀를 다음으로 신뢰했다. 동시대인인 디케토의 랄프는 "리처드가 모후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엘레오노르는 을 가리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불렀지만 리처드만은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지칭했다.[10]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남편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채우지 못한 애정을 리처드에게 쏟는 것으로 대신했다고도 지적한다.
지금껏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모두들 궁금해 했던, "깨어진 동맹의 독수리가 세 번째 둥지에서 기쁨을 찾으리라."라는 멀린의 고대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엘레오노르를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국 위에 말 그대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기 때문에 독수리라고 불렀다. 엘레오노르는 일찍이 이혼을 통해 프랑스인 일가와 결연이 깨어졌고, 헨리 왕은 그녀를 옥에 가둠으로써 또다시 결혼의 연이 깨어졌다. 삼남 리처드는 엘레오노르의 세 번째 둥지이며, 또한 모친의 이름을 드높여 크나큰 영광을 돌리게 될 아들이다.
디케토의 랄프

2.3.2. 남편과의 전쟁

1173년 헨리 2세의 부정으로 불화를 겪던 중, 남편과 공동으로 왕위에 올라있던 아들 젊은 헨리 혹은 청년왕 헨리[11]필리프 2세와 같은 헨리 2세의 정적들에게 꼬드김을 받았고, 동생 리처드와 제프리를 동참시켜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였다. 첫째 아들 기욤이 3살이 안 된 나이에 사망하자 둘째였던 헨리가 사실상 첫째 아들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위까지 올랐으나, 실권은 아버지가 모두 틀어쥐고 있는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오히려 각자 자기몫의 영지를 상속받아 각자 통치를 하고 있던 동생들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막내 에 대해 지나친 편애를 보였던 아버지에 대해서 반발감이 컸던 리처드는 형 헨리의 동참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헨리 2세 콩가루 전설의 시작이었던 이 반란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능함을 아낌없이 보여주던 헨리 2세의 능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고, 이 반란이 실패하자 아들들은 용서해주었으나 엘레오노르는 유폐되고 말았다.

이후 아들들의 반란은 더 이어졌고 결국 헨리 2세가 아낌없이 편애를 퍼부었던 존마저 리처드와 함께 반란에 나서자 기력과 의지를 상실한 헨리 2세는 1189년 사망하였고, 아버지의 왕위를 이은 리처드는 바로 어머니의 유폐를 풀었다.

2.4. 왕국의 섭정

이후 리처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가 리처드 1세로 즉위한 이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고 이후 독일에서 포로로 생포되자 왕이 부재한 왕국을 윌리엄 마샬, 휴버트 월터와 함께 섭정으로서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전쟁터를 누빈 리처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빼어나 자신이 부재한 사이 내정을 돌볼 사람들을 무척 잘 골랐고 상상 이상의 수완을 발휘한 어머니의 능력까지 더해져 장기간의 부재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1199년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그녀의 막내아들 존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다[12] 즉위 후 5년 뒤인 1204년에 사망했다.

3. 여담

  • 엘레오노르의 아들 리처드 1세와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그녀의 전 남편 루이 7세의 아들이지만, 엘레오노르 본인의 아들은 아니다.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이 무효화된 뒤 샹파뉴의 아델(아델라)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애초에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이혼(혼인무효)도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아키텐 영지를 상속했을 것이기 때문에 카페 왕조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과 그렇게 싸워댈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 엘레오노르 본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각각 5명씩 있었는데, 그 중에 딸 둘은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나머지 8명은 모두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아들들 중 첫째 기욤은 3살 무렵에 죽었고, 실질적 장남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반란 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리처드 1세는 정식 아들없이 사망,[13] 4남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자식 없이 할머니보다 일찍 사망[14], 그 많은 아들 중에 오직 존 왕만이 혈족을 남겨 플랜태저넷 왕조가 장수할 수 있도록 했지만, 지지리도 못나서 프랑스의 영지를 대부분 날려먹는 실지왕이 되어버렸다.
  • 로빈 후드를 다루는 작품 중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헨리 2세 시대로 설정하는 작품에서는 로빈 후드를 사면해주고 아들 리처드 1세와 연결해주는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리처드 1세 ~ 존 왕 시대로 늦춰 잡는 작품들에서는 잠시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15]
  • "십자군에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각종 중세 문학에서 살라흐 앗 딘과의 염문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선 이에 대한 증거는 없고 애초에 살라딘은 당시 10살 꼬맹이에 불과했다.


[1] 상상화. 후손의 외적 특징에 비추어 실제로는 어두운 계열의 머리색으로 추정된다.[2] 태어난 해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앨리슨 위어의 책에서는 죽을 때 82세라고 했으니 역산해서 1122년인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3] 80세를 넘긴 거니까 현대인 기준으로도 제법 장수했다.[4] 마리와 알릭스는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둔 딸들이며 나머지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둔 자녀들이다.[5] 이들이 주로 궁정 연애를 다룬 서정시를 많이 읊었으며 시를 읊을 때 쓴 언어가 로망스어였고, 여기에서 연애 혹은 연애물을 의미하는 단어 로맨스가 유래했다고도 한다.[6] 결혼을 통해 그녀가 상속받은 영지를 꿀꺽하려는 영주들이 많았다. 당시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해 아내의 영지나 작위 등을 날로 먹으려는 남자 영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그런 영주들의 대표격이 후일 시할아버지가 되는 풀크 5세였다...[7] 특히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8] 중세 유럽에선 12촌 이내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간주했기 때문.[9] 다만 실지왕 의 치세인 13세기 초엽에 프랑스 내의 영지는 필리프 2세에게 강제로 회수당한다. 헨리 3세 시기인 1259년에 파리 조약으로 보르도 일대의 해안은 수복하여 가스코뉴라고 불리며 백년전쟁 시기까지 통치하긴 한다.[10] 여담으로 디즈니의《로빈 훗》에선 엘레오노르가 배경상의 인물로만 지나가듯이 언급되지만 (정확히는 이름도 직접 언급되지 않고 '왕의 모후' 정도로만 언급된다.) 존 왕의 언급에 의하면 형 리처드만 편애했고 이에 존 왕은 항상 뭐가 안 되면 손가락을 빨며(...) 엄마를 찾는데, 생각해보면 작중 존 왕의 유치하고 찌질한 모습만 빼면 의외로 고증으로 반영된 부분(...).[11]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헨리인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다면 헨리 3세가 되었겠지만 먼저 죽는 바람에 이러한 호칭으로 남았다. 하지만 기름 부음의 의식까지 거쳤기 때문에 정식 왕의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참고로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의 경우 최고의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의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최초의 여왕이 아닌 여군주로 간주된다.[12] 출처: 두산백과[13] 정실 부인 소생이 아닌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이 사생아가 리처드 1세의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14] 리처드 1세 사후 왕위를 주장하며 작은아버지인 존 왕과 싸우다가 심지어 할머니인 엘레오노르를 공격하는 패륜까지 저질렀지만 결국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15] 케빈 코스트너의 의적 로빈후드에서는 리처드 1세로 노년의 숀 코너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엘레오노르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러셀 크로우의 로빈 후드(2010년 영화)에서는 원로 배우 아일린 앳킨스가 역을 맡아 죽은 리처드 1세의 유해를 맞이하는 장면이나 존 왕을 꾸짖는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디즈니의《로빈 훗》에선 직접적인 등장은 없어도 언급상으로만 아주 잠시 지나가듯이 나오긴 한다. 정확히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존 왕 본인이 "엄마는 언제나 리처드 형님만 귀여워하셨지."라는 등의 언급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