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8:22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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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C1EB><colcolor=#000000>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왕국 찰스 2세의 왕비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Catarina de Bragança
파일:Sir Peter Lely (1618-80) - Catherine of Braganza (1638-1705) - RCIN 401214 - Royal Collection.jpg
이름 포르투갈어 카타리나 엔히케타
(Catarina Henriqueta)
영어 캐서린 헨리에타
(Catherine Henrietta)
출생 1638년 11월 25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빌라비소자 공작 저택
사망 1705년 12월 31일 (향년 67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벰포스타 궁
배우자 찰스 2세 (1662년 결혼 / 1685년 사망)
아버지 주앙 4세
어머니 루이자 데 구스만
형제 테오도시우, 안나, 주아나, 마누엘, 아폰수 6세, 페드루 2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브라간사의 카타리나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4. 가족관계
4.1. 조상
5. 여담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국왕 찰스 2세의 왕비.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의 3녀이자 아폰수 6세페드루 2세의 누나이다.

2. 작위

파일:Coat of Arms of Catherine of Braganza.svg
문장

3. 생애

1662년에 잉글랜드찰스 2세와 정략결혼하였다. 결혼 협상에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동인도에서의 무역권과 여러 식민지, 그리고 200만 크라운을 지참금으로 얻어냈다. 결혼식은 1662년 5월에 포츠머스에서 영국 국교회(성공회)식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공식 결혼식 이전에 비밀리에 가톨릭 결혼식(혼인성사)을 진행했다고 한다. 결혼 후 본명인 카타리나에서 영어식인 캐서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캐서린은 찰스 2세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포르투갈 악기 연주와 불꽃놀이 속에서 화려하게 런던에 입장했다.

캐서린은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서 자라 독실하고 조용하며 차분한 여성이었다. 찰스 2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마리는 자신과 같은 가톨릭 신자인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다. 문제는 캐서린의 남편이 역대 잉글랜드의 국왕들 중에서 손꼽히는 호색한이였던 찰스 2세였다는 것. 순진한 캐서린은 남편의 내연녀가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럼에도 캐서린은 남편의 사랑과 존중을 받은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찰스 2세가 결혼 초기에는 아내인 캐서린을 무시하고 정부도 많이 들였지만, 갈수록 캐서린을 아꼈기 때문이다. 찰스 2세는 자신의 내연녀가 바람을 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으나 캐서린이 남자 시종에게 웃어준 것에 대해선 질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캐서린은 바람기 가득한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였다.

전임자인 시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캐서린은 영어를 못하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의바른 태도와 남편을 향한 충실하고 정숙한 아내의 모습으로 조금씩 인식을 바꾸어갔다. 또한 이따끔씩 편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잉글랜드를 돌아다니며 친숙한 이미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캐서린은 카드놀이와 낚시, 소풍을 즐겼으며 변장을 하고 몰래 시골 축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면 대대로 이어진 가톨릭을 향한 경계로 잉글랜드 귀족들의 왕비를 향한 반감은 커져갔다. 잉글랜드 의회는 종종 국왕과 대립할 때 정치적 카드로 왕비를 거론하면서 이혼을 종용했다. 캐서린은 3차례 아이를 유산한 이후에 몸이 크게 상해서 더이상 임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의회의 폐위 요구에 대항할 수 있는 왕비로써의 입지가 없었다. 신하들은 찰스 2세에게 "캐서린을 폐위하고 개신교도인 새 왕비를 맞이하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신하들의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캐서린은 찰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찰스 2세는 신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톨릭 사제들을 잉글랜드에서 모두 추방해야 했다. 캐서린은 자신의 고해신부도 추방당했으나 이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지에서 위로가 되어준 신앙 활동을 하기 힘들어지면서 더욱 쓸쓸한 궁중 생활을 해야 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숨을 거두었다. 찰스 2세 사후에도 왕대비인만큼 캐서린은 잉글랜드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종교 문제로 윌리엄 3세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여 푸대접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모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포르투갈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살다가 1705년에 리스본의 벰포스타 궁전에서 6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Catherine of Braganza)
<colbgcolor=#fff3e4,#331c00> 주앙 4세
(John IV)
<colbgcolor=#ffffe4,#323300> 브라간사 공작 테오도시우 2세
(Teodósio II, Duke of Braganza)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
(John I, Duke of Braganza)
포르투갈의 카타리나[1]
(Catarina of Portugal)
아나 데 벨라스코 이 히론
(Ana de Velasco y Girón)
제5대 프리아스 공작 후안
(Juan, 5th Duke of Frías)
마리아 텔레즈히론 드 구즈만
(María Téllez-Girón y Guzmán)
루이사 데 구스만
(Luisa de Guzmán)
제8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마누엘
(Manuel, 8th Duke of Medina Sidonia)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Alonso, 7th Duke of Medina Sidonia)
아나 데 실바 이 멘도사
(Ana de Silva de Mendoza)
후아나 데 산도발 이 라 케르다
(Joanna de Sandoval y La Cerda)
제1대 레르마 공작 프란치스코
(Francisco, 1st Duke of Lerma)
카탈리나 데 케르다 이 포르투갈
(Catalina de la Cerda y Portugal)

5. 여담

  • 그 유명한 영국의 티타임 문화를 잉글랜드에 처음으로 전파시킨 사람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문화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던데다 홍차는 값비싼 사치품이었기에 잘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인도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에서 나오는 부로 왕실이 부유했고, 사치품인 차도 넉넉하게 마실 수 있어서 티타임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캐서린이 결혼을 위해 잉글랜드에 올 때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시동생 제임스 2세에게 "차 한 잔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넸을 정도였다. 캐서린은 잉글랜드로 시집온 후에도 고향에서 하던 대로 오후의 티타임을 즐겼고, 이를 본 잉글랜드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도 티타임이 유행하면서 문화로 정착하게 되었다.
  • 찰스 2세의 내연녀들은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캐서린 왕비를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그 중 가장 심하게 캐서린을 무시하고 다닌 내연녀는 레이디 캐슬마인 바바라 팔머였다. 레이디 캐슬마인은 캐서린과 찰스 2세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궁중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왕비의 수석시녀 자리를 요구했다. 캐서린은 당연히 남편의 내연녀를 시녀로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고, 찰스 2세의 측근들마저 이 처사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를 표했다. 그러나 아직 왕비와 데면데면했던 찰스 2세는 포르투갈에서 함께 온 캐서린의 시녀들을 대부분 해고하면서까지 자신의 내연녀를 수석시녀로 임명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캐서린은 이런 남편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레이디 캐슬마인은 찰스 2세의 총애만 믿고 함부로 정치에 관여하고 국고를 탕진하거나, 다른 남자들과 염문을 일으키면서[2]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결국 그런 행동이 독이 됐는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찰스 2세의 총애를 잃어가다가, 이후 캐서린 왕비의 수석시녀 자리에서도 해임되면서[3] 찰스 2세가 죽기 몇 년 전에 궁궐을 떠났다.
  • 찰스 2세의 내연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루이즈 드 케루알과 사이가 좋았다. 케루알은 캐서린의 프랑스인 시녀였다가 찰스 2세의 총애를 받고 왕의 내연녀가 된 인물이다. 케루알은 다른 내연녀들과는 달리 캐서린에게 항상 예의를 갖추며 행동했고, 이에 따라 캐서린도 케루알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1678년에 "가톨릭 신자가 국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가짜뉴스가 잉글랜드에 퍼진 사건이 있었다. '교황의 음모(Popish Plot)'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왕비인 캐서린은 물론이고, 잉글랜드에 있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대중의 의심과 공격을 받았다. 이때 안 그래도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대중들의 미움과 공격을 당하던 케루알의 신변을 캐서린이 보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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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누엘 1세의 손녀이다.[2] 이 때 레이디 캐슬마인과 정사를 벌이다 들통난 남자 중 한 명이 존 처칠이다.[3] 1673년에 잉글랜드 의회에서 비국교도(성공회)가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하는 법률인 심사법(Test Act)이 통과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바바라도 얄짤없이 수석시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