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4 17:44:31

알락산더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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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알락산더르 1세
Alaxandair I
파일:알락산더르 1세.jpg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알락산더르 막 말 콜룸
(Alaxandair mac Maíl Coluim)
영어 알렉산더 1세
(Alexander I)
출생 1080년
사망 1124년 4월 23일 (향년 43~44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107년 1월 8일 ~ 1124년 4월 23일
부모 아버지: 말 콜룸 3세, 어머니: 웨식스의 마거릿
형제 에드워드, 에드가르, 에드먼드, 마틸다, 메리, 다비드 1세
배우자 노르망디의 시빌
자녀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사생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5대 국왕.

2. 생애

1080년경 말 콜룸 3세웨식스의 마거릿의 다섯번재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은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093년 11월 아버지가 노섬브리아 원정을 떠났다가 형 에드워드와 함께 전사한 뒤 삼촌 돔날 3세가 알바 왕위에 오르자, 그는 형제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097년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은 형 에드가르 막 말 콜룸이 돔날 3세를 물리치고 새 국왕이 되었고, 알락산더르는 형제들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1104년 더럼에서 성 커스버트의 유해가 재매장되기 전에 조사할 때 참석한 수석 평신도로서 헌장에 이름을 남겼으며, 포스 강 북쪽의 알바 왕국과 로디언에 토지를 소유했다. 1107년 1월 8일 형 에드가르가 사망한 뒤 알바 왕위를 받았고, 막내 동생 다비드 1세는 에드가르의 유언에 따라 컴브리아 영지를 받았다. 얼마 후,모레이와 미어른스의 막 베하드 잔당들이 인버고리에 들린 알락산더르 1세를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알락산더르는 적절한 시기에 경고를 받고 암살자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그 후 기사단을 이끌고 반군을 스톡포드 페리까지 추격했고, 분견대는 말을 타고 모레아 만을 건너 반군을 맹렬히 공격해 섬멸했다. 살아남은 소수의 반군은 알락산더르 1세에게 굴복하고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알락산더르 1세는 알바 왕국을 강경하게 통치해, 나라 안에 평화를 유지했다. 또한 무질서와 부패에 빠져 있던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격노한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덤펀린에 세운 수도원과 헹 에드가르가 콜딩엄에 세운 수도원에 기부했고, 2개의 주교구도 설립했다. 그러던 1113년, 형제 다비드 1세가 헨리 1세의 지원을 받고 형에게 트리트 강 상류와 테비엇 강을 따라 로디언에 있는 추가 영지를 달라고 요구했다. 알락산더르 1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다비드 1세는 "컴브리아의 왕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114년, 알락산더르는 헨리 1세의 귀네드 왕국의 국왕 그루퍼드 압 키난을 상대하는 원정에 참여했으며, 헨리 1세의 사생아인 노르망디의 시빌과 결혼했다. 1115년, 타인머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던 아버지 말 콜룸 3세의 유해를 발굴한 뒤 덤펌린 수도원으로 옮겨서 어머니 마거릿의 무덤 옆에 안장했다. 1123년, 그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에 휘말려 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겪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구했다고 여기고, 인치콜룸에 감사의 표시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어머니가 묻힌 덤펌린 수도원의 서쪽 입구를 둘러싼 탑 2개를 건설했다. 이렇듯 종교적으로 신실한 군주였지만, 캔터베리 대주교가 세인트앤드류스 주교를 선임할 권리를 주장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인트앤드류스 주교를 복속하기 위해 일부러 새 주교를 오랫동안 세우지 않기도 했다.

1124년 4월 23일, 알락산더르 1세는 스털링에 있는 궁정에서 사망했다. 그는 1122년에 사망한 시빌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형제 다비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생아인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는 알바 왕위를 놓고 다비드 1세와 여러 차례 분쟁을 벌였지만 끝내 실패하고 체포된 뒤 록스버러 성에 죽을 때까지 감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