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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카우산틴 2세 Causantín II | |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 |
이름 | 스코틀랜드 게일어: Causantín mac Áeda (카우산틴 막 아다) 영어: Constantine II(콘스탄틴 2세) |
출생 | 879년 이전 |
사망 | 952년 (향년 미상) |
재위 | 픽트 국왕 |
900년 ~ 943년 | |
부모 | 아드 막 키나다 |
자녀 | 일둘브 막 카우산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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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8대 국왕. 43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바이킹, 웨식스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가 세운 정부 체제는 훗날 다비드 1세의 내정 개혁 이전까지 이어졌다.2. 생애
2.1. 초기 생애
조부는 알바 왕국 초대 국왕 키나드 1세이고, 아버지는 아드 막 키나다이다. 아버지 아드는 877년경 왕위에 올랐지만 1년 후인 878년에 암살당했다. 이로 볼 때 그는 879년 이전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삼촌 카우산틴 1세에서 딴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가 862년부터 877년까지 통치했던 삼촌의 치세에 태어났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사후 기리크 막 둥갈과 오하드 막 룬이 동시에 집권했을 때,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사촌인 돔날 2세와 함께 친척이 사는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불확실하다.889년 키나드 1세와 오하드가 축출된 뒤, 돔날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얼스터 연대기>는 돔날 2세를 'ri Alban'(알바의 왕)이라고 칭했는데, 그의 전임자들을 '픽트족의 왕'이라고 칭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호칭 변화는 브리튼 북부의 군소 국가들이 알바 왕국으로 통합되는 변화 과정을 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돔날 2세는 바이킹의 침략에 직면했다.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돔날 2세는 이니시브솔리안(Innisibsolian)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에서 노르드인을 격파했다. 그러나 오피둠 포더(현재 둠노타르 성)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끝내 전사했다고 한다. '베르찬의 예언'은 그가 게일인[1]에게 독살당했다고 기록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하이랜드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던 중 노령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카우산틴 2세가 알바 국왕이 되었다.
2.2. 치세
2.2.1. 바이킹과의 전쟁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903년 바이킹이 던켈드와 '알바니아' 전역을 약탈했다고 한다. 알바 왕의 연대기에서 '알바니아'(Albania)가 이때 처음 등장했다. 이 바이킹들은 902년에 더블린에서 축출된 이들일 수도 있고, 900년 돔날 2세를 살해한 바이킹일 수도 있다. 알바 왕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스라트 에렌(현재 퍼스셔의 스트래선)에서 섬멸되었다고 한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더블린의 추방된 왕 이마르 우아 이마르와 그를 추종하는 바이킹들이 904년 알바군에게 섬멸되었다고 한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는 알바군이 콜룸바의 개입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 후 알바 왕국은 반 세기 동안 바이킹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910년대, 맨섬을 중심으로 아일랜드해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던 우이 이마이르(Uí Ímair, 이마르의 후손) 왕조가 아일랜드해에서 활개쳤고,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라그날드 1세가 브린튼 북부를 침공했다. 요크 주민들은 이들의 침략을 우려해 머시아의 여군주 애설플래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918년 6월 12일에 애설플래드가 사망하자 라그날드 1세가 즉시 요크를 접수했다. 그러나 버니시아의 통치자 엘드레드가 카우산틴 2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카우산틴 2세는 이대로 가다간 바이킹이 자국까지 밀려올 거라 여기고, 이에 응하기로 했다.
카우산틴 2세와 엘드레드는 군대를 남쪽으로 이끌고 타인 강 유역의 코브리지에서 라그날드 1세와 맞붙었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라그날드 1세의 군대는 4개 대대로 조직되었다. 알바군은 처음 3개 대대를 물리쳤지만, 라그날드 1세가 직접 지휘하는 4번째 대대가 매복 공격을 가해 그들을 격파했다. 하지만 카우산틴 2세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가 코브리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반면 <산크토 쿠스베르토의 역사>는 라그날드 1세가 이겼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코브리지 전투에서 승패가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았다고 본다.
2.2.2. 왕국 체계 개편?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는 906년에 스콘 인근 '신앙의 언덕'에서 셀라흐 주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신앙의 법률과 규율, 교회의 권리, 그리고 복음을 'pariter cum Scottis'와 함께 보존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pariter cum Scottis'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스코틀랜드 역사가이자 고대 유물 수집가 윌리엄 포브스 스킨(William Forbes Sken, 1809 ~ 1892)과 앨런 오어 앤더슨(Alan Orr Anderson, 1879 ~ 1958)은 이를 "스코틀랜드의 관습에 따라"로 번역하면서, 게일인의 관습이 카우산틴 2세 치하에 속한 교회에 적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자 토머스 찰스 에드워즈(Thomas Charles-Edwards, 1943~)는 게일인이 주교와 왕의 회동에 참석했을 뿐, 그 외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영국, 아일랜드, 중세 초기 스칸디나비아 역사 전문 역사가 알렉스 울프(Alex Woolf, 1963 ~ )는 "스코틀랜드의 관습"은 이 회의의 조직에만 관련이 있고 거기에서 논의되는 주제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만약 이 회의가 실제로 아일랜드의 법을 종교 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픽트랜드에 속한 교회의 게일화의 중요한 단계가 될 수 있다. 아일랜드 태생의 브리튼 제도 중세 역사가 알프레드 P.스미스(Alfred P. Smyth, 1942 ~ 2016)는 이를 "고대 픽트족에 대한 게일족의 확실한 승리"라고 해석했다. 또한 이것이 정치적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는데, 나중에 스콘에서 열릴 대관식을 예고한 것일 수도 있고, 왕과 교회의 권력 분쟁을 종식하고 양자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맺었을 수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셀라흐가 전임 국왕 기리크 막 둥갈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카우산틴 2세는 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교회의 특권을 유지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2.2.3. 웨식스와의 전쟁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920년 웨식스 왕 대 에드워드가 요크를 지배하던 라그날드 1세, 버니시아의 엘드레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 압 둘라흐, 그리고 "스코트인(scottas)의 왕"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는 평을 받지만, 카우산틴 2세가 다스리는 나라의 주민들을 묘사할 때 '스코트인(scottas)'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사례였다. 라그날드 1세는 921년에 사망했고, 그의 후게자 시그트리그르 카흐는 927년에 사망했다. 웨식스 왕 애설스탠은 이 기회를 틈타 노섬브리아를 접수했고, 이를 통해 브리튼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브리튼 북부 왕들과 이몬트 다리에서 만나 "우상 숭배를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이는 바이킹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12세기 역사가 맘스버리의 윌리엄은 애설스탠이 이 회의에서 카우산틴 2세의 아들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아들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는데, 여러 학자들은 일둘브 막 카우산틴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7년간 브리튼 북부는 평온했고, 애설스탠은 웨일스를 제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934년 알바 왕국을 향한 원정을 단행했는데, 현존하는 사료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애설스탠은 934년 5월 28일 윈체스터에서 군대를 집결했고, 6월 7일 노팅엄으로 진군했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함대와 함께 북상했다. 스트래스클라이드 국왕 오웨인 압 둘라흐는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항복했고, 애설스탠은 여세를 이어가 하이랜드의 던노타와 마운트를 접수했으며, 그의 함대는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스네스까지 이르렀다.
'클론맥노이즈 연대기'는 알바인들이 애설스탠이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게 했다고 기록했다. 반면에, 헌팅던의 헨리는 잉글랜드군이 별다른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고 진격했다고 설명했다. 현대 학자들은 두 기록을 취합해서 카우산틴 2세가 군사적 저항을 관두고 애설스탠과 외교로 이 전쟁을 해결한 것으로 본다. 우스터의 존은 카우산틴 2세의 아들 한 명이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카우산틴 2세 본인은 애설스탠과 함께 버킹엄으로 가서 '알바의 소왕'으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카우산틴 2세는 935년에도 시렌세스터에 있는 애설스탠의 궁정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발행된 헌장에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과 웨일스의 하이웰 압 카델보다 중요한 애설스탠의 봉신으로 기록되었다.
937년, 카우산틴 2세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과 더블린의 올라프 고트프리슨과 연합하여 웨식스를 침략했다. 알바 왕국-더블린-스트래스클라이드 연합군은 웨식스 북서부를 철저히 약탈했다. 애설스탠은 이에 맞서 군대를 한 달 동안 소집한 뒤 10월경에 브루난버[2]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3]는 전장에서 아들 셀라흐를 포함한 여러 친구와 가족을 잃고 자국으로 패퇴했다. 하지만 애설스탠 역시 두 조카와 사촌들을 잃었다. 이로 볼 때 양자 모두 브루난버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연합군이 애설스탠에게 패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2.3. 퇴위와 말년
943년, 카우산틴 2세는 퇴위를 선언했다. <알바 왕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그는 60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왕위를 유지할 기력이 없었기에 자진해서 퇴위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일둘브 막 카우산틴은 너무 어려서, 돔날 2세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인 말 콜룸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베르찬의 예언>에 따르면, 이 퇴위는 자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말 콜룸 1세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카우산틴 2세는 퇴위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대수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은거한 수도원의 명칭은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치세에 재건된 세인트 앤드류스 수도원일 가능성이 있다.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950년 카우산틴 2세의 사주를 받은 말 콜룸 1세가 노섬브리아를 침공해 티스 강변까지 약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부 기록에는 카우산틴 2세가 말 콜룸 1세로부터 왕관을 일주일간 빌린 뒤 친히 군대를 이끌고 노섬브리아를 휩쓸고 돌아왔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는 952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2년 후 말 콜룸 1세가 죽자,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일둘브 막 카우산틴이 왕위에 올랐다.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는 인둘프 외에도 브루난버 전투에서 전사한 셀라흐라는 아들과 더블린과 요크의 왕 올라프 고트프리슨의 아내가 된 성명 미상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1] 알핀 가문은 게일계고 돔날 2세도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추측이 있는 만큼 왕가 사람 혹은 최측근 귀족 세력으로 추측할 수 있다.[2] 이 곳이 어디인지는 많은 추측이 제기되었는데, 잉글랜드 서부 해안가의 브롬보로우라는 마을이라는 설이 우세하다.[3]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를 "백발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