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0:00:36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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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국왕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Margrét Eriksdottir
파일:008-001-059-342-R.png
이름 고대 노르드어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Margrét Eriksdottir)
스코틀랜드 게일어 마그라드
(Maighread)
영어 노르웨이의 마거릿
(Margaret, Maid of Norway)
출생 1283년
사망 1290년 (향년 6~7세)
재위기간 1286년 ~ 1290년
아버지 에이리크 2세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마거릿[1]
이복형제 잉에보리

1. 개요2. 이름3. 생애4. 이후의 이야기5. 가계6. 여담

[clearfix]

1. 개요

13세기 노르웨이 왕국공주이자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의 여왕.

2. 이름

이름고대 노르드어로는 '마르그레트'(Margrét), 노르웨이어로는 '마르그레테'(Margrete), 영어로는 '마가렛'(Margaret)인데, 각각 다른 언어로 읽었을 뿐이지 다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 뒤에 붙는 '에이릭스도티르'(Eriksdotter)는 성씨가 아니라 '에이리크의 '(Erik's daughter)[2]이라는 부칭(父稱)이다.[3]

3. 생애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알바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딸 마거릿의 외동딸이다. 에이리크 2세와 마거릿의 결혼은 정치적인 목적하에 이뤄졌다. 노르웨이는 1260년대에 알바 왕국의 압력에 못 이겨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양도해야 했다. 그들은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의 안보를 확보하길 원했고, 알바 왕국 역시 강력한 함대와 전투력이 뛰어난 전사들을 갖춘 노르웨이와 이 이상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양자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마거릿의 지참금은 14,000 메르크였으며, 그 중 절반이 1286년까지 지불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벤프셔의 로시메이, 애버딘셔의 벨헬비, 웨스트 로디언의 배드게이트, 미들로디언의 라소 등 여러 영지를 에이리크 2세에게 넘기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들 영지의 연간 총 소득은 700 메르크였다.

생년월일은 1차 사료에는 나와 있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출산 중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어머니가 사망한 날인 1283년 4월 9일에 출생했을 거라고 본다. 1284년 1월,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인 알락산더르 왕자가 사망했다. 이제 알락산더르 3세에게 남은 유일한 후손은 당시 1살 밖에 안 된 마르그레트 뿐이었다. 그 해 2월 5일, 알락산더르 3세는 스콘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백작 13명, 성직자 11명, 영주 25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왕의 요구에 따라 마르그레트를 알바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알바 왕국에서 여왕이 등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데다, 당시 마르그레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녀가 왕위에 오른다면 알바 귀족들이 그대로 인정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걸 잘 알았던 알락산더르 3세는 아들을 낳기 위해 재혼을 서둘렀고, 1285년 10월 14일 또는 11월 1일 제드버러에서 드뢰 백작 로베르 4세의 딸 욜란드와 재혼했다.

이후 욜란드가 임신하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알락산더르 3세가 1286년 3월 19일 밤에 킹혼에 있는 왕비를 만나러 가기 위해 폭풍우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여행을 떠났다가 낭떠러지에서 말이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사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남은 이는 당시 3살이었고 노르웨이에 있던 마르그레트와 욜란드 왕비의 뱃속에 있는 태아 뿐이었다. 그해 4월, 스콘에서 긴급 의회가 소집되었다. 제6대 에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갤러웨이 영주 존 1세 드 발리올 모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의회는 둘 중 하나가 섭정이 되면 왕위까지 노릴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의회는 '수호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고,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 인사는 위원회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위원회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샤트, 파이프 백작 돈카드, 부컨 백작 알락산더르 코민과 바데녹 영주 존 2세 코민, 스코틀랜드 대순경 제임스 스튜어트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선왕과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미래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욜란드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1286년 11월 말, 욜란드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사산했거나 출생 직후 사망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 알바 왕국을 이끌었던 둔켈드 왕조가 단절되었고, 마르그레트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제 수호자 6인은 마르그레트를 대신해 왕국을 통치하고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애넌데일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여성 상속인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발리올 가문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289년까지 수호자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수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알바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간의 알력 다툼이 심해졌다.

알바 의회는 왕국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의 처남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6일, 솔즈베리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르그레트는 에드워드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알바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290년 3월, 잉글랜드-알바 왕국 국경 인근 버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교황청이 이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알바 귀족들은 이대로 가다간 알바 왕국이 잉글랜드에 완전히 병합되고, 잉글랜드 왕이 자기들의 성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으며, 알바 성직자들도 자기들이 누리던 특권이 잉글랜드 국왕에 의해 재분배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1290년 7월 버검에서 열린 2번째 의회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8월 28일 노샘프턴에서 양국의 국경과 특권의 보존을 보장하며, 알바 왕국의 독립과 성직자와 귀족의 모든 자유를 보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1290년 9월, 당시 7살이었던 마르그레트는 나르베 주교와 토레 하콘손 남작과 함께 배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나 알바 왕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도중에 배멀미에 시달렸고, 9월 23일 오크니 제도에 상륙한 뒤 일주일간 고통을 겪다가 1290년 9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나르베 주교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노르웨이로 반환되어 베르겐의 크라이스트처치 수도원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4. 이후의 이야기

스콘에 모여서 어린 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던 알바 귀족들은 10월에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후 여러 야심가가 알바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 숫자는 14명에 달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알바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알바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때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인 에이리크 2세도 알바 왕위를 주장했으며, 딸이 즉시 여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간섭에 시달린 끝에 프랑스 왕국과 손잡고 독립을 선언했고, 에드워드 1세는 주군에게 반역을 저지른 봉신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병합하려는 에드워드 1세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스코틀랜드인 간의 수십년에 걸친 전쟁이 벌어졌다.

1299년, 에이리크 2세가 사망했고 동생 호콘 5세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다. 이듬해인 1300년, 한 여인이 독일의 뤼베크에서 배를 타고 베르겐에 도착해 자신이 마르그레트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이 오크니 제도에서 죽지 않았고, 토레 하콘손의 아내 잉게보르그에 의해 독일로 팔린 뒤 그곳에서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베르겐 주민들과 일부 성직자들은 이를 믿고 그녀를 여왕으로 받들었지만, 1301년 호콘 5세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체포된 뒤 베르겐의 노르드네스에서 반역 혐의로 화형되었으며, 그녀의 남편은 참수되었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이 여인을 성인으로 숭배했다. 성직자들의 파문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년 베르겐으로 순례했으며, 1370년대에 성 마르그레트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주로 베르겐에서 무역 활동하던 독일 상인들의 지원을 받다가 16세기에 종교 개혁의 열풍이 노르웨이에 전파되면서 노르웨이가 루터교회로 개종할 무렵에 사라졌다.

5. 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마르그레트
(Margaret)
<colbgcolor=#fff3e4,#331c00> 에이리크 2세
(Eric II of Norway)
<colbgcolor=#ffffe4,#323300> 망누스 6세
(Magnus VI of Norway)
호콘 4세
(Haakon IV of Norway)
마르그레트 스쿨라도티르
(Margaret Skulesdatter)
덴마크의 잉에보리
(Ingeorg of Denmark)
에리크 4세
(Eric IV of Denmark)
작센의 주타
(Jutta von Sachen)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Margaret of Scots)
알락산더르 3세
(Alexander III of Scots)
알락산더르 2세
(Alexander II of Scots)
마리 드 쿠시
(Marie de Coucy)
잉글랜드의 마거릿
(Margaret of England)
헨리 3세
(Henry III of England)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Eleonore de Provence)

6. 여담

초상화는 나름 여왕이다 보니 실제 모습보다 더 성숙하게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망 시점에서 불과 6~7살이었기 때문.


[1] 알락산더르 3세의 딸.[2] 아버지는 노르웨이의 에이리크 2세이다. 이 시절의 노르웨이는 살리카법을 엄격하게 지켰기에 아들이 없는 에이리크 2세는 동생인 호콘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즉, 마르그레트가 오래 살았어도 노르웨이 왕위까지 물려받지는 못했을 것이다.[3] 이러한 독특한 작명법은 현대에는 아이슬란드에만 남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이슬란드/문화 문서 참조. 그 외에도 부칭만 쓰는 것은 아니지만 동슬라브어권에서는 서구권의 세례명 자리에 부칭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