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8:43:02

다비드 1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픽트인의 왕
알핀 왕조
키나드 1세 돔날 1세 카우산틴 1세 아드 기리크
픽트인의 왕 알바국왕
알핀 왕조
오하드 돔날 2세 카우산틴 2세 말 콜룸 1세 일둘브
알바국왕
알핀 왕조
두브 킬렌 키나드 2세 아믈리브 키나드 2세
알핀 왕조 둔켈드 왕조 모레이 왕조
카우산틴 3세 키나드 3세 말 콜룸 2세 돈카드 1세 막 베하드
모레이 왕조 둔켈드 왕조
룰라흐 말 콜룸 3세 돔날 3세 돈카드 2세 에드가르
둔켈드 왕조
알락산더르 1세 다비드 1세 말 콜룸 4세 일리암 1세 알락산더르 2세
알바국왕 스코트인의 왕
둔켈드 왕조 스베리르 왕조 발리올 왕조 브루스 왕조
알락산더르 3세 마르그레트 로버트 1세 데이비드 2세
스코트인의 왕
발리올 왕조 브루스 왕조 스튜어트 왕조
에드워드 데이비드 2세 로버트 2세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2세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 메리 1세
제임스 6세 찰스 1세 찰스 2세 제임스 7세 메리 2세
윌리엄 2세
}}}}}}}}}}}}}}}

<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다비드 1세
Dauíd I
파일:다비드 1세.webp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다비드 막 말 콜룸
(Dauíd mac Maíl Choluim)
영어 데이비드 1세
(David I)
출생 1084년
사망 1153년 5월 24일 (향년 68~69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124년 4월 23일 ~ 1153년 5월 24일
부모 아버지: 말 콜룸 3세, 어머니: 웨식스의 마거릿
형제 에드워드, 에드가르, 에드먼드, 알락산더르 1세, 마틸다, 메리
배우자 헌팅던의 모드
자녀 말 콜룸, 헨리, 호디에르나, 클라리시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알바 국왕
2.2.1. 왕위 계승과 내전2.2.2. 잉글랜드 침공2.2.3. 스코틀랜드 북부 지배 시도2.2.4. 잉글랜드 북부 지배력 강화 시도2.2.5. 내치
2.3. 말년
3. 가족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6대 국왕. 노르만 왕조의 방식을 본따 알바 왕국의 국가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무정부시대를 틈타 잉글랜드 북부 상당수를 공략한 명군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084년경 말 콜룸 3세웨식스의 마거릿의 여섯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1093년 11월 아버지가 노섬브리아 원정을 떠났다가 형 에드워드와 함께 전사한 뒤 삼촌 돔날 3세가 알바 왕위에 오르자, 그는 형제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9살이었다. 이후의 초기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지만, 1097년 형 에드가르 막 말 콜룸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잉글랜드 궁정에 자주 왕래하면서 누이 마틸다와 결혼한 헨리 1세의 총애를 받았고, 런던에서 공부하면서 상당한 지식을 습득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멜즈버리의 윌리엄은 다비드 1세가 "우리와의 교류와 우정을 통해 뛰어난 예의범절을 습득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야만스러움의 얼룩을 없앴다"라고 기록했다.

1107년, 에드가르 막 말 콜룸이 사망하면서 형제 알락산더르 1세에게 알바 왕위를 넘겨줬고, 다비드 1세에게 컴브리아 영지를 수여했다. 1113년, 다비드 1세는 헨리 1세의 지원을 받고 형에게 트리트 강 상류와 테비엇 강을 따라 로디언에 있는 추가 영지를 달라고 요구했다. 알락산더르 1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다비드 1세는 "컴브리아의 왕자"(princeps Cumbrensis)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가 다스리는 영지는 록스버러셔, 셀커크셔, 버윅셔, 퍼블스셔, 라나크셔로 구성되었으며, 포스강 남쪽의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갤러웨이 지역은 다비드 1세의 영지 밖에 있었다.

1113년, 다비드 1세는 헨리 1세의 주선으로 헌팅던 여백작 모드와 결혼하면서 헌팅던 백작이 되었고, 노샘프턴, 헌팅던, 베드퍼드 주에 걸쳐 방대한 영지를 확보했다. 모드의 조부 시워드 백작은 다비드 1세의 아버지 말 콜룸 3세가 막 베하드를 물리치고 알바 국왕이 되는 데 도움을 줬다. 모드는 이전에 윌리엄 1세윌리엄 2세를 섬긴 기사인 상리스의 시몽 1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다비드 1세와 결혼했을 때 거의 40세였다. 여기에 더해, 헨리 1세는 요크셔와 노르망디에 속한 영지 일부와 할람셔와 북부 코탕탱반도의 영지도 수여했다. 그는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거물이 되었다. 그가 이렇듯 헨리 1세의 총애를 듬뿍 받은 것은 헨리 1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항상 동참해 충성심을 입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2.2. 알바 국왕

2.2.1. 왕위 계승과 내전

1124년 4월 23일, 형 알락산더르 1세가 스털링에 있는 궁정에서 사망했다. 그는 1122년에 사망한 시빌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다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를 낳았다. 또한 말 콜룸 3세와 첫 번째 왕비 잉에보르 핀스도티르의 장남 돈카드 2세의 아들인 윌리엄 피츠던컨도 있었다.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와 윌리엄 피츠던컨 모두 왕위 계승권이 다비드 1세보다 앞선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알바 귀족들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다비드 1세를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했다.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는 이에 반발해 내전을 단행했다. 연대기 작가 오더릭 비탈리스는 말 콜룸이 다비드에게서 왕국을 빼앗기 위해 2차례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막강한 부와 강력한 사병대를 갖춘 다비드 1세가 말 콜룸을 물리쳤고, 말 콜룸은 다비드가 아직 통제하지 못하는 알바 왕국 지역으로 무사히 탈출하여 현지 귀족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1124년 5월, 다비드 1세는 스콘에서 알바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후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료에 따르면, 대관식은 일련의 정교한 전통 의식으로 치러졌으며, 기독교적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국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리보의 수도원장이자 다비드 1세의 친구로서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연대기를 기술한 리보의 에일랜드는 다비드가 이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걸 꺼렸지만, 알바 국민이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하기를 강력히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밝혔다.

다비드 1세는 알바의 왕이 된 뒤에도 헨리 1세의 궁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1130년 우드스톡에서 헨리 1세의 시종장이자 재무관 제프리 드 클린턴의 반역 여부를 논하는 재판의 판사를 맡았다. 이해에 아내 모드가 사망하면서 헌팅던 백작으로서의 다비드 1세의 권리는 끊어졌지만, 그와 모드의 아들인 헨리가 헌팅던 백작으로서 권리를 물려받았다.

알바 주민들은 자기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는 다비드 1세에게 반감을 품고, 1130년 말 콜룸 막 알락산더르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말 콜룸은 모레이 모르마르[1] 옹거스의 지원을 받았는데, 옹거스는 알바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으며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룰라흐 막 길레 쿰가인의 손자였다.

반란군은 앵거스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다비드 1세의 머시아 무관장 에드워드와 대치했다. 양군은 브레친 인근의 스트라스카로에서 맞붙었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측 전사자는 1,000명이었고, 옹구스의 사상자는 옹구스를 포함한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오더릭 비탈리스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옹구스를 처단한 뒤 모레이 전역을 별다른 희생 없이 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 콜룸은 도주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재차 반기를 들었고, 내전은 4년간 이어졌다. 다비드 1세는 정적을 근절시키기 위해 대규모 함대와 월터 에스펙을 포함한 대규모 노르만 기사 부대를 칼라일로 파견했다. 함대는 아일랜드해, 클라이드만, 아가일 해안 전체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육군은 말 콜룸을 추격했다. 1134년, 말 콜룸은 마침내 체포된 뒤 록스버러 성에 감금되었고,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해서 내전을 제압한 뒤, 다비드 1세는 왕위 계승권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복종한 윌리엄 피츠던컨을 모레이의 모르마르로 선임했다. 윌리엄 피츠던컨은 옹구스의 딸과 결혼해 모레이에서의 자신의 권위를 굳건히 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어쿼트 수도원을 건립했으며, 아가일의 수입 일부를 수도원에 매년 기부하기로 했다. 한편, 아톨의 모르마르 마타드와 오크니 제도의 지배자 하콘 폴손의 딸 사이의 결혼이 이 시기에 거행되었다. 알바 왕국의 봉신인 아톨 백작은 이 결혼을 통해 오크니 제도 등 스코틀랜드 최북부의 권리를 확보했다.

2.2.2. 잉글랜드 침공

1135년 12월 1일, 다비드 1세의 후원자였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가 사망했다. 헨리 1세는 본래 외아들 윌리엄 애설링을 후계자로 낙점했지만,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 때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하는 참극을 겪었다. 그 후 헨리 1세는 자기 딸인 마틸다를 여왕으로 세우기로 했고, 112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봉신들을 소집한 뒤 마틸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이때 다비드 1세도 참석했고, 마틸다가 여왕이 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돕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헨리 1세가 사망한 직후 왕이 된 이는 마틸다가 아니라 헨리 1세의 외조카 스티븐 왕이었다.

다비드 1세는 스티븐 왕의 즉위를 찬탈로 단정하고, 1136년 1월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로 침공해 1월 말까지 칼라일, 워크, 알닉, 노럼, 뉴캐슬 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그해 2월 스티븐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자, 다비드 1세는 그와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스티븐 역시 갓 즉위해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질 여유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때 체결된 더럼 조약에 따르면, 다비드 1세는 칼라일을 유지하는 대신 다른 성은 반납하고,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는 스티븐 왕이 다비드 1세의 침공에 보복하고자 몰수했던 헌팅던 백작으로 선임되고 헌팅던의 절반을 돌려받는 조약을 맺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헨리는 칼라일과 다른 잉글랜드 영토의 영주로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합의를 맺은 후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티븐의 궁정으로 떠난 헨리가 그곳에서 모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비드 1세는 분노해 아들을 스코틀랜드로 귀국시켰다. 1137년 봄,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기로 마음먹고 노섬벌랜드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잉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뉴캐슬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후 양자는 서로 대치했고 소규모 접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회전은 피했다. 그러다가 그해 12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137년 12월, 다비드 1세는 휴전 조약이 만료되자마자 스티븐 왕에게 자신이 헌팅던 백작으로서 노섬벌랜드 백작령 전체를 다스릴 권리가 있으니 그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스티븐이 거부하자,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3번째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다가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을 피하고자 국내로 철수했다. 그 후 스티븐은 스코틀랜드에 보복하고자 로디언 해안 지대로 진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돌연 잉글랜드로 귀환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른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헥섬의 존은 그가 군대 내부 인사들의 충성심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마틸다를 지지하는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알윅 영지에서 군림하던 유스타스 피츠 존은 다비드 1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비드 1세는 4월 8일 노섬벌랜드로 재차 진군했고, 유스타스는 동생 윌리엄에게 군대를 맡겨 다비드 1세와 합세하도록 했다. 1138년 5월, 다비드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군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헥섬의 리처드는 공방전 초기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스코틀랜드인들이 공성추와 기타 공성 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다비드 1세는 남작 2명에게 성을 계속 봉쇄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1138년 6월 10일 클리더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다비드 1세는 여세를 이어가 계속 남하했지만, 8월 22일 스탠더드 전투에서 요크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칼라일로 후퇴한 다비드 1세는 스티븐이 국내의 반란군에게 관심을 돌린 틈을 타 군대를 재편했다.

이후 1138년 9월 말 교황 특사인 오스티아 주교 알베릭과 만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휴전을 협상한 그는 원정 중에 끌려간 모든 여성을 돌려보내고 1139년 11월 11일 이전에는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워크 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명시적으로 면제되었고, 다비드 1세는 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수비대와 주민들은 결사 항전했고, 스코틀랜드 공성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성을 봉쇄해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11월에 리보의 수도원장이 다비드 1세를 찾아가서 협상한 끝에 수비군이 명예롭게 무장하고 떠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워크 성을 접수한 다비드 1세는 성을 모조리 허물도록 했다.

이후 노럼 성을 짧은 포위 끝에 공략하고, 유스타스 피츠 존이 스코틀랜드에 넘긴 알닉 성을 점유하면서, 다비드 1세는 스탠더드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섬벌랜드 점유권 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1139년 4월 9일, 다비드 1세는 스티븐과 더럼 조약을 체결했다. 스티븐은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2.2.3. 스코틀랜드 북부 지배 시도

1139년, 아톨의 모르마르 마타드와 오크니 제도의 지배자 하콘 폴손의 딸 사이의 아들인 하랄드 마다드슨이 스코틀랜드 케이스네스 외에도 오크니 백작령의 절반을 물려받고 "백작"이라는 칭호를 다비드 1세로부터 받았다. 그 후 케이스네스와 서덜랜드 등 스코틀랜드 고지대는 알바 왕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었다. 다비드 1세는 1146년 이전에 현지 수도자인 아인드레아스를 케이스네스의 첫 번째 주교로 선임했다. 케이스네스 주교구는 노르드인이 거주하는 지역인 서소 인근 헬커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151년, 노르웨이 국왕 외위스테인 2세가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오크니 수로를 항해하여 서소에서 하랄드 마다드슨을 생포했다. 외위스테인 2세는 하랄드에게 석방 조건으로 알바 왕국과의 교류를 끊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다비드 1세는 이에 대응해 하랄드의 정적인 앨랜드 하랄드손의 오크니 백작령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으며, 케이스네스의 절반을 그에게 부여했다. 외위스테인 2세는 이에 대응해 앨랜드에게 동일한 영지를 수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비드 1세는 북유럽의 강자 노르웨이와 무력 대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이 문제로 그들과 분쟁을 벌이지 않았다.

2.2.4. 잉글랜드 북부 지배력 강화 시도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링컨 전투에서 마틸다의 군사령관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끈 적군에 생포되었다. 이에 다비드 1세는 그해 5월 또는 6월에 잉글랜드 남부로 여행을 떠나 마틸다와 합류한 뒤 그녀에게 충성 서약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될 그녀의 대관식에 참석하려 했다. 그러나 런던 주민들이 마틸다의 집권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대관식은 취소되었고, 다비드 1세는 마틸다 진영과 함께 하다가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마틸다가 참패하고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생포된 뒤 스티븐 왕과 교환되자 알바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잉글랜드 왕국이 마틸다 추종 세력과 스티븐 왕 추종 세력 간의 내전(무정부시대)로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스티븐 왕과의 전쟁을 통해 확보한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계에 자리 잡은 요충지였던 뉴캐슬과 범버러 성이 그의 지배하에 넘어갔고, 칼라일 성이 그에 의해 재건된 뒤 록스버러를 대신하여 그가 선호하는 거주지가 되었다. 다비드 1세는 사우스 타인의 올스턴에 있는 광산을 인수한 뒤 알바 왕국 최초로 은화를 주조했다. 또한 랭커셔에 있는 슈루즈버리 수도원에 그들의 땅에 대한 헌장을 발행했다.

다비드 1세는 더럼 주교구의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1140년 더럼 주교 제프리 루퍼스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되자, 그는 총리 윌리엄 코민을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코민은 1141년과 1143년 사이에 더럼 주교 성을 통제하면서 사실상의 주교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는 더럼 교구에서 수탈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잉글랜드 교황 특사이자 윈체스터 주교이며 스티븐 왕의 동생인 앙리 드 블루아의 인정을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143년 교황청이 세인트 바바라의 윌리엄을 더럼 주교로 세우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요크 대주교의 계승에 간섭했다. 스티븐 왕의 조카이자 요크 대주교였던 윌리엄 피츠허버트가 스티븐 왕이 1141년 생포된 후 물러나게 되자, 다비드 1세는 시토회와의 연줄을 통해 새로운 요크 대주교인 헨리 머다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스티븐 왕과 윌리엄 피츠허버트의 지지자들은 헨리 머다크가 요크 대주교를 맡는 걸 막았다. 이에 헌리 머다크는 1149년 다비드 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다비드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요크시로 진군했다. 스티븐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요크로 진군해 수비대를 세웠고, 다비드 1세는 스티븐 왕과 교전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물러났다. 결국 그는 요크 대주교구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2.2.5. 내치

젊은 시절 런던에서 교육받으면서 노르만 왕조의 통치 제도를 익힌 다비드 1세는 알바의 국왕이 된 뒤 노르만 왕조에서 쓰이는 통치 제도를 알바 왕국에 적용했다. 그는 법 집행과 과세라는 이중 목적을 이루기 위해 록스버러, 스콘, 버윅어폰트위드, 스털링, 퍼스 등지에 보안관을 배치하고 자신을 대신해서 각 구역을 통제하고 세금을 받아내도록 했다. 또한 프랑스 출신 외국인 기사들을 데려와서 컴브리아 공국의 서쪽 지대에 속한 영지들을 하사하고 자신의 봉신으로 삼았다. 그 결과, 그의 치세에 많은 소규모 봉건 영주들이 신설되었다.

다비드 1세는 컴브리아의 왕자 시절 록스버그와 버윅을 자유도시로 세웠는데, 이는 알바 왕국 역사상 최초의 자유도시였다. 자유도시는 경계가 정의되어 있고 무역권이 보장된 정착지였으며, 왕이 생산물을 수집하여 별도로 판매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 그는 알바 국왕이 된 후 15개의 자치구를 추가로 건설했다. 그가 세운 자유도시들의 인구 다수가 잉글랜드인이었으며, 그들의 문화와 언어가 통용되었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도시와 자치구는 영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앵글로색슨-노르만 문화가 알바 왕국 내부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장기적으로 중세 게일어의 지위가 약화하였고, 영어가 통용되는 스코틀랜드 저지대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다비드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 체제를 개편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리보의 에일레드는 다비드 1세 추도사에서, 그가 집권했을 당시 포스강 북쪽에는 3~4명의 주교만 있었고, 주교가 없는 지역 주민들은 도덕과 재산을 모두 잃었지만, 그가 죽을 무렵에는 9명의 주교가 세워졌으며 고대 주교구를 복원하고 새로운 주교구들을 세웠다고 밝혔다. 다비드 1세는 모틀라흐 주교구를 동쪽의 올드 애버딘으로 옮겼고, 케이스네스 교구를 창설했으며, 글래스고 주교구를 복원했다. 또한 교회 개혁을 주창한 프랑스 사제 장 카펠라누스를 글래스고 주교로 선임하고, 세인트 앤드류스 주교가 이미 통치하던 동부 지역을 제외한 글래스고의 모든 영지를 글래스고 주교구에 할당했다. 그리고 브레친, 던켈드, 모틀라흐, 던블레인 등 수도원에 의존하는 준교구들이 완전한 주교구로 개편되도록 했다.

한편, 다비드 1세는 스코틀랜드 교구가 요크 또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종속되는 걸 강력히 막았다.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구는 11세기 이래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료에서 종종 '대주교'로 칭해졌는데, 문제는 이 대주교 지위가 교황청과 합의되지 않아서 잉글랜드 대주교들이 스코틀랜드 교회 전체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 서스턴은 포스 강 남쪽에 있는 글래스고 주교구가 알바 왕국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으므로, 이 주교구가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여겼다. 다비드 1세는 이에 대응해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가 대주교로 격상되어 글래스고 주교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124년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로 선출된 스콘의 로버트가 그곳에 부임하는 걸 막았다.

1125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글래스고 주교 존에게 서신을 보내 요크 대주교구에 복종하라고 지시하자, 다비드 1세는 존에게 로마로 가서 세인트앤드류스 주교구를 글래스고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 대주교구로 승격시킬 팔리움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요크 대주교는 이에 반발해 역시 로마로 갔지만, 정작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는 다비드 1세의 주장을 지지했다. 교황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중 하나의 지지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결정을 유보했고, 요크 대주교는 헨리 1세가 다비드 1세를 지지한 것에 부담을 느낀 끝에 글래스고 주교구를 자기 통제하에 두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 후 요크 대주교구는 다비드 1세 치세가 끝날 때까지 글래스고 주교구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지 않았다.

1151년, 다비드 1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하기 위한 팔리움을 요청했다. 교황 특사 조반니 카디널 파파로니가 그해 9월 칼라일에 찾아왔을 때, 다비드 1세는 그와 대면한 뒤 교황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그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주교구는 스코틀랜드 영토에 있는 모든 주교구와 오크니 주교구, 그리고 군도 주교구를 관할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파파로니는 교황청에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교황청은 1152년 군도와 오크니 제도 주교구를 포함하는 새로운 노르웨이 대주교인 트론헤임 대주교구를 창설하는 걸 승인했다.

다비드 1세는 수도원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컴브리아의 왕자 시절인 1113년 셀커크 수도원을 세웠고, 왕이 된 뒤 12개가 넘는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고 다양한 수도원을 후원했다. 이러한 행적은 다비드 1세가 후대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수도원은 외국 문화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고, 왕의 증가하는 행정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문관들의 공급원을 제공했다. 특히 시토회 수도원은 스코틀랜드 남부(스코틀랜드 저지대)를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양모 공급지 중 하나로 변모시키는 등, 스코틀랜드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3. 말년

1152년 7월 12일, 헌팅던 백작이자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장남 헨리가 사망했다. 다비드 1세는 헨리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말 콜룸 4세를 후게자로 지명하고, 또 다른 손자 일리암 1세를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삼았다. 말 콜룸 4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파이프의 모르마르 돈차드 1세가 섭정으로 지명되었고, 말 콜룸 4세는 알바 왕국 전역을 돌며 미래의 게일족 신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다비드 1세의 건강은 1153년 봄에 심각하게 쇠약해졌고, 1153년 5월 24일 칼라일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그해 6월 초 덤플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일부 교회들은 다비드 1세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축일을 5월 24일로 정했지만, 교황청은 아직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하지 않았다.

3. 가족

  • 헌팅던의 모드(1074 ~ 1130): 헌팅던 백작 시워드의 손녀이자 헌팅던과 노샘프턴 백작 월시오프와 랑스의 주디스[2]의 딸. 헌팅던 여백작. 다비드 1세와 결혼하기 전에 상리스의 시몽과 결혼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 말 콜룸: 1113년 또는 그 이후에 출생한 뒤 유년기에 사망했다.
    • 헨리(1114 ~ 1152): 헌팅던 백작. 손자 말 콜룸 4세가 다비드 1세의 뒤를 이어 알바 국왕이 되었다.
    • 클라리시아: 미혼으로 사망.
    • 호디에르나: 유년기에 사망.


[1] Mormaer, 중세 스코틀랜드의 지역 통치자를 지칭하는 용어[2] 랑스 백작 랑베르 2세와 윌리엄 1세의 누이인 아델라이드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