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5:28:44

윌리엄 애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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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애설링
William Ætheling, Duke of Normandy
파일:윌리엄 애설링.jpg
이름 윌리엄(William)
별명 애설링(Ætheling, 왕위 계승자)
출생 1103년 8월 5일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사망 1120년 11월 25일 (향년 17세)
영국해협
지위 노르망디 공작
1120년 6월 ~ 11월 25일
배우자 앙주의 마틸드 (1119년 결혼)
형제 마틸다
아버지 헨리 1세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1. 개요2. 생애3.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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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이 유력했지만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

2. 생애

1103년 8월 5일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와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의 유일한 아들로 출생했다. 누나로 마틸다가 있었으며, 아버지가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 20여 명이 있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맘스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헨리 1세는 유일한 적장자인 윌리엄에게 애정을 베풀었으며, 세심한 교육과 배려를 통해 왕위를 계승하도록 준비했다고 한다. 초대 체스터 백작 휴 다브랑슈의 사생아이며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오티웰 피츠얼이 가정교사를 맡았으며, 윌리엄이 양육되던 런던 탑의 성주를 겸임했다.

윌리엄은 모계로 앵글로색슨 왕조의 후손이었기에,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던 앵글로색슨족으로부터 장차 자기들의 처지를 개선해 줄 인물로 기대받았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은 윌리엄을 앵글로색슨 왕실이 왕위 계승자를 부르는 호칭인 애설링(Ætheling)으로 지칭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정당한 상속자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애설링의 라틴어화된 노르만-프랑스어 변형인 아델린(Adelin)으로 지칭했는데, 때로는 'Adelinus', 'Adelingus', 'A(u)delin'으로 기술되었다.

10살 때인 1113년 왕실 문서에 증인으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그 해 2월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딸인 마틸드와 약혼했다. 헨리 1세는 이를 통해 멘 백국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풀크 5세와 화해하고 결혼 동맹을 맺기를 희망했고,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날 예정이었던 풀크 5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끌어듬임으로써 앙주 백국이 침략당할 위험을 방지하길 희망했다. 1115년, 헨리 1세는 노르망디 귀족들을 소집해 아들에게 미래의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1116년, 잉글랜드 귀족들도 그에게 미래의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충성을 서약했다. 1118년 5월 1일 어머니 마틸다가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후 헨리 1세가 잉글랜드를 떠났을 때 윌리엄 왕자가 섭정을 맡았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1118년, 풀크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회유에 넘어가 헨리 1세와 맺었던 협약을 파기하고 프랑스군 및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했다. 여기에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가 이끄는 노르만 귀족들이 노르망디 전임 공작 로베르 2세의 아들 기욤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옹립하고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노르망디 동부 전역을 휩쓰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렇듯 상황이 다급했지만, 헨리 1세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가신들의 봉기를 하나둘씩 제압했고, 조카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가 아크라 요새를 포위공격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듬해 사망하는 행운이 따랐고, 이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19년 6월, 헨리 1세는 자기 아들 윌리엄과 앙주의 마틸드의 결혼식을 리지외에서 벌이고 앙주 가문에 막대한 자금을 보냈다. 이에 풀크 5세는 헨리 1세 편으로 돌아섰다. 1119년 여름 벡생을 침공한 헨리 1세는 8월 20일 브레뮐에서 루이 6세의 프랑스군과 맞붙어 압승을 거두었다. 이때 윌리엄은 프랑스군에 가담했다가 말을 잃어버린 채 도망친 기욤 클리토에게 직접 말을 돌려줬다고 전해진다. 그해 10월, 루이 6세는 랭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교황 갈리스토 2세의 개입을 청원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군주 중 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거부하고 평화를 맺을 것을 권고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헨리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고, 양자는 1120년 6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윌리엄은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전쟁이 마무리된 후, 헨리 1세와 수행원들은 1120년 11월 잉글랜드로 갈 준비를 했다. 이때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탑승했던 기함 모라 호를 지휘했던 선장 스티븐 피츠에이라드의 아들인 토머스 피츠스티븐이 최신 기술로 건조한 아름답고 빠른 배인 블랑슈네프호에 탑승하라고 제안했다. 헨리 1세 본인은 이미 다른 배를 타기로 했기에, 아들 윌리엄과 젊은 귀족들이 그 배에 타라고 했다. 윌리엄은 11월 25일 저녁 블랑슈네프호를 타고 바르플뢰르 항에서 출항했다. 오더릭 비탈리에 따르면, 선원들이 윌리엄에게 와인을 요청하자, 윌리엄은 와인을 다량으로 줬고, 선원 50명과 승객 250명이 술에 흠뻑 취했다고 한다. 이때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의 아들인 에티엔 드 블루아는 설사를 앓아 항해하기 직전에 해변으로 돌아간 뒤 나중에 다른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블랑슈네프호가 출항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헨리 1세가 탑승한 배가 출항한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게 된 윌리엄은 선장에게 잉글랜드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속도를 내라고 명령했다. 토머스 피츠스티븐은 지시에 따랐지만, 어둠 속에서 물에 잠겨 있던 암초에 부딪쳤고, 블랑슈네프호가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은 급히 왕자를 보트에 태웠고 해변으로 피신했다. 그 때, 배에 남아 있던 이복 여동생 마틸다 피츠로이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윌리엄은 경호원들에게 보트를 돌려서 마틸다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보트가 돌아오자, 사람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려고 보트로 몰려들었다. 급기야 보트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혔고, 윌리엄은 익사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토머스 피츠스티븐은 수영을 할 수 있었지만, 윌리엄이 익사했다는 걸 알게 되자 목숨을 건진 뒤 아들을 잃은 헨리 1세의 분노에 직면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마음먹고 스스로 익사했다고 한다.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선원 50명과 하인과 경호원을 포함한 승객 250명이 몰살당했다. 그중 140명은 기사나 귀족이었고, 18명은 귀족 여성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윌리엄 외에도 명문 귀족 가문 후계자들이 대거 있었다. 단지 루앙 출신 정육점 상인인 베롤드 만이 홀로 구조되어 침몰 사고에 관해 자세히 증언했다. 귀족들은 헨리 1세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이 참사를 알리기를 무척 꺼리다가, 헨리 1세가 아이한테 화를 내진 않을 거라 여기고 어느 소년을 시켜서 헨리 1세에게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 헨리 1세는 이 참담한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앓아 누웠다가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헨리 1세는 이후로 다시는 웃지 않았다고 한다.

3. 이후의 이야기

헨리 1세는 합법적인 아들을 낳기 위해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1122년,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딸 마틸드와 결혼했던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드의 지참금으로 보낸 자금과 멘에 있는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1세는 마틸드를 보내줬지만 지참금과 요새를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풀크 5세는 1123년 또다른 딸 시빌과 기욤 클리토의 결혼을 주선했고, 기욤 클리토를 멘 백작으로 내세웠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 클리토를 지지하는 새로운 봉기가 발발했고,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헨리 1세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함께 기욤 클리토가 1128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원했다. 헨리 1세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125년 조카인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1125년 5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이듬해 하인리히 5세의 왕비였던 딸 마틸다를 소환한 뒤 마틸다가 자신을 계승할 거라고 선언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헨리 1세는 마틸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를 마틸다의 새 남편으로 삼았다.

1135년 초,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향했지만, 1135년 12월 1일에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귀족들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추정되고, 앙주 백국에 머물고 있는 데다 임신 중이라서 잉글랜드로 거동하기 힘든 마틸다 대신해 에티엔 드 블루아를 스티븐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에 마틸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항소한 후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스티븐 왕에게 도전하면서, 장장 15년간 잉글랜드 왕국을 대혼란과 파괴로 몰아넣을 무정부시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