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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트의 존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파일:Johnofgaunt.jpg
이름 곤트의 존
(John of Gaunt)
출생 1340년 3월 또는 5월
플란데런 백국 겐트
사망 1399년 2월 3일 (향년 59세)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 성
장례식 1399년 3월 16일
세인트 폴 대성당
배우자 랭커스터의 블랜치 (1359년 결혼 / 1368년 사망)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1371년 결혼 / 1394년 사망)
캐서린 스윈포드 (1396년 결혼)
자녀 필리파, 엘리자베스, 헨리 4세, 캐서린, , 헨리, 토머스, 조앤
아버지 에드워드 3세
어머니 에노의 필리파
형제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에드먼드, 윌리엄, 토머스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첫번째 결혼2.3. 랭커스터 공작2.4. 군사 활동2.5. 두번째 결혼2.6. 에드워드 3세의 고문2.7. 정치적 위기2.8. 리처드 2세의 섭정2.9. 카스티야 원정2.10. 잉글랜드로 복귀한 후의 활동2.11. 말년
3. 가족관계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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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왕족. 백년전쟁을 개시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동생으로, 에드워드 3세 치세 말기와 리처드 2세 치세에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국가를 이끌었다.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40년 봄, 플란데런 백국 겐트에 있는 성 바본 수도원에서 출생했다. 정확한 출생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3월 6일이라는 설, 5월 28일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곤트(Gaunt)'는 플란데런 백국의 도시 겐트 출신임을 의미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3살이 된 이후에는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 이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대극 <리처드 2세>에서 그를 주요 인물로 다루면서 '곤트의 존'으로 명기한 이후로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는 132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와 플란데런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군 아벤 가문 출신으로,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였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존은 여섯번째 자녀이자 넷째 아들이었지만, 그의 형 중 한 명인 해트필드의 윌리엄이 유아기에 사망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세번째 아들로 취급되었다. 큰형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3세의 후계자로 일찍부터 공인되었고, 그 다음 순위는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었으며, 존은 3번째였다. 존은 4명의 남동생을 두었는데 이중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누이로 이사벨라[1], 조앤[2]이 있었다.

그는 1342년 1월 13일 리치먼드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큰형 에드워드의 집에서 자라면서 검술승마, 궁중 예법, 여성을 대할 때의 예법 등을 익혔고, 신학, 정치학, 역사 등도 익혔다. 1350년 3월부터 1355년 5월까지는 에드워드가 거주하는 버크햄스테드 성과 서리의 바이플리트 매너에서 살았고, 에드워드로부터 무기 사용법을 직접 전수받았다. 백년전쟁에 관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에드워드가 존을 매우 사랑했고, 그를 매우 사랑스러운 형제라고 부르곤 했다고 밝혔다. 존 역시 에드워드를 무척 존경했고, 그처럼 훌륭한 왕자가 되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존은 자신의 친척이자 장인인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그를 크게 존경했다. 일설에 따르면, 존은 7살 때부터 몇년간 헨리의 종자를 맡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존이 존경하는 장인의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모방하고자 노력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350년 8월 29일 아버지 에드워드 3세, 형 에드워드와 함께 윈첼시 해전에 참여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해전 도중에 에드워드 3세와 두 아들을 태운 배가 적의 배에 부딪혀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그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고, 그해 7월 둘째 형 라이오넬과 25명의 다른 종자들과 함께 15살의 나이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군대에 배속되어 11월에 시작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55/1356년 겨울에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빼앗긴 베릭을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해 1월 13일 베릭을 도로 확보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1357년 아버지로부터 컴벌랜드에 있는 리델 영지를 부여받았다.

2.2. 첫번째 결혼

파일:Blanche of Lancaster.jpg
<colbgcolor=#c70243><colcolor=#fff>랭커스터의 블랜치

에드워드 3세는 일찍부터 존의 신부감을 찾으려 애썼다. 1345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아폰수 4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레오노르가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로 4세와 결혼하면서 무산되었다. 1351년에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고심 끝에 백년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측근인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차녀 블랜치를 존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존과 블랜치는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교회법상 결혼할 수 없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58년 6월 7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결혼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59년 1월 8일에 특별 결혼 허가를 발령했다. 결혼식은 1359년 5월 19일 레딩 수도원의 예배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존은 진주로 장식되었고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금반지를 신부에게 선물했다. 2주간의 축제가 이어졌으며, 그 기간 동안 템즈 강둑을 따라 들판에서 잔치, 보트 레가타, 마상창시합이 열렀다.

제프리 초서는 저서 <공작부인>에서 존이 블랜치에게 처음 보자마자 매료되어 직접 자신과 결혼하자고 제안했지만 블랜치는 "아니요"라며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그는 존이 포기하지 않고 구혼을 끈질기게 이어갔고 블랜치도 결국 그를 받아들였다고 덧붙였다. 에드워드 3세가 직접 결혼을 결정했으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존이 블랜치를 사랑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두 부부는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그 중 세 아들과 막내 딸 이사벨라는 유아기에 사망했고, 미래의 잉글랜드 왕이 될 볼링브로크의 헨리필리파, 엘리자베스만 살아남았다.

2.3. 랭커스터 공작

1361년 3월 23일, 장인인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얼마 후, 헨리의 미망인인 이사벨 드 보몽도 사망했다. 헨리의 유산은 두 딸 모드와 블랜치에게 전해졌고, 에드워드 3세는 존을 랭커스터 가문의 소유물에 대한 후견자로 세웠다. 그해 7월, 블랜치는 랭커스터, 링콘, 더비 여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모드는 레스터 여백작 칭호를 받았다. 존은 아내의 권리에 따라 3개 백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북부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한 영지를 소유했다. 여기에 샹파뉴의 노정과 보퍼트 영주 직을 받았고, 링컨 백작의 세습 직위인 잉글랜드 고위 관리인과 체스터 성주에 선임되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잉글랜드의 거물이 되었다. 한편, 존은 같은 해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62년 7월, 흑태자 에드워드는 아키텐 공작에 선임된 뒤 아키텐으로 떠났다. 둘째 형 라이오넬도 아일랜드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잉글랜드에 남은 가장 나이 많은 왕자가 되었고, 자연히 왕실에서 영향력을 끌어올려 아버지의 수석 고문이 되었다. 또한 아내의 누이 모드가 1362년 4월 9일에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권을 자연스럽게 확보했고, 11월 13일 아버지 에드워드 3세로부터 랭커스터 공작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북부 잉글랜드, 미들랜드, 웨일즈 등지에 걸쳐 잉글랜드 본토의 약 1/3을 소유했다. 또한 잘 작동하는 행정 기능을 갖춘 수백 개의 부동산을 소유했기에, 연간 약 1만 2천 파운드를 벌었다. 대부분의 수입은 그에게 속한 성 서른 곳 이상, 주택 및 부동산의 유지 관리, 복원 및 재건축, 거대한 가족 및 수행원 유지에 사용되었다. 그는 이 막강한 지위에 걸맞게 여러 인사들을 넉넉하게 후원하고 선물을 제공했으며, 군사 원정과 외교 여행에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존은 22세 나이에 임금 다음으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잉글랜드의 거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의회, 총재무관, 사무국 및 관리를 두었다. 여기에 고위기사 80~125명을 포함해 기사 약 200명가량을 지휘했다. 그들 모두는 조약으로 공작과 결속되었다. 그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시기에 공작을 섬길 의무가 있었고 그 대가로 넉넉한 임대료, 토지 보조금, 후원 및 높은 사회적 지위를 받았다. 존의 모든 가신과 하인은 파란색과 흰색 배지를 착용했고, 가족 구성원들도 나중에 S자 모양의 공식 배지를 착용했다. 동시에 그는 종과 소작인에게 관대함과 선의,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집이 양호한지 확인하고 어려운 시기에 집세를 면제하며 순례를 떠나거나 성직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은을 훔친 여러 하인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제안을 거부하며, "누구도 내 재산 때문에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광대한 영지에서 행정 및 사법을 책임지고, 사냥과 오락을 즐기는 등 각가지 이유로 가족과 함께 전국을 종종 여행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와 미들랜드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여름을 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하트퍼드나 런던에서 살았다. 그는 당시 런던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로 여겨졌던 사보이 궁전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잉글랜드에 온 해외 왕족과 사절을 맞이했다. 궁전 뒤쪽에는 템스 강의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있었는데 , 그곳에서 그가 웨스트민스터의 왕실로 여행할 때 사용한 바지선이 정박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사보이 궁과 하트퍼드 성을 여러번 재건축한 유명 건축가 헨리 예벨을 고용하기도 했다.

존은 랭커스터 가문의 유산 덕분에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362년 가을부터 중병에 걸린 큰형 에드워드를 대신해 아키텐으로 떠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왕실 헌장에 대한 증인으로서 그의 이름이 다른 세속 거물들의 이름보다 훨씬 자주 등장했으며, 60대에 접어든 아버지 에드워드 3세는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또한 존은 1364년 9월 칼레와 1365년 10월 브뤼헤에서 남동생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조앤 홀랜드간의 결혼을 보장하기 위해 협상에 임하기도 했다.

2.4. 군사 활동

1366년 9월, 존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를 복위시키기 위한 이베리아 원정을 준비하는 큰형 에드워드를 돕기 위해 수천 명의 궁수와 맨앳암즈를 데리고 가스코뉴에 도착했고, 11월 보르도로 가서 에드워드와 재회했다. 1367년 1월 13일, 닥스에서 에드워드의 군대에 합류했고, 2월에 피레네 산맥의 롱세스바예스 협곡을 통과했으며, 빅토리아 인근 전투에서 엔리케 2세를 추종하는 카스티야군의 급습을 격퇴했다.

1367년 4월 3일에 벌어진 나헤라 전투에서, 그는 선봉대를 이끌고 형의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5월 2일 형과 함께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에 입성했고, 페드로는 복위했다. 그러나 1367년 여름 잉글랜드군 진영에 이질이 돌면서 수많은 잉글랜드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에드워드 왕자도 앓았다. 그 해 가을 약간 회복된 에드워드는 존과 함께 잔여 병력을 추스려 가스코뉴로 떠났다. 존은 1368년 10월 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68년 8월, 아내 블랜치가 막내딸 이사벨라를 낳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9월 12일 스태퍼드셔의 투트베리 성에서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존은 아내의 유해를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했고, 매년 9월 12일에 아내를 위한 위령 미사를 거행하게 했다. 또한 그의 형인 라이오넬도 1368년에 돌연 사망했고, 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으며, 흑태자 에드워드 역시 이질에 시달렸다. 또한 1369년 3월 에드워드와 존 덕분에 카스티야 왕위를 되찾았던 페드로가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은 엔리케 2세에게 패배해 살해당했고, 엔리케 2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복위한 뒤 잉글랜드를 적대했다.

1369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브레티니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해 5월 말, 프랑스군은 퐁티외 등지의 잉글랜드가 점령한 모든 땅을 회복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을 재차 칭했다. 에드워드 3세와 큰형 에드워드 모두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지휘권은 주로 존에게 맡겨졌다. 존은 개인 재산을 사용해 궁수와 맨앳암즈 5천 명을 모집한 뒤 7월에 칼레로 향했다. 8월 23일 칼레 인근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작은 승리를 거둔 그는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필리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던 투르네로 접근했다. 양쪽 모두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2주간 대치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부르고뉴 공작이 후퇴하자, 존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 페이 드 코를 약탈했으며, 아르플뢰르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한 뒤 10월에 칼레로 돌아왔다. 11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1370년 1월 29일, 1369년 8월 14일에 사망한 어머니 에노의 필리파 왕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370년 8월 24일, 리모주가 자발적으로 프랑스에 항복했다. 이에 분노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리모주 공방전을 감행했고, 9월 18일 성벽을 뚫고 진입한 뒤 이틀 동안 도시 주민들을 학살했다. 존도 군대 800명과 함께 리모주 공방전에 참여했고, 그의 부대가 성벽을 무너뜨렸다. 다만 존은 리모주 주교를 죽이려는 형을 말려 그러지 않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건강상 이유로 더 이상 아키텐을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8일 존에게 베르주라크와 라로슈쉬르용의 영주 칭호를 내렸고, 10월 11일 아키텐 보안관으로 선임한 뒤 1371년 1월 말에 둘째 아들 리처드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존은 6개월간 프랑스로부터 아키텐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다가, 그해 7월에 아키텐 보안관 직위를 장 3세 드 그레일리에게 넘긴 뒤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계획에 전념했다.

2.5. 두번째 결혼

파일:Constance of Castile.png
<colbgcolor=#c70243><colcolor=#fff>카스티야의 콘스탄사

당시 보르도에는 페드로 왕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이 있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엔리케 2세에게 살해된 뒤 아버지의 추종자들로부터 카스티야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추앙받았다. 존은 이중 언니인 콘스탄사와 결혼한 뒤 아내의 권리에 따라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4명의 기사를 그녀에게 보내 협상했다. 콘스탄사는 이에 동의했고, 결혼식은 1371년 9월 21일 보르도 남쪽의 작은 마을인 로크포르 쉬르 소울존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신부에게 결혼 선물로 뚜껑에 흰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 쌍장미 모양의 금잔을 선물했다.

이후 라 로셸에서 배를 타고 아내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간 그는 1372년 1월 30일 왕실 의회에 의해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여기에 콘스탄사 역시 런던에 입성한 뒤 2월 10일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비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때부터 모든 문서에서 "Monsignor Spanish(스페인의 통치자)"로 불렸으며, 서신에 스페인어로 "우리의 왕(Nos el Roy)"이라고 서명했고, 카스티야와 레온의 문장으로 새겨진 인장을 사용했으며, 잉글랜드 궁정에서 통치하는 군주로 대우받았다.

존의 두번째 결혼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존과 콘스탄사가 상호 공손함과 존경심을 보이는 서신을 주고받은 것 외에는 이렇다할 친밀감을 표현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콘스탄사는 영어를 거의 몰랐고 의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남편이 내준 하트퍼드 성에서 카스티야 여성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호했다.
파일:Katherine Swynford.jpg
<colbgcolor=#c70243><colcolor=#fff>캐서린 스윈포드

게다가 존은 결혼 직후 기사 페인 드 로에의 딸이며 존의 기사이자 젠트리인 휴 드 스윈포드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 스윈포드를 정부로 삼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눴다. 그래도 존과 콘스탄사 부부는 아들 존과 딸 캐서린을 낳았다.

2.6. 에드워드 3세의 고문

1370년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노쇠할 대로 노쇠해지면서 치매 증세 마저 보였다. 여기에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도 중병에 걸려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차남 라이오넬은 이미 죽었다. 따라서 존이 모든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372년 7월 11일 윌링포드 성에서 거행된 남동생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콘스탄사의 누이인 이사벨과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 결혼은 존의 아내 콘스탄사가 출산 중 사망할 경우에도 플랜태저넷 왕조가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존은 가신들에게 프랑스와의 군사 작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 뒤 몇 주 동안 북쪽에 머물면서 레스터 숲에서 사냥했고, 8월 18일 샌드위치에서 군대에 합류했다. 8월 31일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가스코뉴로 항해했지만, 도중에 폭풍에 휩싸여 많은 배가 침몰하는 악재를 겪은 끝에 2달 만에 겨우 조국으로 귀환했다.

1373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존은 장 4세와 손잡고 샤를 5세에 대항하기로 마음먹고, 1373년 6월 하트퍼드 성에서 장 4세를 만난 뒤 리치먼드 백작위를 그에게 넘겼다. 그 대신, 그는 요크셔의 틱힐과 내래스버러, 더비셔의 하이 피크를 포함한 여러 영지를 접수해, 요크셔와 노스 미들랜드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6월 12일 프랑스와 아키텐의 왕실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7월에 자신이 모집한 4,000명의 군대와 함께 도버에서 프랑스로 항해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당초 브르타뉴에 상륙한 뒤 장 4세를 복위시킨 후 낭트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이동해 푸아투를 거쳐 아키텐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그러나 1373년 전반기에 브르타뉴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프랑스군이 낭트를 탈환했고, 브레스트, 데르발, 오레를 제외한 브르타뉴 전역이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따라서 브르타뉴를 통해 아키텐으로 진군하는 계획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대서양을 통해 아키텐으로 가자니,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해군이 철저히 막고 있어서 역시 힘들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는 칼레에서 출발해 파리를 우회하며 아키텐으로 이동하는, 1,500km에 달하는 행군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곤트의 존의 슈보시)

이렇게 계획이 세워진 뒤, 1373년 전반기 동안 동원가능한 잉글랜드 전사 및 병사들이 칼레로 대거 집결했다. 플란데런 백국에서 차출된 100척 이상의 수송선들이 칼레와 잉글랜드 사이의 영국 해협을 수없이 왕래하며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 결과, 8월 9일에 집결 완료된 원정군 규모는 맨앳암즈 3,000명, 장궁병 6,000명, 비전투원 2,000명에 달했다. 존이 총사령관을 맡았고,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 디스펜서 남작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저명한 기사 휴 칼블리 등 에드워드 3세 휘하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맹활약했던 장군들이 원정에 가담했다.

8월 9일 칼레에서 출진한 원정군은 하루에 약 10km를 전진하면서 20km 이내의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며칠 후 아르투아 외곽의 에어 쉬르 라 리스와 생폴쉬르테르누아즈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둘렌 요새를 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으나 수비대의 분전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8월 19일 솜 강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아라스를 우회한 후 브레 쉬르 솜을 찔러봤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인 용감공 필리프 2세가 아미앵에서 군대를 조직해 적의 뒤를 추격했다. 또한 샤를 5세는 푸아투 정복을 완료한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원 병력을 줘서 잉글랜드군의 진군에 대응하게 했으며, 로한 자작 올리비에 드 클리송, 장 3세 드 뷔에이에게도 군대를 맡겼다. 이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식량 수급 부대를 연이어 습격해 전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군의 진군로에 있는 주민들을 근처의 성이나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대피시키고, 잉글랜드군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등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9월 3일 랑 교외의 보 쉬르 랑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한 곤트의 존은 수아송으로 향했고, 필리프 2세가 이끄는 2,400명의 프랑스군이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수차례 그들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샤를 5세의 권고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오직 식량 수급을 목적으로 분산된 적군을 사살하고 낙오된 적병들을 사로잡았다. 9월 9일, 프랑스군은 토머스 디스펜서가 이끄는 분견대를 습격해 궤멸시키고 기사 월터 휴이트 등 수많은 병사를 사살하고 디스펜서 등 몇몇 기사와 종자를 생포했다.

곤트의 존과 장 4세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계속 진군하면서 에르몽빌, 발돔망주, 에페르네, 샬롱앙샹파뉴 등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9월 22일 잉글랜드군이 트루아 외곽에 도착했을 때, 게클랭, 올리비에 드 클리송, 루이 2세 드 부르봉, 필리프 2세가 연합한 7,000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트루아 인근 케아에 주둔해 있었다. 곤트의 존은 프랑스군 진영에 전령을 보내 전투를 신청했지만 묵살당하자 센 강으로 이동한 뒤 9월 말에 제쉬르센을 통해 센 강을 건넌 후 니베르네로 향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두 개의 종대를 형성하여 평행하게 행군하면서 적의 진군을 따라갔다. 그들은 성이나 요새화된 도시에서 매일 밤을 보내면서 적군이 야영을 반복하도록 강요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바짝 뒤를 쫓으면서도 전투에 절대로 응하지 않고 식량 수급 부대를 끊임없이 공격하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급락했고 행군을 이탈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수많은 보급 마차를 버려야 했다. 급기야 11월에 꽁브하이으, 리무쟁 상부 지역을 지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지역은 숲이 울창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 추위를 피할 거주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말에게 먹일 곡물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계다가 이 시기에 폭우가 내리면서 도로는 늪으로 바뀌고 하천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여기에 프랑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꾸준히 공격해 피해를 누적시켰다.

1373년 12월 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왕의 권위에 적대적인 지역인 리무쟁 하부 지역에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비로소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곤트의 존은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한 뒤 1373년 마지막 날에 보르도에 입성했다. 4개월 동안 1,500km를 강행군한 대가는 참혹했다. 원정에 동원된 30,000마리의 말 중 절반이 죽었고, 수송 마차의 3분의 2가 버려졌으며, 3,000명이 추위, 질병, 기아로 사망했고 3,000명은 프랑스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더욱이 보르도에 도착한 많은 이가 며칠 또는 몇 달 후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보르도에 입성한 후의 상황도 심각했다. 그 해 겨울 동안 페스트가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몇몇 기사들은 거리에서 음식을 달라고 구걸했다.

1374년 1월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은 존은 아키텐에서 남은 영토라도 지키기 위해 방위 시스템을 재조직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로 3세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에 대적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존은 1374년 4월 8일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 하에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75년 초 프랑스군이 바욘을 공략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휴전 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해 3월 9일, 존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도버에서 출항해 3월 24일 브뤼헤에 도착한 뒤 프랑스 대표단과 협상했다.

평화 협상의 첫번째 문제는 아키텐의 주권이었다. 그레고리오 11세의 대표단은 존이 잉글랜드의 소유를 포기하고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가신이자 독립적인 아키텐 공작이 될 것을 제안했다. 존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잉글랜드 의회가 아키텐이 자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추가 협상에서 현재의 영토 상황을 토대로 40년간 휴전 협정을 맺는 안건이 제시되었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자 모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오면서 역시 무산되었다. 브뤼헤 협상에서의 유일한 성과는 1377년 4월까지 지속된 2번의 짧은 휴전 협약이었다.

이후 존은 잉글랜드 국민들의 강한 비난에 직면했다. 그들은 1340년 슬로이스 해전, 1346년 크레시 전투, 1356년 푸아티에 전투의 영광을 생생히 기억했고, 1360년 브레티니 협약으로 정점을 찍었을 때로 되돌려야 한다고 여겼다. 반면에 존은 전쟁을 지속하는 건 잉글랜드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백해무익하며, 잉글랜드가 번영하려면 장기적인 평화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어떻게든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다. 이에 많은 이가 존이 흑태자 에드워드와는 달리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그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1375년 6월에 체결된 첫번째 휴전으로 인해 캥페를레를 포위하고 있던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캥페를레를 공략하는 것을 막았다며 비난을 퍼부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존이 공적 자금으로 지원받아놓고 댄스 파티를 성대하게 벌였고, 존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상을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후 영국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협상을 이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잉글랜드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존은 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즈의 전횡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앨리스 페러즈는 에노의 필리파 왕비의 시녀로, 10대의 나이에 노쇠한 왕의 정부가 된 뒤 왕비와 같은 권력을 쥐었고 사익을 위해 왕을 조종했다. 56개의 장원과 성을 받아냈으며, 왕실의 판결에 개입하여 친구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고, 왕에 대한 신하들의 접근을 통제하기까지 했다. 이에 수많은 이가 그녀의 전횡에 분노했지만, 존은 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는 그녀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난을 더 받았다.

한편, 존은 옥스퍼드의 켄터베리홀 교수를 지내며 신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던 존 위클리프를 1371년부터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위클리프는 서방교회 대분열과 교회의 부패, 교황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높은 세금에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급기야 사제직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교황이 교회의 참된 수장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성경이 정한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라의 최고 권력은 성직자가 아니라 왕과 최고 귀족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은 이런 위클리프의 주장에 진심으로 공감해 지지를 표했고, 잉글랜드 사제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는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점점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급기야 1381년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대한 교리로 확정한 화체설을 부정했다. 이에 옥스퍼드 대학은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고, 런던에서 열린 지역 공의회도 같은 입장을 표했다. 그동안 위클리프를 지지했던 존 역시 더 이상 그를 비호할 수 없다고 여기고 등을 돌렸다. 결국 위클리프는 궁정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은퇴 후 저술에 전념하다가 1384년에 사망했다.

2.7. 정치적 위기

1376년 4월 28일에 소집된 의회[3]는 왕의 부패한 조언자들, 특히 왕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를 탄핵하고 왕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존은 의회에 참석하기엔 몸이 너무 약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의회에 맞섰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그의 인기는 극히 낮았다. 사람들은 존의 부와 막대한 권력을 미워했고,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성직자들은 존 위클리프를 후원한 점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의회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전쟁 수익, 막대한 돈 낭비 및 부패에 대한 비난을 제기했다. 의회는 국왕이 "자신의 비용으로 생활해야 하며" 막대한 세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존은 이 압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실 행정부에 대한 조사에 동의해야 했다. 그 결과, 의회는 다수의 "부패한 신하"를 탄핵 하고 왕의 여주인인 앨리스 페러즈가 연간 3,000 파운드를 왕에게서 강탈한 혐의로 궁정에서 축출하도록 선고했다.

1376년 6월 8일, 수년간 병마에 시달리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이로서 존은 정식으로 병든 아버지의 수석 고문이 되었다. 이때 그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설에 따르면 존이 여계 후손의 왕위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도입하여 고인이 된 형제 라이오넬의 상속인이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려 했지만 의회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또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의회는 존에 대한 예방조치로 흑태자 에드워드의 어린 아들 리처드를 왕위 계승자로 선포하고 동료 협의회를 임명하여 왕자를 섬기고 그의 위험한 삼촌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존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는 맹백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은 임종을 눈앞에 둔 에드워드에게 그의 아들 리처드를 충실히 섬기겠다고 맹세한 바 있으며, 조카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즉위한 후의 행보로 보건대 이 맹세를 어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존은 큰형 에드워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에드워드의 미망인이자 리처드의 어머니인 켄트의 조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에드워드가 사망한 직후 조앤의 재정적 독립을 보장했다. 존은 137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거행된 성대한 잔치에서 모든 고문과 함께 리처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왕좌의 상속자로 인정하기도 했다.

1376년 7월 10일, 의회는 에드워드 3세의 자금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진노한 에드워드 3세는 같은 날 의회를 해산했고, 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했다. 존은 의회가 4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내렸던 모든 조치를 무효로 처리해 왕권을 되돌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추방된 신하들을 궁정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이 중에는 앨리스 페러즈도 있었다. 또한 존은 지난 의회의 의사 결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인사들을 대상으로 징벌적인 정책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왕에게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9명의 영주로 구성된 고문단을 해체했으며, 11월 17일엔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위크햄 주교로부터 세속 재산을 박탈하고 궁정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377년 1월, 존은 친구이자 세인트 데이비드 주교인 아담 휴턴을 새 총리로 임명했으며, 지난 의회의 의장이었던 피터 드 라 마레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존은 왕권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많은 정적을 양산했고 인기가 더욱 떨어졌다. 1377년 1월 27일, 존은 리처드 왕자와 함께 의회를 소집했다.[4] 이 의회에서는 지난 의회의 결정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뒤집었다. 이에 대한 세간의 반감이 더욱 거세졌고, 급기야 존이 사실은 겐트 노동자 또는 정육점 주인의 아들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따르면, 1340년에 필리파 왕비는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고, 그 딸을 목졸라 죽인 뒤 겐트의 노동자 또는 정육점 주인의 아들과 시신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존의 정적 일부는 이 이야기를 이용해 그를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 존은 이 터무니 없는 소문을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1377년 2월 2일, 런던 주교 윌리엄 드 코트니가 존 위클리프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켄터베리 대주교 시몬 서드버리와 다른 주교들이 주관하는 법정에 출두해 혐의에 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은 이를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자신을 모욕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신학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주교를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위클리프를 변호하기 위해 신학박사 4명을 임명했다. 재판은 2월 1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존과 잉글랜드 원수 헨리 퍼시가 원수 지휘봉을 들고 현장에 도착했다.

코트니 주교는 존과 퍼시가 대성당에 온 것에 분노해 퍼시가 자신의 양떼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비난했다. 이에 존은 "주교님이 좋아하시든 아니든, 원수는 원수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트니는 이 말에 더욱 분노했고, 존과 코트니간의 언쟁이 벌어지더니 존이 주교의 머리카락을 의자에서 끌어내겠다고 위협한 것에 격분한 런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존과 퍼시는 위클리프를 데리고 대성당에서 도주했고,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얼마 후, 퍼시는 런던 시민 한 명을 체포해 런던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 구금했다. 이는 런던 치안 판사의 권한을 빼앗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세간에는 존이 런던 시장을 퍼시로 교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퍼시의 집을 약탈하고 거기에 갇혀 있던 시민을 석방했다. 이후 폭도들은 사보이 궁전으로 가다가 도중에 존을 변호하던 사람을 죽였다. 코트니 주교가 급히 달려와서 자제를 호소한 덕분에, 사보이 궁전은 약탈당하지 않았다.

당시 오랜 친구이자 부유한 플란데런 상인인 장 디프레의 집에서 저녁 식사 중이었던 그는 부하들로부터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퍼시와 함께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배를 타고 켄싱턴 궁전으로 항해했다. 이후 누이 조앤 공주가 3명의 기사를 보내 런던 시민들을 설득해 폭동을 멈추고 귀가하게 했다. 다음날 런던 사람들은 국왕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이 일으킨 폭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은 존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런던의 특권이 보존될 것이며 다가오는 황금 희년을 기념하여 일반 사면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의회는 해산되었고, 잉글랜드의 정치 혼란은 겨우 진정되었다.

2.8. 리처드 2세의 섭정

1377년 6월 23일,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왕자가 리처드 2세로서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에 선임되었다. 그는 어린 왕의 삼촌으로서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섭정에 임명된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377년 6월 의회에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을 정면 반박하면서, "나를 반역자로 의심하는 모든 사람은 어서 나와서 증거를 제시하시오!"라고 외쳤다. 이에 의원은 그의 무죄를 받아들이고 "국왕의 최고의 조력자이자 힘이자 총독"이라고 선언했다. 1377년 10월 동생 랭글리의 에드먼드, 우드스톡의 토마스와 함께 왕이 임명한 고문들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부패 혐의를 조사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1381년 11월 왕실 비용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1384년 4월 리처드 2세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간의 갈등이 벌어졌을 때, 그가 중재에 나서 갈등을 해소했다.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그는 1378년부터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지키기 위한 모든 군사 및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를 꺼렸고, 어떻게든 평화를 이루고자 1383년 9월 칼레, 1384년 7~10월 롤링햄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두 회의 모두 이렇다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전쟁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로 1377년과 1379년에 인두세를 부과했고, 1380년에 3배나 부과해 가난한 잉글랜드 농민들의 분노를 유발했고, 이로 인해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다. 와트 타일러에게 가담한 농민들은 이스트 앵글리아에 있는 존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그의 런던 거주지인 사보이 궁전을 불태웠다.

당시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에서 스코틀랜드인들과 평화 협상 중이었던 존은 반군에게 살해될 것을 우려해 안위크 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안위크 성을 다스리던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결국 곤트의 존은 10일 동안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다. 그러다 반란이 진정된 뒤 복귀해 자신의 영토에서 반군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 위원을 맡아 상대적으로 온건한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고, 1382년 2월 런던 시민들은 왕실에 오직 한 명의 왕만이 자신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시위를 벌였다.

존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퍼시에게 악감정을 품었다. 와트 타일러의 난이 진압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1381년 8월 4일 레딩에서 열린 회의에서 헨리가 봉기 기간에 자신에 대해 불순종하고, 불충실하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이 고조되자, 리처드 2세는 두 사람의 화해를 희망하면서 10월 9일에 열린 버크햄 공의회에 두 사람을 모두 소집했다. 리처드 2세는 그곳에서 헨리를 대신해 곤트의 존에게 사과하면서 분노를 조절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다며, 곤트의 존에게 온갖 모욕을 퍼부었다. 리처드 2세는 침묵하라고 명령했지만, 헨리는 이에 복종하지 않았고, 결국 왕을 능멸한 혐의로 체포되어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다. 그는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이 자신을 보증하고 의회에 출석해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에 답변할 것이라고 보증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1381년 11월, 곤트의 존과 헨리는 수많은 가신과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 리처드 2세는 그걸 보고 두 사람이 런던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일 것을 우려해 누구든지 무장한 채 의회에 출석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날 의회에서 곤트의 존은 헨리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헨리는 침묵을 지키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다음날, 퍼시는 곤트의 존이 와트 타일러의 난이 막 발발한 시기인 6월에 보냈던 작은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 4통을 제시함으로써 비난에 답했다.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지침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곤트의 존은 새로운 비난을 했지만, 헨리는 자신을 잘 변호했다. 11월 9일, 헨리는 버크햄에서 했던 행동에 대해 왕과 곤트의 존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2.9. 카스티야 원정

존은 콘스탄사를 두번째 아내로 맞이한 이래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한 원정을 벌이려 애썼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정을 도맡고 있는 그가 이베리아로 가버리면 나라가 위험해진다고 여긴 의회가 반대했기 때문에 쉽사리 이루지 못했다. 1380년 10월, 존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코틀랜드 정부가 협상을 요청했고, 1381년 6월 3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존은 와트 타일러의 난 때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를 거부한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스코틀랜드 국경 방위 사령관 직책에서 해임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384년 2월 휴전 기한이 끝나자마자 로크마벤에 있는 잉글랜드 전초기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존은 이에 대응해 4월에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에든버러로 진군해 약탈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고지대에 숨자 철수했다.

1384년 가을, 잉글랜드 의회는 존이 주장한 프랑스에서의 군사 원정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에 투입되어 잉글랜드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리처드 2세와 존은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1385년 7월, 두 사람은 군대를 대거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지 않고 프랑스로 철수했고, 리처드 2세는 에든버러에 입성한 후 몇달 간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귀환했다. 이렇듯 스코틀랜드 문제가 계속 대두되었기 때문에, 존이 카스티야로 쳐들어가는 건 요원한 일인듯 했다.

하지만 존은 포기하지 않고 동맹 세력을 모색했다. 1380년 7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에 맞서던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가 파견한 사절단을 접견한 뒤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동맹 조약 체결에 동의를 표했다. 1381년 7월, 그는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 2천 명의 분견대를 맡겨 포르투갈로 보내고, 자신은 또다른 군대를 일으켜 아키텐에서 카스티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는 1382년 1월 이 작전을 위해 필요한 6만 파운드를 지원하길 거부했고, 결국 존은 원정을 떠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포르투갈로 간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그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급료가 계속 밀린 것에 반발한 군대의 태업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페르난두 1세는 1382년 8월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고, 잉글랜드군은 강제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83년 12월, 아내 베아트리스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내세움으로써 포르투갈을 카스티야 왕국의 영향권에 귀속시키려는 후안 1세에게 반발한 포르투갈인들이 페드루 1세사생아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형제인 주앙 1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후안 1세는 1384년 5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로 진군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 하지만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이후 주앙 1세는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존은 주앙 1세를 돕기로 마음먹고, 잉글랜드군 600명을 개인적으로 동원해 포르투갈로 파견했다. 이들은 백년 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주앙 1세는 이들로부터 전수받은 노하우를 토대로 1385년 8월 14일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존은 포르투갈의 지원을 토대로 카스티야 왕위를 노릴 원정을 단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리처드 2세와 존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와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 등 젊은 귀족들은 리처드 2세에게 강력한 권세를 지닌 존이 언제든지 왕위를 노릴 거라며 항상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1384년 4월 솔즈베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르멜회 수도사 존 라티머가 존을 반역자라고 고발했다. 그러자 리처드 2세는 즉시 존을 체포한 뒤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가, 얼마 후 그 수도사가 미치광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명령을 취소했다. 1385년 존이 의회에서 리처드 2세의 행실을 비판하면서 갈등이 다시 고조되었고, 존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존은 리처드 2세에게 그를 몰아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존을 매우 불신했다. 이에 존은 심한 압박감을 느껴 잉글랜드를 떠나 카스티야로 가기로 했고, 왕실 고문들 역시 카스티야로의 군사 작전 비용이 리처드 2세가 얻게 될 더 큰 정치적 자유에 대한 대가로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385년 10월 의회에서, 필요한 군자금 일부를 존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리처드 2세 역시 원정 비용으로 2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1386년 5월 9일, 존은 주앙 1세로부터 카스티야 국왕이 되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그해 7월, 그는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그는 도중에 브레스트 공방전에 개입해 브레스트를 프랑스군의 포위로부터 해방시켰고, 7월 말에 갈리시아의 라 코루냐에 상륙했다. 그후 대다수 갈리시아 귀족들과 일부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오렌세에 궁정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맞서 세고비아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카스티야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다시 받고 침략자들로부터 맞설 병력을 제공받았다.

1387년, 존은 주앙 1세에게 자기 딸 필리파를 시집보낸 뒤 포르투갈군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들은 두에로 강을 따라 남하했지만, 카스티야군이 전투를 회피하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몇몇 요새를 포위하다가 손실만 입었다. 결국 다수의 병사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고 곤트의 존과 가까운 친구들과 신하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곤트의 존은 어쩔 수 없이 갈리시아로 퇴각했다. 1388년 7월 카스티야군이 갈리시아로 진군해오자, 곤트의 존은 포르투갈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키텐으로 도주했다.

이후 카스티야 국왕이 되는 것을 단념한 곤트의 존과 아내 콘스탄사는 후안 1세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안 1세의 아들 엔리케와 곤트의 존과 콘스탄사의 딸 캐서린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엔리케는 아스투리아스 공에 칭해졌다. 이때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은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후안 1세는 1389년 주앙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양측이 점령한 영토를 서로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존은 아키텐의 통치자로서 가스코뉴 귀족들이 잉글랜드에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1389년 11월 존이 리처드 2세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갔을 때, 아키텐의 상황은 상당히 안정되었다.

2.10. 잉글랜드로 복귀한 후의 활동

존이 잉글랜드를 떠난 이래 3년 동안, 잉글랜드의 정치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1386년, 글로스터 공작이자 존의 형제인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더비 백작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포함된 청원파가 리처드 2세의 사치와 총신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몰아넣고 국정을 농단하게 한 것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그들은 왕의 최측근 중 하나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 11인 위원회를 개설하여 국왕의 활동을 당분간 감시하게 했다. 리처드 2세는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선토하며 청원파를 제거하려 하자, 그의 숙부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리처드 2세에게 증조부 에드워드 2세의 선례를 기억하라는 위협을 가했다.

리처드 2세가 왕에게 대항하는 모든 시도는 반역이라는 국법을 제정하자, 청원파는 1389년에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의 총신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굴복했고, 그해 가을에 청원파를 사면하고 총신들을 축출하는 조건으로 왕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맺었다. 이후 삼촌 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리처드 2세는 그를 소환했고, 청원파 역시 정치적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을 입증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도착한 존은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본보기를 보였다. 리처드 2세 역시 존에게 많은 보조금과 특권을 제공해 삼촌의 뜻을 지지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또한 존과 그의 형제들의 동의 없이 왕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1390년 1월 의회에서, 존이 평생 소유하던 랭커스터 공작위가 남성 계통을 통해 세습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한 3월 2일에 종신 아키텐 공작 칭호를 받았다. 이후 존은 아키텐 공국의 안전과 영토 보전을 보장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평화 협약 체결에 사활을 걸었다. 1391년 5월 칼레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만났고, 1392년 3월 아미앵에서 다시 사절단과 접견해 2달간 협상했다. 이때 프랑스 사절단은 존과 그의 후계자들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잉글랜드 내에서 이에 불만을 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그럼에도 1393년 3월부터 6월까지 롤링햄에서 새로운 협상이 이뤄졌고, 그 결과 리처드 2세가 프랑스 국왕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하되, 상당한 영토를 반환받고, 아키텐 공국의 최종 지위는 중재 법정에 의해 결정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합의는 잉글랜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존은 1394년 3월부터 5월까지 롤링햄에서 추가 협상을 벌였지만 교착 상태를 해결할 방안을 도출해내지 못했고, 결국 양측은 최종 평화 협정을 포기했다.

평화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393년 5월, 랭커셔와 체셔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반군은 임박한 평화 협약 체결에 항의하면서, 존과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가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평화 협상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존은 그해 가을에 봉기를 진정시키고 이에 연루된 다수의 귀족을 다시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394년 1월, 봉기를 진압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던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의회에서 존이 왕과 왕실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존은 아룬델 백작이 반군을 선동했으면서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존의 평화 협상 동기에 대한 의혹이 계속 불거졌고, 그는 이에 대응해 그해 8월에 리처드 2세에게 자신이 왕실을 기만하고 있다는 소문은 거짓이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던 중 가스코뉴를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반발해 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로 한 가스코뉴 영주들이 동맹을 결성하자, 존은 1394년 11월에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향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항한 영주들과 신중히 협상한 끝에 1395년 3월 그들의 자치를 보장하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관리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대가로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게 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군이 휴전 기간 동안 아키텐 국경지대를 습격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름을 보냈다. 1395년 11월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그는 브르타뉴에 들러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상호 동맹을 맺고, 자신의 손자이자 미래의 국왕 헨리 5세가 될 헨리와 브르타뉴 공작의 딸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랭커스터 가문의 영향력은 프랑스 서해안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1397년 3월,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28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더 이상 존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궁정에는 리처드에게 더 가까운 새로운 귀족들이 등장하면서 왕실 정치에 대한 존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된 존은 1396년 11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과 리처드 2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등 국가 행사에 가끔 모습을 비춘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관심을 두고, 오랜 정부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자녀들을 챙기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존의 두번째 아내인 콘스탄사는 1394년에 사망했고, 존은 교황청과 장기간 협상한 끝에 캐서린과의 결혼을 승인받는 데 성공했다. 결혼식은 1396년 1월 링컨 대성당에서 열렸고, 교황청은 그해 9월에 존과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리처드 2세는 즉시 합법화 특허를 발행했고, 의회도 1397년 2월에 승인했다. 이때 리처드 2세는 존과 캐서린의 장남 존 보퍼트에게 서머셋 백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398년 2월에는 존과 캐서린의 차남 헨리 보퍼트가 링컨 주교로 선임되었다. 1396년 가을, 존과 캐서린의 딸 조앤 보퍼트는 제4대 네빌 남작 랄프 네빌과 결혼했고, 곧 왕으로부터 웨스트모어랜드 여백작 칭호를 받았다.

2.11. 말년

존은 리처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적이 있던 아들 볼링브로크의 헨리 때문에 자신이 오래도록 키웠던 랭커스터 가문이 한순간에 허물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는 1397년 여름 리처드 2세가 벌인 친위 쿠데타에 전적으로 협조했다. 1397년 9월 17일부터 시작된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직접 주재한 그는 친위 쿠데타로 체포된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룬델 백작은 즉시 처형되었지만, 토머스 뷰챔프는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 또다른 청원파 인사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칼레로 이송된 뒤 9월 8일 감옥에서 피살되었다.

이렇듯 존은 리처드 2세에게 납작 엎드렸고, 리처드 2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아들 헨리를 용서하고 서머셋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398년 1월,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월 27일 의회가 열리는 슈루즈버리로 가는 길에 매복해 존을 죽이려 했다. 존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수행원을 늘렸고, 토머스 모브레이는 계획을 취소했다. 1월 30일, 헨리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모브레이가 청원파의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선임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398년 4월 29일 윈저 성에서 결성되었고, 그곳에서 헨리와 모브레이가 조우했다. 노퍽 공작은 자신이 청원파에 가담한 일은 이미 왕에게 사면받았는데, 이제와서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리 없다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이 왕에게 나쁜 조언을 제공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것을 포함해 왕국의 많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결투 재판을 통해 진위를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투 재판은 9월 17일 코벤트리에서 열리기로 했다.

1398년 9월 17일, 잉글랜드 각지에서 몰려든 기사, 시민, 숙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투 재판이 열렸다. 대중은 환호로 두 공작을 맞이했다. 이때 왕이 돌연 개입해 지팡이를 던져 결투를 중단하게 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왕은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중병에 걸렸던 존은 아들의 추방 소식을 듣고 심히 낙담해 레스터 성으로 은퇴했고, 1399년 2월 3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월 16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던 첫번째 아내인 랭커스터의 블랜치의 옆에 묻혔다. 이후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가의 영지를 몰수하는 조치를 내렸고, 웨일즈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시도가 반역이라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1399년 5월 아일랜드로 방문했다가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그 틈을 타 조국으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고, 결국 헨리에게 제압되어 폐위된 뒤 요크셔의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1400년 2월 14일에 사망했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하면서, 랭커스터 왕조의 시대가 개막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랭커스터의 블랜치(Blanche of Lancaster)[5]
1녀 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Philippa, Queen of Portugal)
1360년 3월 21일 1415년 7월 19일 주앙 1세
슬하 5남 1녀[6]
2녀 엑시터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Duchess of Exeter)
1363년 or 1364년 1426년 11월 4일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슬하 3남 3녀
팬호프 남작 존 콘월
슬하 1남 1녀
1남 헨리 4세
(Henry IV)
1367년 4월 1413년 3월 20일 메리 드 보헌
슬하 4남 2녀[7]
나바라의 호아나
카스티야의 콘스탄사(Constance of Castile)
3녀 카스티야의 왕비 카탈리나
(Catherine, Queen of Castilie)
1373년 3월 31일 1418년 6월 2일 엔리케 3세
슬하 1남 2녀[8]
캐서린 스윈포드(Katherine Swynford)
2남 1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1373년 1410년 3월 16일 마거릿 홀랜드
슬하 4남 2녀
3남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Bishop of Winchester)
1375년 1447년 4월 11일
4남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Thomars Beaufort, Duke of Exeter)
1377년 1월 1426년 12월 31일 마거릿 네빌
4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부인 조앤 보퍼트
(Joan Beaufort, Countess of Westmorland)
1377년 1440년 11월 10일 제2대 페러스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
슬하 2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슬하 5남 5녀
  • 랭커스터의 블랜치(1346 ~ 1368): 초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
    • 랭커스터의 필리파(1360 ~ 1415):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왕비.
    • 존(1362/1364 ~ 1365): 요절
    • 엘리자베스(1363 ~ 1426):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초혼, 초대 엑시터 공작 존 홀랜드와 재혼, 초대 팬호프 남작 존 콘월과 삼혼.
    • 에드워드(1365): 요절
    • 존(1366): 요절
    • 헨리 4세(1367 ~ 1413): 잉글랜드 국왕.
    • 이사벨라(1368): 요절
  • 카스티야의 콘스탄사(1354 ~ 1394):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의 딸.
    • 캐서린(1372/1373 ~ 1418):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의 왕비.
    • 존(1375 ~ 1376): 요절.
  • 캐서린 스윈포드(1350 ~ 1403): 기사 페인 드 로에의 딸이며 존의 기사이자 젠트리인 휴 드 스윈포드의 미망인. 존의 오랜 정부였다가 1396년에 결혼했다.
    • 존 보퍼트(1371/1373 ~ 1410): 서머셋 백작, 도셋 후작, 잉글랜드 무관장.[9]
    • 헨리 보퍼트(1375 ~ 1447): 링컨 주교, 윈체스터 주교.
    • 토머스 보퍼트(1377 ~ 1426): 도셋 백작, 엑시터 공작, 릴본 남작 및 아르쿠르 백작.
    • 조앤 보퍼트(1379 ~ 1440): 제2대 페러스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와 초혼, 제4대 네빌 남작이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재혼.[10]

[1] 1332/1334 ~ 1379/1382, 쿠시 영주 앙게랑 7세의 부인[2] 1334/1335 ~ 1348, 카스티야 왕자 페드로와 약혼했지만 중세 흑사병에 걸려 결혼 전에 사망[3] 일명 '좋은 의회'(Good Parliament)로 일컬어진다.[4] 일명 '나쁜 의회'(Bad Parliament)로 일컬어진다.[5] 초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6] 두아르트 1세, 비제우 공작 엔히크[7] 헨리 5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8] 후안 2세[9] 친손녀가 바로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다.[10] 조앤과 랄프의 막내딸이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내이자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어머니 세실리 네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