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19 16:38:45

젠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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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try

1. 개요2. 역사적 맥락
2.1. 뿌리: 영국 귀족의 특성, 장남에게만 전해짐2.2. 둘째부터 젠트리화됨2.3. 장미전쟁: 급격한 귀족 수의 감소2.4. 젠트리의 두각2.5.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로의 종교개혁: 젠트리의 세력 확장2.6. 젠트리의 법조계, 종교계, 교육계, 상업계 장악2.7. 자본가화
3. 정리4. 관련 문서

1. 개요

잉글랜드의 사회 계급 중 하나. 성공해서 귀족계급까지 올라간 평민. 중산층 자영농인 요먼귀족 사이에 있는 계급으로 일반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중소 지주를 말한다. Gentleman의 어원.

이들은 역사적으로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때 잉글랜드 전역에 봉한 노르만족 귀족 아래에 있던 가신계급들이며 대귀족 밑에서 다시 영지 규모에 따라 준남작(baronet),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Gentleman) 등으로 분류되었다.

중세가 끝나고 상위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서로 죽이는 통에 숫자가 급감하고 흑사병의 창궐과 백년전쟁이라는 장기간 정쟁을 통해 사회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자 점차 영주에서 지주로 전환하고 사회 영향력을 넓혀갔다. 명청시대 중국의 신사(紳士). 일본사족(士族), 조선양반 계급과 비슷하다. 사실 '신사'로 번역한 것도 Gentleman의 번역을 중국 지방 사족계층인 신사와 의미가 통한다고 봐서 그리 번역한 것이다.

2. 역사적 맥락

2.1. 뿌리: 영국 귀족의 특성, 장남에게만 전해짐

젠트리 계층을 설명하기 위해선 대륙과 다른 잉글랜드 특유의 귀족 제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대륙의 경우, 대표적으로 독일은 귀족의 자식이면 모두 귀족이고 차남이나 딸도 신분에 맞는 결혼을 하면 그 후손은 모두 작위가 있건 없건 귀족이었다.[1] 이와 달리 영국에서는 작위를 가져야만 귀족이고, 그 귀족 지위는 장남만이 물려받을 수 있다. 차남 이하는 평민이고 그 후손들 또한 평민이 된다. 물론 귀족의 자제는 일대귀족이라 하여 귀족급 대우를 해주기는 한다. 귀족의 차남 이하는 물론, 작위를 물려받을 장남조차 타이틀 보유자인 아버지나 조부가 살아있다면 후계자는 본 작위를 가진 아버지의 하위 타이틀로 귀족처럼 부르지만(예를 들어 노퍽 공작의 장남은 아룬델 백작[2]) 법률적 신분은 평민과 같다.[3] 즉 잉글랜드 내의 특권 귀족은 현직 작위를 가진 불과 수십명이고, 많아봤자 수백 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2.2. 둘째부터 젠트리화됨

귀족의 자제지만 작위가 없는 차남 이하의 후손들은 3대째가 되면 자연스레 젠트리가 되었다.

중세시절 기사에스콰이어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없었다.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 받은 계층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체로 연수입 20파운드가 넘는 지주[4]라야 젠트리 계층으로 포함되었다. 훗날 사회상이 변하면서 도시의 유력계층이라 할 수 있는 상공인, 교수, 법률가 등도 포함되어 변모했다고 보면 된다.

2.3. 장미전쟁: 급격한 귀족 수의 감소

이처럼 잉글랜드는 특유의 귀족 제도 때문에 귀족의 수가 매우 적었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전술한 대로 장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잉글랜드 귀족 전체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혈통인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의 편으로 찢어져 서로 싸웠다. 일시적으로 이기면 숙청하고, 다시 반격해서 쫓아내고 하는 통에 장미 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가 귀족을 소집했을 때는 29개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헨리 8세 시절에도 귀족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작급은 왕족이 아닌 경우 달랑 하나만 남았었고(하워드 가문 노퍽 공작가)[5], 공후백자남 중에 끄트머리 귀족이라 할 남작 가문 30여 개 합쳐서 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작위 가진 귀족은 50개 가문밖에 남지 않은것.

2.4. 젠트리의 두각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귀족 계층 대신 사회 지배계층이라 할수 있는 젠트리가 튜더 왕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대륙의 프랑스처럼 귀족과 부르주아의 갈등으로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고[6] 독일처럼 부르주아들이 합법적으로 귀족 작위를 사서 편입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영국은 젠트리가 주도하는 형태의 정치 형태로 발전한다.

2.5.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로의 종교개혁: 젠트리의 세력 확장

튜더왕조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당시, 영국의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여 매각하자 이를 헐값으로 얻은 젠트리 층이 종교개혁을 지지했으며, 젠트리는 이를 통해 크게 성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미 그전부터 젠트리 층은 대륙의 귀족처럼 사회 지도계층이었다. 국유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재력이나 권력은 극소수의 전통 귀족을 제외하면 나머지 젠트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6. 젠트리의 법조계, 종교계, 교육계, 상업계 장악

훗날 청교도 혁명의 크롬웰은 젠트리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상인이나 법률가로 올라선 중산계급이 젠트리화 되기도 했다. 인클로저 운동의 주체도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젠트리 계층의 대다수는 시골에 일정규모 이상 토지를 보유한 지주들이었다. 이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아서 치안판사, 성직자, 교수, 상공인이 된 것이지 젠트리가 런던 시내에서 장사하다가 벼락출세한 케이스는 상대적으로 소수다. 젠트리는 종교개혁을 열렬히 지지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가톨릭을 고수한 젠트리도 상당수였다. 종교에 열성적이지 않은 대다수의 무리들은 영국 국교회로 편입된다.

2.7. 자본가화

대륙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청교도는 젠트리 중 소수였다. 그렇지만 런던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였고, 이들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게 권력과 가까운 법률가, 신학자, 교수, 군인, 상공인들은 튜더 시절 권력의 상층부에 편입되면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데다가 사상적으로 대륙 개혁신학 사상으로 무장하여 17세기부터 스튜어트 왕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이 부분부터는 청교도 항목 참조. 이후 이들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상공업에 종사하여, 부를 쌓은 젠트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본가로 전환하게 된다.

3. 정리

앞서 서술한 대로 젠트리=영국 지배층이었다. 비록 신흥계층들이 포함되었다해도 극소수의 귀족가문을 제외하면 사실상 다른 나라의 지방 귀족 내지 기득권에 해당하며 중국 명청시대의 향신, 조선의 양반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젠트리들이 간간히 줄을 잘서거나 군공을 세우거나 왕실의 친인척이 되거나 하는 식으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은 있어왔는데 제임스 1세 시절에는 연 수입 50 파운드 이상의 젠트리들은 강제로 제임스 왕의 충실한 신하임을 증명(?)하기 위해 명예로운(?) 준남작 작위를 사야했다. 그러니깐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세금 뜯으려고 강제 구입...[7] 영국의 제도적 특성상 귀족은 아니나 지배층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은수저가 아니라 금수저라는 것.

4. 관련 문서



[1] 이는 프랑스나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경우는 한술 더 떠서 공작의 아들은 전부 공작, 백작의 아들은 모두 백작이다. 레프 톨스토이만 하더라도 넷째아들이었지만 역시 백작이었다.[2] 아룬델 백작이 서리 백작보다 유서가 깊은 작위이다. 영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백작 작위로 잉글랜드 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웨일즈에 더 유서 깊은 작위가 있더라도 잉글랜드의 귀족이 우선순위이다.[3] 귀족의 경우 기소되어도 귀족 재판소에서만 재판 받고 배심원들은 전부 귀족이 선정된다.[4] 요먼 같은 경우는 연수입 2파운드 이상이어야 했다.[5] 그나마도 토머스 하워드의 장자 서리 백작은 처형당하고 손자 토마스 하워드도 처형...되나 기적적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 다만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들도 전통귀족들이라기보단 군대나 성직, 재력으로 일어선 신흥귀족이 대다수였다. 이들이 기득권 강화를 위해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전하면서 부르주아들이 반발했던 것.[7] 진짜로 안 사면 더 손해일 정도의 벌금을 때렸고, 찍히면 고등 재판소에서 꼬투리 잡아서 쳐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