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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7년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한 사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탄생되면서 그레이트브리튼섬은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되었다. 참고로 웨일스는 1282년에 잉글랜드로 편입되었다.2.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대립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성립이래 통일 이전까지 대립해온 라이벌관계였다. 물론 국력 자체는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서 잉글랜드-프랑스간의 그것과는 다르게 잉글랜드가 일방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차지하려 드는 것을 스코틀랜드가 이악물고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잉글랜드-스코틀랜드 간 통일의 첫 시도는 에드워드 1세의 치세에 일어났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를 침공, 합병하였고 스코틀랜드 던켈드 왕조가 후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 알렉산더 3세가 사고로 요절하면서 계승권 분쟁이 일어나자 존 발리올이라는 영주를 허수아비로 내새워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침해하며 잉글랜드 법 적용, 프랑스와의 전쟁 참전 요구 등을 하자 존 발리올 또한 에드워드 1세와의 연을 끊고 분노한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윌리엄 월레스, 로버트 1세와 같은 성웅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한 채 전장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고 1296년에서 1328년동안 32년간의 전쟁 끝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로버트 1세가 제창한 브루스 왕조를 인정하며 끝나게 된다.
하지만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는 과거 스코틀랜드의 허수아비 국왕이었던 존 밸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을 내세워 스코틀랜드를 침공,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25년간의 전쟁 끝에 잉글랜드는 다시 패퇴한다.
3.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동군연합 형성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튜더 왕조는 단절되었다. 따라서 혈통적으로도 계승권에 우선이었으며 종교도 신교였던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 왕국의 제임스 1세로 옹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 동군연합이 형성된다.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군 연합은 불안정하였고 영국 내전이라는 이름의 혼란기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드 왕조는 단절된다. 찰스 1세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고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의 양식을 강요하여 스코틀랜드에는 반란이 일어난다. 동시기 잉글랜드에선 잉글랜드 내전 끝에 찰스 1세의 목이 잘리고 올리버 크롬웰이 잉글랜드 연방을 성립하지만 재차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크롬웰의 치세 끝에 스튜어트 왕조가 돌아오지만 육군과 가톨릭의 처우와 관련해 의회의 반발을 빚어서 잉글랜드 의회가 단독으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를 초빙하며 스튜어드 왕조가 단절된다. (명예 혁명) 잉글랜드 의회가 단독으로 (잉글랜드 왕이자) 스코틀랜드 왕을 갈아버린 사건에 자코바이트라는 이름의 반란이 준동하고 스코틀랜드 왕을 스코틀랜드 동의 없이 바꾸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왕조가 단절되었기에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특히 강세를 얻는다.
따라서 18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동군 연합이기는 하나 독립된 왕국이었고 이 동군연합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스코틀랜드의 그것을 능가하던 상황이었다.
4. 다리엔 계획의 실패와 스코틀랜드의 파산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술한 듯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점차 압도해 나가는 상황에 낙후된 변방의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잉글랜드는 물론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169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을 겪으면서[1] 인구의 10~15%가 죽고 스코틀랜드 유력 귀족 가문들 또한 파산하는 경제적 파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떠오른 것이 다리엔 계획(Darién scheme)이었다.그동안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한 발 먼저 타 대륙에 식민지를 펴고 경영으로 성공하는 것을 지켜본 스코틀랜드는 본인들 역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같은 방법을 채택. 17세기 후반, 중앙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다리엔 계획을 추진한다. 오늘날 파나마 남부의 다리엔(Darién)이라는 지방에 스코트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다리엔 계획을 위해 유럽 각지와 스코틀랜드 국내에서 £400,000라는 거금의 투자를 끌어내고[2] 야심차게 시작하였으나 이 계획은 여러가지 이유로 실패한다.
다리엔 계획은 태초부터 성공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다리엔 지역은 현대까지도 늪지대와 열대우림으로 이뤄진 극한의 오지로[3], 현대에 이르러서도 개척이 되지 않고 있는 위험 구역이다. 비단 다리엔 지역 뿐만이 아니라 파나마 지역 전체가 열대우림과 높은 산맥으로 이루어진 사람 살기 참 힘든 곳으로, 훗날 파나마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철도는 1855년, 운하는 1914년에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완공된 것을 감안하면 공학 기술이 덜 발달했던 17세기에 파나마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다리엔 지역에 열대우림이 가득한 만큼 이로 인한 풍토병은 개척자들 상당수의 목숨을 앗아간다. 더군더나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당연히 스코틀랜드가 한 숟가락 뜨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으며,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건설 시도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데 힘을 써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투자자들이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사업에서 투자금을 회수하게 회유하고 법적 영역에서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개척 시도에 사사건건 간섭하였고[4] 이는 스코틀랜드의 다리엔 계획 유지에 큰 지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다리엔 계획의 종막을 불러온 것은 스페인의 군사적 개입이었다. 다리엔 계획으로 개척될 지역은 사실 스페인 제국의 일부였으며, 상술했듯 가혹한 야생 환경 때문에 손 쓸 도리가 없어서 방치했을 뿐이지 엄연히 스페인 제국의 권역 안에 있던 영토였다. 스페인의 땅인 줄은 꿈에도 모르던 스코틀랜드의 식민지가 그곳에 세워지자, 스페인은 다리엔의 식민지를 침공, 포위하고 이는 다리엔 계획의 전면 파기로 이어졌다.
5. 잉글랜드와의 통일 및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탄생
심각한 기근, 국가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던 다리엔 계획의 처참한 실패와 이어지던 북부의 자코바이트 준동은 스코틀랜드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겼고,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의 수습 방안으로 잉글랜드 왕국과의 통합을 모색한다.경제적인 파탄 상태에서 스코틀랜드의 부채는 잉글랜드에 의해 탕감받았으며, 스코틀랜드 사업가들은 잉글랜드와의 통합을 통해 대영제국의 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았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과거 찰스 1세라는 선례가 있는 만큼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독립이나 사법, 은행, 교육 체계의 분리와 같은 양보도 약속받았으며 그 대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된 왕국은 하노버 왕조가 대를 이을 것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이 통합에 대한 반발은 존재했고 잉글랜드는 £20,000어치의 뇌물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풀면서 묵살하였으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하나의 의회를 사용하는 부분과 같이 반발이 많은 부분들에 잉글랜드의 주장이 관철되는 등의 문제도 팄었다.
1706년에는 잉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와의 통일" 법이 통과되고 170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도 "잉글랜드와의 통일" 법안이 통과되면서 1706년 체결된 통일조약이 발효, 영국 통일이 이뤄진다.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이 절차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고 잉글랜드 국왕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분리되어 있던 왕위도 영국 국왕으로 통합되었다.
6. 결과
그레이트브리튼섬의 통일로 하나된 시장과 군대, 이어지는 브리튼 제도에서의 외부 세력 말소로 영국은 수혜를 입는다.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사업가들은 동의하여 체결한 조약이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인 다수는 스코틀랜드의 높으신 분들이 주도한 잉글랜드와의 통합에 반대하였으며, 이는 소요 사태로 이어진다. 잉글랜드와의 통일에 반대한 상당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코바이트나 언약도 반란에 가담, 18세기에 여러차례 영국은 자코바이트 반란들로 홍역을 치르게 된다.
6.1. 스코틀랜드 재분할?
1706년 조약에서 단일 의회 하에 통합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지만 1990년대 영국의 자치권 이양 시도에 따라서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와 정부가 신설되었다. 자치정부는 수립되었어도 시점 스코틀랜드 자체는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일부로 존속하는 만큼 영국 통일이 되돌려진 것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계속되는 만큼 앞으로의 추세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1] 비슷한 시기에 조선 역시 대기근을 겪었다. 소빙하기가 전 지구를 휩쓸었기 때문이었다.[2] 무려 스코틀랜드 총 통화량의 1/5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야말로 영끌의 수준.[3]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잇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도 이곳을 지나지 못하여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는 단절이 되어 있으며 이곳의 여행은 여행자 보험도 적용이 되지 않는다.[4] 스코틀랜드 당국이 해외 투자금을 융통하는 것이 불법이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