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United Kingdom Großbritannien | 독일 Deutschland Germany |
Anglo-German relations
Deutsch-britische Beziehungen
1. 개요
영국과 독일의 관계.2. 단순 비교
항목 | 영국 | 독일 |
면적 | 244,820km² | 357,021km² |
인구 | 64,100,000 | 80,620,000 |
정치제제 |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 | 의원내각제 연방 공화국 |
1인당 GDP | $44,177 | $44,184 |
명목 GDP | $2조 9,332억 | $3조 6,158억 |
국방비 | 525억 달러 | 383억 달러 |
3. 역사
3.1. 고대 ~ 중세
양국은 모두 게르만족이라는 공동의 기원을 가진다. 흔히 게르만족을 독일의 민족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앵글로색슨 족의 색슨은 독일의 작센과 어원이 같으며, 두 국가의 언어인 영어와 독일어는 모두 서게르만어군에 속한다.[1] 이러한 공동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두 지역 사이의 교류는 한동한 단절되었다. 13세기 무렵 북해의 무역을 주도하는 한자동맹이 급부상하면서 다시금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졌다.3.2. 근대
이후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되자 당시 독일의 영방국가[2] 중 하나인 하노버 왕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영국 국왕 조지 1세로 추대되면서 하노버 왕국과 영국은 동군연합으로 묶이게 된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전까지[3] 1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국가는 동군연합으로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대격변의 시기를 함께 지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로 동군연합은 해체되었지만, 여왕의 부군이었던 앨버트 공이 독일 출신인 것에서 보이듯이 왕실 사이의 인적인 교류를 꾸준히 이어졌다.[4]이후 7주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거치며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영국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암암리에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이러한 외교방침은 기본적으로 명예로운 고립을 자처하던 영국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의 연장선인 것도 있었지만 영국과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러시아를 제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대국이 탄생하는 것을 영국이 내심 반겼기 때문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대외팽창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독일 제국이 출범한 이후로도 두 국가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팽하고 직접 국정을 운영하면서 두 국가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 정책(Weltpolitik)과 그 일환인 3B 정책으로 대표되는 빌헬름 2세의 팽창적인 대외정책은 3C 정책을 위시한 영국을 끊임없이 자극했고[5], 양국 사이에 건함 경쟁이 촉발되어 관계가 악화되었다.
3.3. 현대
양국 사이의 가장은 1차 대전으로 발전했으며[6] 4년간의 지리한 참호전 끝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독일에 대한 복수에 눈이 멀었던 프랑스와 달리 상대적으로 본토 피해가 적었던 영국은 비교적 온건한 대독 정책을 지향했고[7] 그 덕에 전간기 동안 영국과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 사이의 관계는 꽤나 좋은 편이었다. 심지어는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후에도 군사조약을 체결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미치광이였다는 점이다.[8] 결국 또 한 차례의 전쟁을 거친 끝에 영국은 미국, 소련, 프랑스와 함께 전후 독일을 점령했다.이후 새롭게 탄생한 독일연방공화국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친서방정책 등을 펼치면서 양국 정부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인 반향으로 진전되었다.[9]
그러던 중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독일을 위시로 한 유럽연합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안건이 가결됨에 따라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게 되었다. 당연히 EU의 맹주인 독일은 이러한 영국의 행보를 좋게 볼 리가 없고, EU 탈퇴 절차를 위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에도 양국 사이에서는 기싸움이 진행되었다.[10][11]
보리스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와 관련된 건으로 메르켈 총리와 의견교환을 나눴다.# 존슨 총리는 북아일랜드 백스톱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양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 양국은 대러 제재를 실시했다. 4월 8일에 양국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2022년내에 중단하기로 했다.#
2024년 10월 23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존 힐리 영국 국방장관과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영독 양국이 '트리니티 하우스 조약'에 서명하였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해당 조약은 나토와 별개로 영국과 독일 양국이 체결하는 방위조약이다.#
4. 여담
- 현대에 들어와서는 국민감정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축구 경기만 있으면 양국 사이에 라이벌리가 불탄다. 특히 더 많이 당한 영국 쪽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양국 간의 굵직굵직한 경기들은 지금까지도 회상되는데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결승전이 특히 유명하다. 해당 경기는 연장전까지 가는 치열한 경기 끝에 잉글랜드의 4:2 승리로 끝났다. 독일에서는 오심을 두고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지만 영국에서는 Two World Wars and One World cup이라는 응원가로[12]기념한다. 다만 잉글랜드는 자신들의 최대 라이벌로 항상 독일을 꼽지만 정작 독일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비해 잉글랜드에 신경을 덜 쓴다.
- 2006년에는 더 선지에서 앙겔라 메르켈의 얼굴을 성인잡지에 등장한 여성 모델에 합성하는 바람에 빌트 지에서 크게 반발했다. 빌트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 유럽연합에 남아있으면 1966년 월드컵 결승골을 인정하고, 잉글랜드가 페널티 킥을 찰 때 골대를 비워주겠다고 조롱했다.
5. 관련 문서
- 영국/외교 / 유럽연합-영국 관계
- 독일/외교
- 영불관계
- 프랑스-독일 관계
- 영프독
- 브렉시트
- 주요 7개국 정상회담
- 영국/역사
- 독일/역사
- 영국/경제
- 독일/경제
- 영국/문화
- 독일/문화
- 영국인 / 독일인 / 독일계 영국인
- 영어 / 독일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1] 다만 현대 영어의 경우 중세 시기 프랑스어의 영향을 원체 강하게 받다보니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의 짬뽕이 되어버렸다. 물론 독일어도 어휘의 약 30%가 프랑스-라틴 어휘이지만 순수 게르만 어법은 영어보다 더 잘 보존되었으며, 영어가 전체어휘의 무려 55%에 달하는 프랑스-라틴 어휘를 차용한것에 비하면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2] 이 시기 독일 지역은 엄청나게 많은 군소공국(영방국가)들로 분열된 상태였다.[3] 영국은 살리카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던 반면, 독일 지역은 살리카 법이 적용됐던 지라 빅토리아 여왕은 하노버 왕국의 군주로는 즉위할 수 없었다.[4]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 역시도 후일 독일 제국의 2대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시집을 간다. 이런 왕실 사이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계기는 바로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리고 영국 왕실은 대중적인 반독 감정 때문에 작센코부르크고타라는 성까지 윈저로 바꾸었다.[5] 사실 빌헬름 2세와 독일의 외교진들이 아무 생각없이 마냥 영국을 자극하려고 팽창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팽창을 추진하면 결국에는 영국이 자신들에게 동맹을 제의해 올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문제는 영국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숙적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했다.[6] 다만 기꺼이 전쟁을 시작한 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영국의 경우에는 독일과 어떻게든 개전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으로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모든 게 다 무산되었다.[7] 소련의 영향력이 점점 유럽에 확장되고 있었기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을 강압적으로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8] 사실 히틀러 본인은 영국에 대해 꽤나 우호적이었다. 집권 직후 영국 외교관에게 '세계에는 영국, 미국, 독일 이 3개의 강대국만 존재하면 된다. 나는 영국의 팽창을 신경쓰지 않으니 영국도 독일의 팽창에 신경쓰지 않기 바란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으며 또한 2차 대전 당시 교전 중이던 영국의 식민지가 일본에 공격당하자 히틀러가 분노하며 영국 정부에 영국이 독일과 휴전하면 동남아 식민지 탈환에 나치 독일도 적극 협조하겠다고 한 바도 있다. 물론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 있는 독일의 팽창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걸림돌이라는 서술로 봐서는 정말 영국의 팽창주의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9] 물론 그렇다고 늘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영국이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하면서 서독이 이에 반발했던 적도 있었고, 독일 통일 당시 마가렛 대처가 독일의 통일을 반대했으며 최근에는 브렉시트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 중이다. 양국 국민들, 특히 기성세대들 사이에는 세계 대전으로 인한 불편한 감정이 여전히 존재한다.[10] 독일은 국경 개방과 EU 출신에 대한 이주 자유 보장 없이는 단일 시장 접근권을 허용할 수 없다는 쪽이고, 영국은 온전한 이민과 국경 통제권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다.[11] 브렉시트 전후로 영국 보수파들과 기성세대들 사이에서 EU를 '독일의 제4제국(4th Reich)'라고 부르며 조롱섞인 경계감(이는 독일 재통일 당시에도 보였던 반응으로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을 드러내거나, '독일은 세계 대전 때 영국을 위협했으나, 호주 등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을 위해 싸워줬다.'라고 언급하는 등 독일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12] 그러니까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 번의 월드컵에서 이겼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