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러시아 제국|]] |
영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 러시아 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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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당시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러시아 제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
2.1. 성립
영국과 루스 차르국과의 외교 관계는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제국 수립 이후에도 이어졌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여러 문물들을 받아들일 당시 영국의 문물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여담으로 표트르 대제와 그 수행원들이 영국에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숙소로 사용하던 집의 초상화들을 권총 과녘으로 삼는 등 난장판으로 만들어서,2.2. 19세기 이전
양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같은 편으로 참전하는 등 우호 관계를 지속하였다.예카테리나 대제시절에는 영국의 문물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양국간의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18세기 초 카스피해 북부의 러시아의 속국 칼미크 칸국(오늘날의 칼미크 공화국 일대)을 방문한 영국인 기록자는 칼미크인들이 농업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해당 지역의 광활한 땅은 "잉글랜드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버려져 경작되지 않는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해당 기록에 대한 보고가 예카테리나 대제 귀에 들어가자 예카테리나는 칼미크인들의 유목을 방해한 후에 조금씩 독일인들과 카자크들을 정착시켰고,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칼미크인 상당수는 다시 청나라로 이주해버리고 말았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는 교역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주로 러시아의 1차 산물이 영국으로 수출되고 영국의 공산품이 러시아로 수입되는 구조였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 체르노젬 지대에서 생산되는 밀을 영국으로 대량 수출하였는데 이는 러시아의 주요 외화 공급원이 되었음은 물론 영국에서 수입하는 식량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밀이 저가에 수입되면서 밀 농장들이 양을 키우는 목양지로 바뀌고 이후 잉여 노동력이 급증하면서 이른바 산업 혁명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2.3. 19세기
자세한 내용은 그레이트 게임 문서 참고하십시오.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상당수의 프랑스 귀족들이 영국이나 러시아로 피난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서로 프랑스를 피해 밀무역을 하며 협력하던 양국은 이후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하자 서로 견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영토가 넓었다. 러시아 제국은 알래스카를 포함해서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에 걸쳤던 나라이기도 했다. 러시아가 흑해에서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은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였고 나비효과로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넘겼다.
중앙아시아 방면에서는 인도를 차지한 영국과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북부 일대의 우즈베크계 칸국들을 점령하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이후, 듀랜드 라인이 생겨나면서 파슈툰족의 거주지가 나뉘어졌다.
중동에서는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로 남하하면서 이란 카자르 왕조로부터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해방하고,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에 해당하는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한 편 영국은 카자르 왕조 남쪽 페르시아 만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를 장악하였다.
양국 사이의 상호 견제는 동아시아에서도 일어났다. 19세기 말부터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러시아 제국은 제주성 위협사건을 일으켰고 영국은 거문도 점령 사건을 일으키는 등 한반도의 일부를 점령했다. 19세기 말에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영러협상을 통해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키로 합의했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러시아인 및 러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저격하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가 서구권에서 반향을 일으켰는데, 특히 영국에서는 자신들의 적국인 러시아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해당 책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투르게네프는 19세기 중반 기준으로 서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였는데, 이러한 자신의 입지를 활용하여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독일과 영국, 프랑스 출판사들과의 계약을 주선하는데 힘을 써주었다. 투르게네프의 주선 덕분에 곤차로프,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들이 유럽의 문학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2] 즉 양국간의 적대 관계는 오히려 양국 사이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러시아인 귀족들과 인텔리겐치야 계층 역시 영국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 커지며 기존에 공부하고 사용하던 프랑스어 외에도 영어 사용과 학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귀족 가문 출신 문인이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집에서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사용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2.4. 20세기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시켰고 대한제국을 합병했다.1907년, 프로이센을 주축으로 한 삼국동맹의 위협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이란과 티베트 관련하여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혔다. 양국은 이란의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완충국으로 두기로 했다. 한 편 영국의 사업가 녹스 다시가 카자르 왕조의 부패한 왕족들을 구워삶아서 석유 60년 무상 채굴권을 따내고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를 설립하면서 영국 측으로 유리하게 상황이 기울었다.[3] 같은 맥락에서 양국은 티베트에 대해서 서로 손대지 않기로 합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 러시아 제국은 영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지만, 전쟁 도중에 혁명이 일어나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