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8:13:20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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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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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진행
2.1.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 ~ 1842)
2.1.1. 전쟁 전의 상황2.1.2. 1839 봄, 영국의 침공2.1.3. 샤 슈자(1803 ~ 1809, 1839 ~ 1842)2.1.4. 1841년 11월, 카불 봉기2.1.5. 악바르 칸과의 협상2.1.6. 잘랄라바드 요새 공격: 실패2.1.7. 영국군의 재침공과 후퇴
2.2. 1차 전쟁 이후2.3.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78 ~ 1880)
2.3.1. 경과2.3.2. 주 전투
2.4.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19)
3. 대중매체 속 모습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Anglo-Afghan War

1. 개요

영국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이 세 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을 의미한다.

전투 측면에서 본다면 영국 군대와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대립이나, 크게 보면 바다를 향해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과 전세계의 제해권을 쥔 대영제국의 세력 대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장대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일부라고 본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3대 아프가니스탄 침략군 막장전설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영국은 소련, 미국과 비교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일단 영국-아프간 전쟁은 1, 2, 3차로 나뉘긴 했지만 각각의 전쟁 기간들을 합쳐도 소련-아프간, 미국-아프간 전쟁에 비하면 전쟁 기간이 제일 적었다. 또한 각각 전쟁의 피해도 소련, 미국보다 적었다.[1]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꽤 고생했지만 영국은 후폭풍 또한 약해 고생을 별로 안 했다.

2. 진행

2.1.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 ~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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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니 왕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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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칸다하르 · 카불 · 페샤와르 · 헤라트
언어 파슈토어 · 다리어
민족 파슈툰인 }}}}}}}}}}}}}}}

First Anglo-Afghan War (Disaster in Afghanistan)
د افغان-انگرېز لومړۍ جگړه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 도스트 무함마드 칸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샤 슈자로 교체시킨 후 발생한 바라크자이 왕조의 쿠데타. 진압은 되었지만, 결국 영국군은 도망쳤다.

2.1.1. 전쟁 전의 상황

영국군은 1820~30년경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중앙아시아로 진출을 시도하면서 러시아 제국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펀자브 지방에는 시크교도들이 무굴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한 후 시크 왕국을 건설한 상황이었다. 영국은 아프간의 지원을 얻고자 아프간의 아미르인 도스트 무함마드 칸(1793 ~ 1863)[2]과 접촉하였다. 무함마드 칸도 시크교도들에 의해 파키스탄 북부지역에 해당되는 영토를 빼앗긴 터라 호의적으로 나섰으나, 영국도 파키스탄을 노리고 있는 경쟁자임을 곧 깨닫고 동맹 논의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 때 그레이트 게임 국면 속 영국과 대립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점차 세력권을 넓히던 러시아 제국이 이를 알고 무함마드 칸에게 접촉했고,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생긴 두 세력은 협상에 상당히 진전을 보였다.

2.1.2. 1839 봄, 영국의 침공

이에 영국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이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 우려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적법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원조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본격적으로 침공하게 된다. 주의할 점은 이들 영국군은 영국 정규군들이 아니라 용병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인도는 영국 직할령이 아니라 동인도회사 직할령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부 사실상 민간군사기업(PMC)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도인 세포이들을 중심으로 2만 1천명의 인더스 군(Army of the Indus)이라는 원정군 및 3만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영국군은 1839년 3월 말 볼란 고개(Bolan Pass)를 통과하며 카불로 진격해 들어왔다.

4월 25일 남부 도시 칸다하르(Kandahar)에 무혈입성한 영국군은 쉽게 아프간 남부를 휩쓸 수 있었는데, 문제는 아프간인들이 이들을 전혀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정군 사령관인 윌리엄 헤이 맥나튼(William Hay Macnaghten, 1793 ~ 1841)은 돈으로 충성심을 살 수 있을거라 판단하여 계속 진격했고 1839년 5월 4일 ~ 7월 23일까지 가즈니(Ghazni) 요새에서 공방전을 펼쳐야 했다. 가장 치열한 전투로 유명한 이 1차 침공에서 아프간군은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요새를 사수하는 결사항전을 보여주어, 영국군도 200여명이나 사상자를 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공병을 통하여 성벽을 날려먹었고 결국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여기서 1차 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문제가 터지게 된다. 포로로 잡힌 1600여명 중 몇몇이 영국이 내세운 '적법한 지도자'였던 두라니 가문의 샤 슈자(Shah Shuja)에게 불신자라는 욕을 해 대자, 이에 폭발한 샤 슈자가 40~50여명의 포로들을 자신의 직할 부대를 시켜 학살한 것이다. 이 학살은 아프간 전역에서 샤 슈자가 잔인한 자라는 악명을 떨치고, 아프간인들이 영국과 샤 슈자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가즈니 요새 공방전을 끝으로 하여 1839년 7월 영국 인더스군과 샤 슈자의 부대는 카불에 무혈입성하였다. 개전 4개월도 안 되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무함마드 칸 세력을 몰아내고 영국은 침공 명분대로 샤 슈자를 새로운 왕으로 앉혔다.

2.1.3. 샤 슈자(1803 ~ 1809, 1839 ~ 1842)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즉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 샤 슈자는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여 멋대로 쳐들어와 왕을 갈아치우는 영국에 대해, 그리고 그 영국의 의해 왕위에 오른 '샤 슈자'와 그 부하들에 대해 바라크자이 왕조(1826 ~ 1919)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샤 슈자가 잔혹한 인물이라는 것이 가즈니 공성전 포로학살로 알려져 있어서 이것에 대한 불만과 경계심도 컸다. 게다가 이슬람교와 폐쇄적인 자연환경 속 부족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던 현지인들에게서 영국군의 행동은 큰 반발을 샀다. 영국군은 아프간 여인들과 을 마시거나 매춘을 자행했다. 파슈툰족은 외부인 남성이 부족 여성들과 성행위를 하는 데 강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의 불만과 증오는 높아졌다.

새로이 왕이 된 샤 슈자의 통치력은 카불, 칸다하르 등 주요 도시와 그 부근을 넘어서지 못했고 동시에 영국군도 8000여명만 남기고 철수를 하였으며 점점 주둔군을 줄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여러가지 문제들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영국에 의해 쫓겨난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아들인 와지르 아크바르 칸 (Wazir Akbar Khan), 또는 '악바르 칸(Akbar Khan)'은 혼란을 틈타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2.1.4. 1841년 11월, 카불 봉기

첫 전투가 벌어진 지 2년 정도가 지난 뒤인 1841년 11월 1일부터 카불에서 대규모 무장봉기가 발생하게 된다.[3] 샤 슈자 정권이나 주 아프간 영국군은 이 무장봉기를 진압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다. 봉기의 시작은 웃기게도 돈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번스(Alexander Burnes, 1805 ~ 1841) 부(副)대사 집에 금이 넘쳐난다는 말에 반영 아프간인들과 금을 노리는 아프간인들이 이걸 노리고 폭동을 일으켰고 이를 막는 과정에서 영국군 장교 1명이 시위대쪽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하여 발포명령이 떨어져 교전이 벌어졌고, 교전 및 자택 경비를 섰던 30여명의 세포이들과 부(副)대사의 동생 찰스 번즈가 사망했다.

카불의 봉기는 시작에 불과했고, 아프간 전역으로 확대된 상태였다. 이미 악바르 칸의 반군 6천여명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기에 샤 슈자의 군대는 모조리 격파당했고 영국군 주둔지도 군중에 포위당해 300여명의 병사가 죽고 말았다.

2.1.5. 악바르 칸과의 협상

이 무장봉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영국은 인도 지역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폭설로 지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악바르 칸의 병력은 기존 6천명에서 3만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기병과 포병이 잘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그런 상황에서 악바르는 영국에 협상을 제의해 왔고 영국은 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841년 12월 23일 1차 원정군 사령관이었고 전후 주 아프간 영국대사가 된 맥노튼은 악바르 칸을 만만히 봤지만, 악바르 칸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영국을 상대로 거짓과 기만이 탁월한 자였고 맥노튼은 오히려 여기에 당하고 만다. 악바르 칸이 애시당초 거짓으로 제의한 화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버지 도스트 무함마드 칸을 복위 및 아프간으로 무사귀환 시킬 것.
  • 영국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함.
  • 군 철수와 아버지 귀환의 신뢰할 수 있는 증표로서 영국군 고위장교와 가족들 일부를 인질로 내줄 것.

맥노튼은 이걸 어떻게 역이용[4]하려 했는지는 몰라도 결국 가뜩이나 반영감정이 높은 악바르 칸의 심기를 건드렸고, 협상장에 나온 맥노튼은 결국 악바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사태로 결국 영국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조지 키이스 엘핀스톤(William George Keith Elphinstone, 1782 ~ 1842) 소장은 악바르의 요청을 그대로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1842년 1월 1일에 악바르 칸의 조건을 모두 수용한 일방적 철수가 결정된다.

영국 측은 일부의 인질만을 남기고 영국군 4,500명과 민간인 12,000명을 '잘랄라바드(Jalalabad) 요새'까지 이동시키는 데 안전을 보장받았다. 영국인들은 협정을 맺긴 했어도 잘랄라바드 요새까지의 여정에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역시 악바르는 그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들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 자신들의 권좌를 축출한 영국인들에게 보복할 생각만 가득했고 부족의 명예와 이슬람 문화를 더럽혔다고 여긴 아프간인들의 반영의식도 고려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이들을 몰살시킬 계획이었다.

본격적인 철수는 1월 6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첫날부터 이미 불운이 시작되었다. 악바르가 약속한 호위 병력들이 오지 않았고, 결국 영국군 단독으로 철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루 6마일 즉 9.6km밖에 나가지 못한 것이다. 워낙 민간인들의 짐이 많아서 철수 대열은 매우 느렸고 민간인들이 많은 탓에 천막없이 눈밭에서 노숙들을 하면서 얼어죽는 경우도 속출했다. 단 하루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첫날부터 후미 대열을 악바르의 아프간군이 공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월 7일 뻔뻔하게 영국군 철수 대열로 온 악바르는 왜 자기가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철수를 한다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엘핀스톤에게 화를 냈고, 지금이라도 호위를 해줄테니 재차 금과 추가 인질을 요구했다. 당연히 영국군은 분개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엘핀스톤은 결국 그 요구를 또 수락하게 된다. 더 가관인건 아크바르가 이를 이용해서 자신이 안전을 위하여 철수 지역의 부족들과 협상할테니 대기하라고한 요구까지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협상은 영국 철수 대열의 안전이 아니라 철저한 공격을 위한 수작이었다는 사실을 결국 영국군도 알게 되었다. 쿠르드-카불 고개(Koord-Kabual)에 들어서자마자 고갯길 위에서 부족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그 좁은 고갯길에서의 사투는 처절하게도 영국군 3,000명이 전사하는 최악의 패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핀스톤은 악바르의 약조를 믿고 계속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악바르는 엘핀스톤을 철저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1월 9일, 결국 악바르는 영국군 여성들과 아이들을 모두 인질로 삼겠다는 조건을 걸게 되었다. 이것마저 결국 수용하는데 이 요구 조건은 사실상 노예매매가 유효했던 아프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했다.[5] 게다가 엘핀스톤마저 납치당하여 강제적으로 인질이 되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엘핀스톤 소장뿐만 아니라 44연대를 필사적으로 지휘하는 셸톤 대위와 스키니(Paymaster Johnston, Skinner) 대위도 인질이 되었다.

악바르의 악랄한 약탈에서 영국 철수단은 계속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 철수단은 토마스 안퀴틸(Thomas Anquetil, 1784 ~ 1842) 준장의 지휘하에 1월 10일 다시 철수를 시작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44연대는 처절하게 악바르의 아프간군과 맞서서 후미에서 철수대열을 지켰다. 그러나 수는 이미 계속 줄어들어 영국군은 죽어나가고 민간인들은 사실상 낙오자들을 포함해서 전부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월 11일까지 철수단은 총 2,200여명으로 군인 200여명, 민간인 2,000여명만이 남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30마일 약 48km의 죽음의 행진을 했던 그들에게도 서서히 끝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잘랄라바드 요새에서 50km 떨어진 간다마크(Gandamak)까지 도착했고, 지속되는 공격으로 무장 상태도 엉망이었다. 소총은 전 병력 200여명중 20개밖에 되지 않았고 개인 탄약 보유량은 인당 2~4발이 전부인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결국 악바르는 이 간다마크에서 그들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영국인들도 당대 대영제국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강력한 강대국의 자부심으로 악바르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항복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결과물들을 봤을 때 살려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1차 항복 권유가 있은 뒤 결국 기병을 동원하여 그들을 끝장내게 된다. 포로 2명이 나왔지만 살았을 가능성도 적었고, 민간인들 역시 철저하게 약탈, 도륙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이 마지막 전투에서 말을 탄 6명만이 탈출할 수 있었지만 잘랄라바드 요새로 살아서 1842년 1월 13일에 도착한 사람은 단 1명뿐이었다. 그 행운아는 외과의사 윌리엄 브라이든만(William Brydon, 1811 ~ 1873)이었다.[6]

영국 철수단은 초기 악바르가 인수한 인질들을 제외하고는 아프간 부족의 약탈에 의하여 납치혼을 포함한 노예로 끌려가서 살게 되었고 이 치욕스러운 참패는 영국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2.1.6. 잘랄라바드 요새 공격: 실패

Battle of Jellalabad

그렇게 영국인들을 약탈 도륙한 악바르 칸과 그의 군대 5~6천명의 정예 병력을 추려서 기세를 몰아 1842년 봄부터 잘랄라바드 요새(Jellalabad Barracks)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새 잘랄라바드 요새에는 로버트 헨리 세일(Sir Robert Henry Sale, 1772 ~ 1845)준장과 1, 600여명의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둔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제 13 서머셋 경보병연대(13th Regiment of Foot Somerset Light Infantry (Prince Albert's))
  • 제 35 뱅골 식민지연대(35th Bengal Native Infantry)
  • 뱅골 식민지 포병대(Artillery troops from the Bengal Field Artillery)
  • 제1 스키너 기병 연대 소속 1개 중대(Squadron from 1st Horse (Skinner's Horse))
  • 사슈자 공병대대(Shah Shujah's Sappers)

가 주둔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일 준장은 엘핀 스톤으로부터 떠나서 반란전에 이곳에서 망가진 요새를 강화하는등의 노력을 하고 있었기에 악바르 칸으로서는 공성전이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게다가 식량확보를 위하여 요새 근방을 지나던 아프간 유목민을 영국군이 기습하여 양 300~500마리를 노획하여 식량문제까지 해결한 상태였고 화력에서도 충분히 정예병력들답게 악바르 칸의 아프간군을 상대하기에는 우세한 입장이었다.

본격적인 공성전은 1842년 4월전에 이미 악바르의 꼭두각시가 된 샤 슈자가 편지를 보내서 요새를 포기하고 인도로 돌아가라는 서신을 보낸바 있었으나 영국군 장교들은 요새사수를 주장했고 지휘관인 세일 준장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악바르와의 결전은 불가피해진다. 치열한 공성전은 지속되었지만 아프간군이 영국군보다 나은 것은 숫적 우세말고 없었고 전황은 영국군에게 유리해져갔는데 당연하지만 아프간의 겨울은 영국군의 진격을 가로 막았지만 잘랄라바트 요새 공방전이 시작될때는 봄이었다. 아프간군만 움직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조지 플록(Sir George Pollock, 1st Baronet)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 구원군이 북상하고 있었고 전령과 함께 아군 총소리를 듣고 있는 잘랄라바드 요새의 영국군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높은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4월 7일 요새의 영국군이 세방향의 야습을 감행하여 악바르 아프간군을 격퇴하였고 4배의 숫적우세에도 결국 악바르의 아프간군은 퇴각하게 된다. 물론 4월 13일에서야 요새의 영국군이 기다리던 아군 구원군이 도착하고 애교섞인 핀잔을 하듯이 스코틀랜드 동요인 =너무 늦게 왔군요(Oh but you’ve been a lang time acoming.)=를 제창해주었다고 한다.(...)

사실 영국군 구원군도 카이베르 고개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들어오고 있었긴 했다. 심지어 영국군은 지역 부족민들이 계곡 위에서 공격한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7]하고 더 위로 올라가서 배후를 타격하는등 산악전의 악전고투를 하면서 온 것이기도 했다.[8]

2.1.7. 영국군의 재침공과 후퇴

카불 침공

잘랄라바드 요새(Jellalabad Barracks)를 구원한 조지 플록(Sir George Pollock, 1st Baronet) 소장의 영국군은 다시 병력을 재정비하여 아프간으로 보복전을 위한 침공에 들어가게 된다. 1842년 8월에 본격적으로 재정비를 마친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재공격을 들어갔고 플록 군(Pollock's Army)와 별개로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다른 영국군을 지휘하는 윌리웜 노트(Sir William Nott, 1782 ~ 1845) 소장의 군대가 역시 북상하고 있었다.

이미 보복을 아주 대놓고 벼르고 있었던 영국군은 이제 악바르의 군세와 반영 아프간 세력을 박살내기 위해서 양갈래로 진격하고 있었으나 곧 양군 모두 진격중지 상태로 대기해야만 했다. 아프간인들의 강력한 저항도,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영악한 악바르 칸이 대단한 능력을 보여서도 아니라 영국 정부와 동인도 회사 및 영국령 인도 총독 문제 등 내적 요인 때문이었다.

1841년 1차 침공과 더불어서 잘랄라바드 요새 구원 출병이 되는 1842년 4월까지는 인도총독이 오클랜드(Lord Auckland)경이었으나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후임 총독으로 에렌버러(Edward Law, 1st Earl of Ellenborough)경이 취임하게 된 상태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현직 총독 사망으로 인사교체 시즌 정도로 보여지는 문제이나 문제는 이 아프간전 상황때가 상당히 골치 아플때라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영국령 인도는 카불을 포함한 주변의 복잡한 정세때문에 영국령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다.[9] 즉 전쟁을 해야하는데 돈이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천문학적인 예산을 영국령 인도정부가 써대니 본국정부에서는 기겁을 하면서 재정지원을 거부했고 결국 전임자가 벌려놓은 전쟁을 포기하고 인도총독 에렌버러 경은 회군을 명령하게 된다.

문제는 이 결정과 명령이 영국에서 강력한 반발을 받았고 어떻게 영국인들이 포로로 잡혀있는데 구출할 생각은 못하고 그 따위로 무책임하게 구느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10] 결국 이 비판을 감내못한 에렌버러 경은 명예와 체면중시하는 영국신사이자 귀족이라는 입장에서 병력 철수와 구출 두가지를 위한 목적으로 말장난스러운 명령을 두 장군에게 하달하는데 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지휘관의 판단여하에 따라. 카불을 경유해서 후퇴하라.

결국엔 플록-노트군은 이 말장난스러운 체면치레성 명령을 받고 다시 1842년 6월 4일에 아프간 카불로의 진격을 개시한다. 악바르도 15,000여명으로 자신이 플록군을 막고 10,000명으로 가즈니에 배치하여 노튼의 병력을 막기 위한 방어전에 돌입하게 된다. 숫적으로는 아프간군이 확실히 우세했는데..
영국군 규모 아프간 이마르국 규모
조지 플록(Sir George Pollock, 1st Baronet) 소장 8000여명 와지르 악바르 칸 (Wazir Akbar Khan) 15000여명
윌리웜 노트(Sir William Nott) 소장 3000여명 지휘관 불명 10000여명

적어도 2배이상은 각각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화력에서 영국군이 우세했고 두 지휘관 모두 노련했다. 플록의 경우 악바르가 잘랄라바드 요새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서 직접 대응한지라 두차례의 격전을 치루었며 결국 9월 13일에 테진 고개(Tezin Pass)에서 악바르를 격퇴하고 노트 역시 가즈니(Ghazni) 근처의 켈라트-이-길자이(Khelat-i-Ghilzai) 전투에서 1만명의 아프간군을 격퇴하게 된다. 다만 플록 군대보다 빠른 8월 30일에 격파를 하고 먼저 진격하고 있었다. 1842년 9월 13일에 윌리웜 노트(Sir William Nott)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카불로 입성했다.[11] 그러나 이미 그전부터 영국인들을 학살한 아프간인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약탈전을 실시하며 보복을 했는데 이 문제는 군기문제로까지 번질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노트가 이끄는 군대가 대표적이었는데 가즈니(Ghazni) 근방에서부터 카불에 이르기까지 영국인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카불을 점령했지만 인질이었던 영국인 119명은 여전히 악바르 칸의 통제하에 있었다. 영국군이 침공하기전까지만해도 갖은 푸대접을 받았고 인도계를 포함한 세포이들은 학살될 정도로 입지가 불안했던 그들은 영국군이 침공하면서 처우가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군이 카불을 재점령했을때는 그들은 이미 카불 서쪽의 아프간 중부인 바미안(Bamyan)으로 악바르 칸과 함께 이동된 상태였다. 따라서 플록 장군은 리치몬드 셰익스피어(Richmond Shakespeare) 대위에게 악바르에게 적대적인 키질바시 기병대 600명을 붙여서 석방을 악바르에게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악바르에게 억류되있던 영국인 인질들은 장교22명 병사 37명, 부녀자 12명, 어린이 22명은 해방된다.

그리고 영국은 사슈자 대신에 푸테 준(Futteh Jung)을 내세우는데 그는 사 슈자의 적법한 후계였다. 그리고 영국은 이제 개개인 병사들의 분풀이 차원 보복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보복을 시작하는데 기존의 아프간의 요새들을 모조리 다 파괴하려고 했지만 아프간인들의 반대로 카불의 중앙시장을 전략적으로 약탈하게 된다. 이 때 인도계 상인들까지 학살당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가즈니의 '솜나스의 문(Proclamation of the Gates)'까지 뜯어오게 된다. 백단향나무로 만든 저 문은 의외로 인도인들에게 역사적 유래가 있는 유적인데, 1025년 가즈니 왕조무함마드의 인도 침공 때, 솜나스의 힌두 사원에서 약탈해서 가즈니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걸 인도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

어쨌든 영국군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 돌아가긴 했다. 문제는 그들이 내세운 푸테 준(Futteh Jung)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내주고 플록의 군대를 따라서 잘랄라바드 요새를 거쳐 페샤와르로 함께 온것이었다. 덕분에 왕좌는 결국 혼란속에 빠졌고 게다가 영국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복에 의한 재보복이랍시고 부족민들의 공격을 받았었다. 어쨌든 영국은 다시 인도로 돌아와야했고 영국은 아프간의 안정을 위하여 침공 딱 3개월 뒤인 1842년 12월 '도스트 무함마드(Dost Mohamed)'가 다시 아프간의 지도자가 된다.
나는 그대들의 자원과 선박, 화기들에 경탄하였소.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그토록 광대하고 번영하는 제국의 통치자들이 나의 가난하고 척박한 나라를 거덜내기 위해 인더스 강 너머까지 왔느냐는 거요.
ㅡ 도스트 무함마드 칸의 회고

2.2. 1차 전쟁 이후

앞서 말한 것처럼 엘핀스톤을 따라 행군했던 영국 철수단중 생존자들인 여성과 아이들은 결국 자신들을 약탈했던 납치범들과 납치혼을 포함한 강제개종 및 노예로 팔려가거나 입양되어서 영국인 혹은 인도인의 정체성을 잃고 아프간 부족민으로 살아가게된다. 처음 부족들이 잡은 이들은 원래 동인도회사와 몸값 거래를 했으나 동인도회사가 몸값 지불을 거부함으로서 벌어진 일이다.

영국인들중 살아돌아온건 결국 원래 인질로 잡혀있던 119명과 철수단의 유일한 생존자 1명뿐이다.

영국과 싸운 악바르(아크바르)칸은 결국 1842년에 아버지 도스트 무함마드가 양위를 해줘서 왕위에 오르나 1845년에 사망하여 다시 아버지 도스트 무함마드가 왕위에 오른다. 사안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악바르의 권력행보와 지나친 권모술수에 의한 배신행위들을 경계하다가 결국 정적으로서 독살시켰다는 설도 있다.

2.3.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78 ~ 1880)

Second Anglo-Afghan War
د افغان-انگرېز دويمه جگړه

독립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가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패전하여 사실상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7개월 뒤, 봉기가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진압한 후 아프가니스탄은 정식으로 보호국이 된다.

2.3.1. 경과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사망하였다. 무함마드의 왕위는 셰르 알리(Sher Ali Khan, 1825 ~ 1879)가 계승하였다. 셰르 알리는 영국에게 적대적이라서 영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영국에 모욕을 주었으며 이에 분노한 영국은 1878년 11월에 약 5만명의 대군[12]을 소집하여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물론 영국이 침공하는동안 셰르 알리 역시 러시아에 친선을 다지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단칼에 거절하면서 오히려 셰르 알리에게 영국에 항복하라고 종용하기 이른다. 그러는 사이 영국은 3개 방면으로 아프간 카불을 향해 진군해왔고 알리 마스지드 전투(Battle of Ali Masjid)와 페이와르 코탈 전투(Battle of Peiwar Kotal)에서 승리 하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두 전투로 카불로 가는 진격로에서는 영국군을 막을 세력이 없었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자 실 알리가 1879년 2월에 사망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 비극이 벌어졌고 영국군에 의해 카불이 점령당하기까지 한다. 결국 셰르 알리의 아들인 야쿱 칸(Ayub Khan)은 영국과 간다마크 조약을 맺었다. 영국에 점령당한 영토를 되찾고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외교권을 영국에 양도하여 사실상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1879년 9월 아프간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 영국인 외교관인 피에르 카바그나리 경(Sir Pierre Louis Napoleon Cavagnari, 1841 ~ 1879)을 죽이는 등 불이 다시 붙자 분노한 영국은 로버트 페드릭(Sir Frederick Roberts, 1832 ~ 1814) 소장을 지휘관으로 카불 야전군 1만 4천명을 또다시 아프간으로 진군하였다. 영국은 야쿱 칸이 이 봉기의 배후에 있었다고 보고 야쿱 칸을 폐위시키고 영국에게 우호적인 압둘 라흐만 칸을 옹립하였다. 야쿱 칸은 간다마크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압둘 라흐만 칸(Abdur Rahman Khan)은 간다마크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2.3.2. 주 전투

연도 전투명 결과(승자)
1878 Battle of Ali Masjid 영국군 (British victory)
Battle of Peiwar Kotal 영국군 (British victory)
1879 Action at Takht-i-Pul 영국군 (British victory)
Action at Matun 영국군 (British victory)
Battle of Khushk-i-Nakud 영국군 (British victory)
Battle of Fatehabad 아프간 (Afghan victory)
Battle of Kam Dakka 아프간 (Afghan victory)
Battle of Charasiab 영국군 (British victory)
Battle of Shajui
Battle of Karez Mir
Battle of Takht-i-Shah
Battle of Asmai Heights 아프간 (Afghan victory)
Siege of Sherpur 영국군 (British victory)
1880 Battle of Ahmed Khel 영국군 (British victory)
Battle of Arzu
Second Battle of Charasiab
Battle of Maiwand 아프간 (Afghan victory)
Battle of Deh Koja 아프간 (Afghan victory)
Battle of Kandahar 영국군 (British victory)
1881 Kandahar (and Afghanistan) 영국군 철수

2차 아프간전에 대한 영국 역사 사이트

2.4.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19)

Third Anglo-Afghan War (Third Afghan War, British-Afghan War in 1919, War of Independence) (영어)
(파슈토어) د افغان-انگرېز درېمه جگړه
(페르시아어) جنگ سوم افغان و انگلیس

2차 아프간 전쟁 이후, 압둘 라흐만 칸(Abdur Rahman Khan, 1840 ~ 1901)과 그의 후계자인 하비불라 칸(Habibullah Khan) 시대까지 친영정책이 유지되어 영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하비불라 대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아프간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들기 시작하여 아프간은 오스만 투르크와 독일을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오스만과 독일과의 여러 차례 교류와, 영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프간을 방어해낼 여력이 없음을 알은 하비불라 칸은 아프간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부활시킬 꿈을 꾸었다. 이에 하비불라는 영국에게 이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하고, 1919년 2월 하비불라는 암살당한다.

하비불라가 암살당한 이후 그의 동생인 나스랄라 칸(Nasrullah Khan, 1874 ~ 1920)과, 하비불라의 셋째 아들이었던 아마눌라(Amanullah)도 아미르를 칭하면서 이 둘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보수파가 나스랄라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띈 개혁파가 아마눌라를 지지했는데, 아마눌라가 분쟁에서 이기고 나스랄라를 구금하는데 성공했다.[13] 하지만 나라는 극히 불안정했고 보수파들은 공공연히 쿠데타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내부 불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마눌라는 1919년 4월까지는 이 불만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내었는데 바로 영국령 파키스탄과 인도를 침공이었다. 무작정 침공한건 아니고 1919년 4월 13일에 벌어진 암리차르 대학살(Amritsar massacre)로 인도 내부가 불안정한 기운을 보이자 이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5만명의 병력으로 구성한 아프간군과 8만명으로 구성된 부족 민병대가 구성되어서 침공을 시작했다.

비록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 우월하다고는 하나, 이미 영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상당한 군인과 장비를 소모한 상태였기에 잘 해본다면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14] 초기에는 이를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군이 상당히 진군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반격과 아프가니스탄군 사이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간군은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여러 부족들의 민병대를 규합해서 모은 연합부대의 성격에 가까웠기에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부족의 족장들을 국왕이 통제하지 못하다 보니 단합력도 떨어졌다. 즉 국왕의 중앙 직속군 5만명을 빼면 나머지 8만명은 지멋대로 놀아제꼈다는 소리다. 게다가 영국군은 항공기를 운용하는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군이 당시 항공기술력 한계는 있었기에 타격은 적었지만 아프간군에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고 영국군에는 심리적 사기상승을 불러왔었으며 영국군 자체도 당시 현대화된 무기로 무장한터라 아프간군 5만의 중앙군을 제외하면 뒤쳐져있는 상태의 무장력이었던데다가 중앙군조차도 질적인 면에서 영국군에게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결국 아프가니스탄군은 1.2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나중에는 전세가 아프가니스탄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둘 다 싸움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전투를 끝으로 양측이 라왈핀디에서 회담을 가져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며 떠났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리도 원하는 완전한 주권국이 될 수 있었지만, 장기간 식민통치를 받고 독립전쟁을 치르며 큰 타격을 입었고 영국이 보내주던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도 사라져 한동안 재정난을 겪어야만 했다.

3. 대중매체 속 모습

셜록 홈즈영원한 파트너 존 왓슨 박사가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 노섬블랜드 보병 연대[15]의 군의관으로 배속되어 1880년 2차 아프간 전쟁 때 실제로 있었던 마이완드 전투(Battle of Maiwand)에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묘사되었다. 이후 병에 걸려 고생을 하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전역했다.[16] 참고로 이 마이완드 전투에서 영국군은 패배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대역전재판의 에피소드인 나와 안개 낀 밤의 모험의 등장인물 존 개리뎁도 이 전쟁의 마이완드 전투에서 무릎에 탄환을 맞아 훈장을 받고 은퇴했다는 설정이다. 존 왓슨의 오마주.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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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1차 영국-아프간 전쟁은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벌이던 시기, 동시에 벌어졌고, 마지막 3차 영국-아프간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는 것이다! 전쟁 기간만 합치면 제일 적지만, 가장 오랜 기간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2] 파슈토어 이름은 امير دوست محمد خان[3] 정확하게는 1841년 4월과 10월에 이미 지방 부족들이 산악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소규모 전투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4]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집권하면 반대파를 이용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훗날 동인도 회사는 악바르의 몸값 요구를 거절했고 결국 이들 여성들과 아이들은 아프간에서 노예로 팔리던지 죽거나 입양되는 등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게되었다.[6] 당대에는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져 있었고 특히 엘리자베스 버틀러(Elizabeth Thompson, 1846 ~ 1933) 부인이 그린 <그루터기의 군대>(Remnants of an Army)를 통하여 유명해졌으나 인질들이 돌아옴으로서 유일한 생존자는 아니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물론 철수단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맞긴 하다.[7] 엘핀스톤이 이끌었던 영국 철수대열의 전멸을 파악하고 있었다.[8] 거의 산 정상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공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극악의 산악전을 한 셈이었다.[9] 당시 영국령 인도정부는 페르시아가 러시아의 영향권에 흡수되는 걸 막기위해 적잖은 돈을 쓰고 있었고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전쟁으로 러시아에게 개박살난 페르시아가 러시아에게 흡수되는걸 막고자 페르시아의 배상금을 자신들의 재정으로 긴급재정지원을 하고 있었다.[10] 더욱이 이 시점에서 악바르에게 잡힌 영국인 114명외 세포이 인도계는 잔혹하게 학살된 상태로 힘든 상태였다.[11] 플록의 군대는 9월 15일 이틀뒤에 입성한다.[12] 주로 인도인들로 구성된 세포이들이었다.[13] 삼촌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14] 그래도 영국군은 8개 사단 5개 독립여단 3개 기병여단으로 구성되어있었기에 숫적으로도 의외로 만만치는 않았으며 당시 현대적인 포병과 항공기 및 기관총등으로 현대화되어서 무장된 군대였다.[15] 가상의 영국군 부대로 마이완드 전투 기준으로 본다면 모티브상 제66보병연대 버크셔 연대로 추정된다.[16] 전역 이후 하숙집 방세를 아끼려고 룸메이트를 찾다가 셜록 홈즈를 소개받는 것이 전설시작이다. 그리고 100여년 뒤 21세기 새롭게 창작된 존 왓슨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군인이다. 작가 역시도 비극이라 인정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