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 잉글랜드 | ||||
고대 | 켈트족 | ||||||||
히베르니아 ,게일족, | 칼레도니아 ,픽트족, | ,브리튼족, 로만 브리튼 ,이후, | |||||||
귀네드 왕국 | 더베드 왕국 | 앵글족 / 색슨족 / 주트족 | |||||||
칠왕국 {{{-1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8b0000; font-size: 0.88em" | |||||||||
데인로 | 웨식스 | ||||||||
중세 | 알라퍼 왕국 | 데허이 바르스 |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 북해 제국 노르만 왕조 앙주 왕조(앙주 제국) 플랜태저넷 왕조 | ||||||
아일랜드 영지 | |||||||||
스코틀랜드 왕국 | 웨일스 공국 | ||||||||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장미 전쟁) | |||||||||
아일랜드 왕국 | |||||||||
초 기 근 대 | | ||||||||
근 대 | |||||||||
아일랜드 왕국 | 스코틀랜드 왕국 | ||||||||
| |||||||||
현대 | 아일랜드 공화국 아일랜드 자유국 |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윈저 왕조 | |||||||
아일랜드 |
칠왕국 구성국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앵글족 | 노섬브리아 | 머시아 | 동앵글리아 |
색슨족 | 웨식스 | 서식스 | 에식스 | |
주트족 | 켄트 | }}}}}}}}} |
켄트 왕국 Cantaware Rīce Kent | |||
국장 | |||
455년[1] ~ 871년[2] | |||
위치 | 잉글랜드 남부 | ||
수도 | 캔터베리 | ||
언어 | 고대 영어, 라틴어 | ||
종교 | 게르만 종교 → 기독교 | ||
종족 | 앵글로색슨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행기스트 (? ~ 488년) 에쉬 (488 ~ 502년) 켄트의 애설버트 (589년 ~ 616년) 에드베르트 1세 (725년 ~748년) 애설레드 (866년 ~ 871년) | ||
성립 이전 | 로만 브리튼 | ||
멸망 이후 | 웨식스 |
언어별 명칭 | ||
고대 영어 | Cantaware Rīce / Cent | |
라틴어 | Regnum Cantuariorum | |
영어 | Kingdom of Kent |
[clearfix]
1. 개요
주트족이 브리튼 섬에 세운 칠왕국 중 하나다. 켄트는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이 브리튼 섬에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 410년 서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 속주를 포기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성장에 따라 거주지가 프랑크인들에게 점령당하면서 윌란 반도에서 주트족이 바다 건너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들은 켄트 서부에 상륙해 왕국을 건국했고, 6세기 초반에는 켄트 전역을 장악했다.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개의 왕국 중에서 가장 빨리 세워졌다. 지리적으로는 현재의 켄트 주와 일치했고, 수도는 '칸트와레부르흐'(Cantwareburh, 캔터베리)였다. 켄트 왕국은 5세기 중반에 건국되어 9세기 말에 웨식스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존속했다.
초기 기록이 부족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6세기 브리튼의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길다스의 저서 《브리타니아의 멸망과 정복》에 따르면 브리타니아에서 로마군이 철수한 후 브리튼인의 왕 보티건[3]이 앵글로색슨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est[4])와 호르사(Horsa) 형제를 용병으로 불러들였는데[5] 브리타니아 땅에 욕심을 가진 헹기스트 형제는 로웨나의 협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보티건을 감금하고, 통치권을 빼앗았으며, 보티건의 전처 소생 아들들인 보티머(Votimer, 보티메르)와 카티건(Catigern, 카티게른)의 반격으로 호르사는 죽었으나 결국 헹기스트가 보티머 형제를 죽이고 켄트 왕국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2. 전성기와 몰락
게르만족 토착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Cantuariensis)가 가톨릭 포교를 시작해 국왕 애델베르흐트[6]가 개종하고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인 7세기 초에는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했고, 이후에는 현재의 서리(Surrey)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나중에 브레트왈다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의 치세동안 켄트는 잉글랜드에서 4번째로 부유해졌다.그러나 그의 사후 펜다 왕 아래 최전성기를 누리는 머시아의 침공에 속국으로 전락했다.
7세기 후반 서식스의 공동왕 베르툰과 안둔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사촌인 에아드리치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곧 웨식스의 패왕 캐드왈라의 공격으로 에아드리치는 축출되고, 캐드왈라의 동생 물(Mul)이 왕위를 차지한다[7].
8세기 중반에는 머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해 명목상으로 간신히 유지되다가 나중에는 머시아의 왕 오파(Offa)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9세기경 머시아의 베오른울프(Beornwulf)와 웨식스의 에즈베르흐트(에그버트)간의 전쟁에서 머시아가 패배하자 켄트는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71년 왕위가 폐지되면서 이후에는 웨식스의 영지가 되었다.
바이킹의 침공이 점점 거세지던 9세기 초부터 켄트는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침공에 시달렸다. 804년 수도 켄터베리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고, 811년에는 켄트의 군대가 섀피 제도의 바이킹 요새를 공성하기도 했다. 그 후 50년 동안 로체스터와 켄터베리, 그리고 웨식스 해군과 연합해 바이킹과 전쟁을 벌이는 등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에 바이킹은 해안 지대에 다양한 요새를 건설해 앵글로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9세기 중반 이교도 대군세의 첫 희생양이 켄트였는데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의 최동단에 위치해있었고, 앞서 말한대로 부유했기 때문이었다. 바이킹 군대는 켄트에 상륙해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을 저지르며 동앵글리아로 진격했고, 켄트는 885년,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이 해방시킬 때까지 데인족(바이킹)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고 892년 앨프레드 대왕이 구트룸 1세를 격파하면서 켄트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북부 프랑스를 공격하던 350척 규모의 바이킹 함대가 켄트에 상륙했고, 동앵글리아의 데인족 군대도 앨프레드 대왕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앨프레드 대왕은 그 모든 침략군을 무찔렀다.
켄트는 잉글랜드 왕국으로 국호가 변경된 이후에도 여러번 데인인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1011년에 있었던 '거인' 토르켈의 켄터베리 공성전이 잘 알려져있다.
3. 기타
- 2018년 게임 토탈 워 사가: 브리타니아의 왕좌에서 웨식스 휘하의 속국으로 등장한다. 다만 고증과는 맞지 않는게, 878년 당시 켄트 일대는 데인족의 영향안에 있었고, 켄트 왕국은 871년에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1] 칠왕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다.[2]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의 치세때 웨식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3] 영어로 '보르티게른'(Vortigern /ˈvɔːrtɪdʒɜːrn/). 라틴어로 '보르티게르누스'(Vortigernus). <아서 왕 전설>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인물인 보티건의 원전으로 여겨진다.[4] hendʒest[5] 보티건은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와 결혼하여 결혼동맹까지 맺었다고 한다. 참고로 기록에 의하면 이 형제의 아버지는 윅트길스(Wictgils), 할아버지는 위타(Witta), 증조할아버지는 웩타(Wecta), 고조할아버지는 워덴(Woden), 즉 오딘이다.[6] 고대 영어로 Æthelberht. 애설버트. 재위 589년~616년[7] 이후 캐드왈라는 서식스를 공격해 두 공동왕을 죽이고 서식스를 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