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24 01:38:51

영국 내전

1. 개요2. 전개
2.1. 스코틀랜드반란2.2. 잉글랜드 내전2.3. 커먼웰스 수립과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평정

British Civil War / Wars of the Three Kingdoms

1. 개요

1639년부터 1651년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섬아일랜드 섬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이다.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을 아우르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삼왕국 전쟁(Wars of the Three Kingdoms)이라고도 한다.

흔히 청교도 혁명으로 불리는 잉글랜드 내전은 이 영국 내전의 일부이다.

2. 전개

2.1. 스코틀랜드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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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인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 의회와 큰 갈등을 빚었다.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1629년에 강제로 해산당했다.

그러던 중에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교회를 신봉하게끔 강요했다. 찰스 1세는 윌리엄 로드 추기경을 필두로 한 성공회식 전례와 주교제도를 스코틀랜드에 강제하려 했고, 결국 분노한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유력 목사들, 에딘버러와 다른 로우랜드의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동맹했던 개신교계 클랜들이 1638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1] 교회에 모여 <국민 언약>[2]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동맹을 선포하고 봉기를 일으켜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고, 찰스 1세의 왕권에 정면 도전했다.

2.2.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는 이에 대항해 군대를 보내고 군자금에 쓸 세금을 걷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며 왕권을 더 약화시킬 걸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왕이 요구한 반란 진압 예산 책정은 무시하며 각각 찰스 1세의 종교적, 정치적인 면에서 오른팔, 왼팔 역할을 수행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하여 사형에 처했다.

대노한 찰스 1세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개긴 의원 다섯 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갔으나 이들은 모두 도망쳤고, 찰스 1세를 본격적으로 못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없이 홀로 <민병대 소집법>(The Militia Ordinance)을 통과시켜 버렸다. 당시 수도 런던에서는 왕당파보다 의회파 세력이 컸기 때문에 찰스 1세는 일부 자신을 지지하는 의회 의원[3]들과 함께 런던을 떠났고, 의회파의 공격에 맞불을 놓기 위해 의회의 비준없이 <군열 위임령>(Commissions of Arrays)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잉글랜드 내전 참조.

한편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바다 건너 서쪽 아일랜드에서도 대규모 유혈 폭동이 발발하여 10만~20만명의 잉글랜드인들이 대량학살당하고, 신교도 교회가 불태워졌다. 또한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네덜란드을 시집보내면서 귀금속을 담보삼아 사채를 빌리고 이 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하여 10,000명의 병력을, 또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독립을 내세우며 꼬드겨 10,000명의 병력을 지원받으려고 했다.

2.3. 커먼웰스 수립과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평정

잉글랜드 내전은 결국 의회파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의 목을 치는 것으로 끝났다.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질시했으며,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의 뒷통수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던바 전투와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에게 대파당했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 정복당했다. 크롬웰 본인은 당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에서 일반적인 태도였던 의심으로 스코틀랜드를 대했으나, 일단 사상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신교 급진파이고, 전쟁 막판 전까지는 동맹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이후 딱히 정치 보복을 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크롬웰은 자신들에게 뒤통수를 치려 했던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토착 세력은 영국 내전 당시 사실상 잉글랜드에서 독립하고 자체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을 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자, 크롬웰은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통제불능이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고자 아일랜드에 출병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에 친정을 단행했는데 처음엔 농민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이때 살인방화, 약탈을 동반하여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던 20~30만명 가량이었다. 이 전란 중 가장 잔인했던 사건이 바로 드로이다(Drogheda[4]) 공성전으로, 1649년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 함락이 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 남녀노소 2,000명을, 그것도 민간인학살한 사건이다.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자행한 무자비하고 냉혹한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뿌리 깊은 상처를 안겼다.


[1] Greyfriars, 즉 '회색 수도자'란 뜻으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진 교회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첨언으로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의 본명인 '톰 리들'은 이 교회 공동묘지터에 있는 'Thomas Riddell'이란 사람의 비석에서 롤링 여사가 따온 것이라고 한다.[2] <National Covenant>. <헤일로>에 나오는 그 코버넌트가 맞다. 원래 《구약성경》의 유대 민족과 야훼 사이의 계약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이렇게 자기 나라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자칭하며, 구약적 민족주의, 반가톨릭 반보편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3]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도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4] 원체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이 엉망이라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찾아본 결과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라고 읽는다고 한다. 굳이 한국어로 전사한다면 '드라허다' 혹은 '드러더' 정도. 한국에서는 '드로이다'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위키피디아도 '드로이다'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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