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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올랑드 | 에마뉘엘 마크롱 |
성명 | 가스통 3세 드 푸아 Gaston III de Foix | |
별명 | 페부스 Fébus | |
출생 | 1331년 4월 30일 | |
프랑스 왕국 베아른 자작령 오르테즈 | ||
사망 | 1391년 8월 1일 (향년 60세) | |
프랑스 왕국 베아른 자작령 로피탈도리온 | ||
아버지 | 가스통 2세 드 푸아 |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드 코밍즈 | |
형제자매 | 아르노 길헴 드 베른(사생아), 베르네세(사생아), 피에르(사생아), 마르그리트(사생아) | |
배우자 | 나바라의 아녜스 | |
자녀 | 가스통, 베르날(사생아), 이베인(사생아), 그라티엔(사생아) | |
직위 |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안도라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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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안도라 공(프린스).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과의 사이에서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해 전쟁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의 이득을 확보했으며, 탁월한 내치와 전술 역량을 발휘해 남프랑스 최강의 귀족으로 군림했다.2. '페부스'(Fébus)
페부스(Féb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태양신인 아폴론의 별칭인 포이보스(Phoibos)에서 유래한 용어다. 가스통 3세가 이것을 별칭으로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하나는 그의 금발 머리가 태양신 아폴론을 연상시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폴론처럼 탁월한 사냥꾼임을 과시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는 튜튼 기사단에 참여해 고대 프로이센에서 십자군 활동을 수행했을 때 "페부스 아반(Febus aban)!"이라는 함성을 외치며 전투에 임했다고 하며, 프랑스로 돌아온 뒤 모앙브리 공방전에 참여했을 때도 이 함성을 외쳤다고 전해진다.1360년 4월 16일 공식 문서에 서명할 때 페부스를 포함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공식 문서에 서명할 때 페부스를 반드시 썼다. 또한 동전을 주조할 때 'Febus Comes'라는 문구를 넣었으며, 한 요새에 'Febus me fe'라는 이름을 붙였다. 1387년 <사냥의 서(Livre de chasse)>의 서문을 썼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 신의 은총으로 페부스라는 별명을 얻은 가스통, 푸아 백작, 베아른의 영주."
가스통 3세는 이외에도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Toquey si gauses(감히 도전하고 싶다면 건드려봐라)"를 모토로 삼았다. 이 문구는 현재도 가스통 3세의 출생지인 오르테즈 시의 모토로 사용되고 있다.
3. 외모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의 외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나는 그동안 많은 기사, 왕, 왕자들을 봤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팔다리, 그토록 아름다운 외모,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 아름다운 얼굴, 낙관적이고 웃는 얼굴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눈은 녹색이었으며, 체격과 키 모두 아름다웠으며, 머리는 금발이었다.
제프리 초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의 특징을 설명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다."
4. 생애
4.1. 푸아베아른 가문
가스통 3세가 속한 푸아베아른 가문은 1252년 푸아 백작 로제 베르나르 3세와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의 딸인 마르그리트가 결혼하면서 탄생했다. 이 가문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분열된 영토를 지배했다. 피레네 산맥 서쪽으로는 베아른, 마르상, 가르바단, 캡티외를 지배했는데, 이 지역은 아키텐 공국에 속했기에 자연히 아키텐 공작을 겸임한 잉글랜드 국왕을 주군으로 섬겼다. 피레네 산맥 동쪽으로는 푸아 백국, 도네잔, 로트레크 자작령, 알비주아 저지대를 지배했는데, 해당 지역은 프랑스 왕국에 속했기에 프랑스 국왕을 주군으로 섬겼다. 또한 푸아베아른 가문은 우르헬 주교와 공동으로 안도라의 공(프린스)이었다. 서부와 동부 사이에는 네보장이라는 작고 고립된 중앙 지역을 점유했는데, 푸아베아른 가문은 이곳을 서쪽 영지와 동쪽 영지의 축으로 삼았다.
4.2. 초년기
1331년 4월 30일, 베아른 자작령의 오르테즈에서 출생했다. 그는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안도라 공을 맡고 있던 가스통 2세 드 푸아와 코밍즈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인 엘레오노르 드 코밍즈의 외아들이었다. 가스통 2세에게는 네 명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이중 아르노 길헴과 피에르는 가스통 3세와 동일한 체육 및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지적 및 예술 교육은 가스통 3세만 받았다. 훗날 아르노 길헴과 피에르는 가스통 3세의 충실한 군 사령관 및 고문으로서 활약했다.1343년 9월 26일, 아버지 가스통 2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마린 왕조 안달루스 총독부의 거점인 알헤시라스를 포위 공격했을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 후 가스통 3세는 12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2년간 섭정했다. 1343년 12월, 엘레오노르와 가스통 3세는 모든 영지를 순행해 영주, 농민, 부르주아 대표들을 만났고, 역대 선조처럼 그들의 자유와 관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순행은 1345년 1월까지 1년간 지속되었다.
1345년 4월 30일, 가스통 3세는 법적 성년에 도달한 후 어머니로부터 정부를 물려받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백년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그는 초기에는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6세를 지지했지만, 직접적인 군사 활동을 벌이는 걸 자제했다. 그러던 1346년 8월 26일, 프랑스군이 크레시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필리프 6세에 대한 충성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1347년 6월 3일, 필리프 6세는 아미앵에서 가신들을 소집해 충성 서약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소환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1347년 9월 25일, 필리프 6세 의 사절이 오르테즈를 방문해 가스통 3세에게 프랑스 국왕에게 복종할 것인지를 물었다. 가스통 3세는 푸아 백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겠지만, 베아른은 신으로부터 소유하되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소유하지 않는다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분쟁에서 베아른 자작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필리프 6세는 가스통 3세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전해듣고, 그가 잉글랜드 진영으로 확실히 넘어갈 것을 우려해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노력했다. 1348년 12월 26일, 가스통 3세는 파미에, 아쟁, 툴루즈, 카르카손 등지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베아른 자작으로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필리프 6세는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주권을 암묵적으로 확인했다. 1349년 8월 4일, 가스통 3세는 나바라 공동 국왕 필리페 3세와 호아나 2세의 딸 아녜스와 결혼함으로써 나바라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4.3. 1350년대의 행적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남 장 2세가 새로운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이후 중세 흑사병으로 중단되었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1351년 4월부터 재개되었다. 1352년 10월, 툴루즈 세네샬은 가스통 3세에게 라프랑세즈 요새에 배치된 잉글랜드군으로부터 툴루즈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가스통 3세는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툴루즈의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1353년 10월 그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이 오르테즈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복형제 아르노 길헴이 이를 진압했다. 이후 가스통 3세는 오르테즈로 가서 농민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내렸다.1355년 보르도에 상륙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약탈행진을 감행해 아르마냐크, 툴루즈 지역을 휩쓸었다. 그는 이전에 툴루즈를 지키기로 약속했지만, 흑태자 에드워드가 몸소 이끄는 강력한 잉글랜드군을 대적할 생각이 없었기에 방관하는 쪽을 택했고, 잉글랜드군도 굳이 그의 영지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푸아 백작령을 가로지르러 하자, 11월 17일 직접 잉글랜드군 진영에 찾아가서 잉글랜드인들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고 식량을 제공하며, 부하들을 에드워드의 군대에 배속시키는 대가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이에 장 2세는 그가 잉글랜드 왕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1356년, 장 2세는 베아른 자작으로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거부한 가스통 3세를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와 함께 잉글랜드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뒤 쁘띠 샤틀레에 몇 달간 감금했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가 또다시 슈보시를 감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 2세는 푸아베아른 가문이 잉글랜드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1356년 9월 19일,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참패하고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하고, 1358년 2월 9일 사촌인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함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튜튼 기사단에 가담한 뒤 고대 프로이센에서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페부스'라는 별명과 전투 함성 "페부스 아반(Febus aban)", 모토 "Toquey si gauses(감히 도전하고 싶다면 건드려봐라)"를 창안했으며, 말보르크 성에서 튜튼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358년 6월 프랑스로 돌아와서 샬롱앙상파뉴에 이르렀을 때, 자크리의 난으로 인해 수많은 귀족이 피살당하고 있으며 노르망디 공작부인과 오를레앙 공작부인을 포함한 귀족 부인들이 모앙브리에서 농민 반란군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스통 3세는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함께 이 여인들을 돕기로 마음먹고, 40명의 기사와 함께 모앙브리로 질주했다. 1358년 6월 9일, 그는 모앙브리를 포위하고 있던 농민 1,000명을 격파하고 귀족 여인들을 구원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이 일화를 기술하면서, 두 사람을 기사도의 화신이라고 극찬했다.
4.4. 루나크 전투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는 베아른 자작령의 소유권을 놓고 가스통 3세의 아버지인 가스통 2세 드 푸아와 몇 차례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자기 딸 잔을 베리 공작이자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인 장 드 베리와 결혼시키면서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되자, 가스통 3세는 그가 장차 프랑스 왕실을 등에 업어 베아른 자작령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들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1359년 3월 아르마냐크 백작령에 일련의 습격 작전을 벌이는 한편, 장 2세를 대신해 프랑스 국정을 도맡고 있던 도팽 샤를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힘으로써 프랑스 왕실이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했다.1360년 5월 8일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조국으로 돌아오는 대가로 여러 인질이 잉글랜드에 넘겨졌는데, 그 중엔 장 드 베리도 있었다. 그는 이때를 틈타 아르마냐크 백작가와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1362년 12월 5일, 루나크에서 양군이 격돌했다. 아르마냐크 가문의 군대는 아르마냐크 백작령 출신의 남성, 알브레 가문과 같은 일부 강력한 가스코뉴 귀족 가문에서 파견한 군대, 그리고 자유 용병대로 구성되었으며, 가스통 3세는 이에 맞서 푸아 백국에서 양성한 군대에 가스코뉴의 소규모 영주들이 보낸 군대와 독일 용병대, 잉글랜드 용병대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날 벌어진 전투 결과, 가스통 3세가 완승을 거뒀고 장 1세 다르마냐크는 생포되었다.
이후 장 1세 다르마냐크는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300,000플로린에 달하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가스통 3세는 이외에도 900명에 달하는 기사들로부터 몸값을 일일이 받아냈는데, 그 액수가 600,000플로린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아르마냐크 가문은 가스통 3세가 살아있는 동안 베아른 자작령 소유권을 놓고 도전하지 못했고, 가스통 3세는 루나크 전투 승리를 기념해 자신의 영지 전역에서 매년 12월 5일에 루나크 전투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장 프루아사르는 루나크 전투 28주년 축하 행사에 초대되어 종교 행렬과 엄숙한 잔치를 기록했다.
4.5. 흑태자 에드워드와 가스통 3세
1363년 6월 29일, 아키텐 공국을 통치하기 위해 보르도에 도착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브레티니 조약을 통해 확보한 영토의 영주들로부터 경의를 받아내려 했다. 그의 영지는 아키텐 공국에 속했기에, 그 역시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국왕의 가신이기도 했기에,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경의를 표했다간 다른 한쪽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다. 이에 그는 시간을 끌기로 마음먹고, 1363년 3월 오르테즈에 찾아온 잉글랜드 사절에게 경의를 표하러 갈 생각이 있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것부터 처리하고 가겠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그렇게 1363년 내내 경의를 표하기 위한 여행을 피했지만, 1364년 1월 14일에 마침내 에드워드 왕자를 만나기 위해 아쟁으로 향했다.아쟁에 도착한 가스통 3세는 에드워드 앞에서 '아키텐 공국 내부'의 모든 영지의 지배자로서 경의를 표했다. 이에 에드워드 왕자의 친구이자 최측근인 존 챈더스는 그에게 "베아른 땅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전 마르상과 가르바단의 영주로서만 경의를 표했습니다. 다만 기록 보관소에서 베아른도 아키텐 공국에 속한다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베아른 영주로서도 경의를 표할 의사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그가 자신을 기만하려 든다고 여기고 체포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일단 돌려보냈다. 이후 잉글랜드인들은 기록 보관소를 뒤져본 끝에, 1290년 마르그리트 드 베아른이 아키텐 공작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를 근거로 그에게 베아른 영주로서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만 사정상 아키텐으로 당장 가기 어렵다"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계속 버텼다. 이에 화가 난 에드워드 왕자는 1365년 12월 6일에 그에게 서신을 보내 필요한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가스통 3세는 이 서신을 프랑스 왕실에 보내며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청원했다.
1366년, 가스통 3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사생아인 베르날을 참가시켜서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도록 지원했다. 이후 흑태자 에드워드가 프랑스군에 축출된 카스티야 전임 국왕 페드로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자, 가스통 3세는 베르날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지켜봤다. 에드워드는 나헤라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생포하고 엔리케 2세를 축출해 페드로 왕을 복위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이질이 나도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을 잃은 데다 본인도 이질에 걸린 채 아키텐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1367년 여름, 가스통 3세는 에드워드 왕자를 따르는 분견대가 베아른을 지나가는 걸 허용하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이에 수반되는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 이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가스통 3세가 베아른의 독립 영주임을 인정했다는 걸 암시하는 대목이다.
4.6. 남프랑스 최강의 영주
1367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형제 루이 1세를 툴루즈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1369년 1월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발발하고 아키텐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다. 그는 수년간 어느 한쪽도 돕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지만, 전세가 프랑스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데다 아르마냐크 가문이 프랑스군을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지난날 잉글랜드군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되찾아가자, 이러다가 아르마냐크 가문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베아른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품었다.1374년 3월 19일, 가스통 3세는 닥스에서 곤트의 존과 접견했다. 그는 12,000 플로린을 곤트의 존에게 대출해주는 대가로 루르드 성을 담보로 가지기로 했다. 여기에 자신의 유일한 적출자인 가스통과 곤트의 존의 딸인 필리파와의 결혼을 논의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국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기에, 결혼 협의를 일부러 질질 끌었다. 1375년 10월 15일, 코밍주 벡작 피에르레몽 2세가 사망했다. 그는 어머니 엘레오노르 드 코밍주를 통해 상속권을 주장했고, 아르마냐크 가문과 알브레 가문은 피에르레몽 2세의 후계자인 잔을 지지했다. 1376년 11월, 양자는 카제르쉬르라두르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가스통 3세가 승리를 거뒀고, 장 2세는 생포되었다.
그 후 루이 1세가 개입해 타르브에서 평화 협상을 벌이도록 중재했다. 이때 루이 1세는 가스통 3세를 "푸아 백작이자 베른의 영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평화 협상 결과, 가스통 3세는 100,000 프랑의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1377년 2월 3일, 가스통 3세의 아들 가스통과 장 2세 다르마냐크의 딸인 베아트리스 사이의 결혼을 합의하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추가 협상이 줄곧 이어진 끝에, 1379년 4월 3일 마르상과 아르마냐크 국경에 있는 바르셀론뒤제르에서 최종 합의가 체결되었다. 가스통과 베아트리스의 결혼은 1379년 4월 19일 망시엣에서 거행되었다.
1379년 푸아베아른 가문의 영역.
이 일련의 협약을 통해, 가스통 3세는 푸아와 베아른의 소유를 완전히 인정받았으며, 모브장과 구동의 영지를 세습적으로 인수함으로써 네보장을 서쪽으로 확장해 이번 전쟁으로 새로 확보한 비고르와 연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후 가스통 3세는 1379년 여름 동안 비고르 공동체 사이에 26개의 협약을 체결해,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주권을 인정받았으며, 1379년 11월 27일에 타르브를 마지막으로 양도받았다.
4.7. 내치
가스통 3세는 비상시에 대비해 군대를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약 4,000명의 병력과 1,000마리 이상의 말로 구성된 군대를 베아른과 푸아 사이에 균등하게 나누어 동원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군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세입을 최대한 확보하려 노력했다. 1365년부터 현물이나 금전으로 징수된 모든 로열티를 장소별로 조사하기 위해 "개혁"을 수행했다. 특히 숲과 산과 관련해 국가 행정을 개혁했으며, 오르테즈 다리 등 주요 통행길에 통행료를 부과했다. 또한 아키텐과 이베리아 무역에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특히 모를라스 광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금을 채굴해 플로린 주조에 사용하도록 했다. 1367년에는 각 가정이 매년 2프랑의 난로세를 지불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다른 영주들에게 여러 차례 대출을 제공한 뒤 그들로부터 이자를 받아냄으로써 재산을 축적하면서,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다.그가 동원할 수 있는 4,000명의 군대는 프랑스 남부의 다른 귀족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넘어서는 병력이었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이 크레시 전투 또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동원한 7,000 ~ 10,000명 가량의 대군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 및 잉글랜드군과 직접적인 교전을 회피했으며, 외교술을 동원해 양자 모두의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 자치를 인정받았다. 사실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 모두 가스통 3세가 양성한 군대가 상당한 강군이라는 걸 인식했기 때문에, 그가 상대방의 편에 서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중립을 지키도록 내버려뒀다.
그는 자신이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실제로 전투에 투입하는 것보다는 단지 과시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잘 알았기에,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만 전투를 벌였다. 그래서 50년에 달하는 치세 동안 단 3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이를 통해 확실한 이득을 챙겼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적군이 영지에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따라 소울에서 푸아까지 40개에 달하는 요새를 세웠다.
4.8. 사냥에 대한 열정과 문학 활동
가스통 3세는 당대 최고의 사냥꾼으로 여겨졌다. 모아삭 연대기는 그가 수천 마리의 사냥개를 보유했다고 밝혔다. 그의 성인 몽케이드 성은 사슴과 휴경 사슴 공원으로 둘러싸였으며, 큰 홀은 동물 그림과 사냥 트로피로 장식되었다.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와 흑태자 에드워드는 그에게 사냥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1387년부터 1390년까지 비서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냥의 서(Livre de chasse)>를 집필한 뒤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헌정했다. 이 책은 중세 사냥 문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명확성과 전문성 때문에 유럽 전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냥은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은 건강을 보장하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고, 천국의 문을 열어준다고 주장했다.가스통 3세는 이외에도 문학가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프랑스어,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시, 종교 문학, 과학 작품을 여러 편 작성했다. 37개의 기도문 모음집인 <기도의 서(Livre des oraisons)>를 썼는데 , 그 중 처음 3개는 라틴어로, 나머지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오르테즈에 도서관을 설립했다. 이 도서관에는 스콜라 철학의 거두인 바르톨로메우스 앵글리쿠스의 엘루시다리(Elucidari), 중세 최고의 외과 의사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알 자라위의 '수술'을 랑그독어로 번역한 책이 보관되었으며, 대 플리니우스, 오비디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 고대 로마 저자들의 저서들도 보관했고, 보베의 빈세트의 백과사전인 <Speculum maius(더 큰 거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보관되었다.
4.9. 베아른 음모와 아들 가스통의 비극
가스통 3세는 연이은 성공을 거두면서 점점 더 강력한 권위를 갖췄고, 영지 내에서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열리던 의회를 더 이상 열지 않았고, 고정된 구성원 없이 추밀원을 세웠으며, 순행 중에 언제나 교체할 수 있는 보안관들을 선임했다. 그는 추밀원에 가족을 우선 배치했고, 그 다음으로 많은 법학자들을 선임해 국정 전반을 다스리게 했다. 반면 지역 귀족들은 일부 직위를 얻는 것 외에는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는 푸아 백국의 관리는 세네샬에게 맡겼지만, 베아른은 직접 통제했다. 이렇듯 절대군주로 군림한 그에게, 베아른 귀족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자치권이 훼손되었다고 여기고 깊은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곧 가스통 3세를 베아른에서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베아른 귀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남부 프랑스 최강의 귀족인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포섭한 인물은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였다. 이보다 앞서, 가스통 3세는 아내로 카를로스 2세의 누이 아녜스를 두었지만, 아녜스가 1362년 9월 아들 가스통을 낳은지 3개월 후인 1362년 12월 아녜스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궁정에서 추방했다. 아녜스가 시인 기욤 드 마쇼와 불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녜스의 지참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것에 가스통 3세가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녜스는 개인 리넨만 챙긴 채 팜플로나로 피신했고, 왕관, 보석, 매달린 태피스트리 및 기타 품목을 포함하여 자신이 잃어버린 소유물을 나열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카를로스 2세는 누이를 쫓아낸 가스통 3세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프랑스 왕국의 정치에 정력적으로 활동하느라 정신없었기에 오래도록 개입하지 않다가, 1378년 여름부터 베아른 귀족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가스통 3세의 유일한 적출자였던 가스통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는 한때 곤트의 존의 딸 필리파의 결혼 대상으로 거론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1376년 아버지의 원정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스통 3세의 사생아인 베르나르와 이베인이 버젓이 주요 직책을 맡은 데 비해, 가스통은 아무런 직책도 맡지 못했고, 정치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평생 모르고 자라게 한 것도 그가 아버지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급기야 1380년, 가스통은 음모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술잔에 독약을 투여해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
그러나 가스통의 계획은 실행 직전에 발각되었고, 오르테즈의 몽케이드 성에 투옥되었다. 음모의 주동자인 레스카 주교 오돈 드 멘두스와 안두인 남작 등은 나바라 왕국에 망명했다. 1380년 8월 중순, 가스통 3세는 자신의 유일한 적법한 후계자인 가스통을 살해했다. 이후 오르테즈를 떠나 파우로 가서 그곳에 지내다가 4년 뒤 오르테즈로 돌아갔다.
4.10. 말년
1380년 9월 18일, 샤를 5세가 급사하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새로운 왕은 너무 어려서 통치할 수 없었고, 삼촌들이 국정을 이끌었다. 그 중 한 사람인 베리 공작 장 드 베리가 1381년 6월 랑그독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이에 가스통 3세는 혹시나 장 드 베리가 아르마냐크 가문을 지원해 자신의 영지를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무력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는 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악착같이 거두는 세네샬 3명을 약탈자라고 비난하면서, 랑그독 주민들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원을 해제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세네샬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1381년 7월 21일, 그의 군대는 라바스텐에서 2,500 가량의 자유 용병대를 쳐부쉈다. 이 용병대는 베리 공작의 깃발을 내세워서 자기들이 베리 공작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그들을 쳐부셨으니 파장이 심히 컸다. 랑그독 주민들이 가스통 3세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장은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군의 공세로 랑그독 각지에서 심각한 약탈이 발생하자, 가스통 3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1381년 12월 28일 카페스탕에서 장과 협상한 끝에 타협안을 마련했다. 가스통 3세는 베리 공작이 아르마냐크 가문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대가로 베리 공작이 랑그독 보안관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고, 65,000 프랑을 즉시 왕실에 지불했다. 가스통 3세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랑그독 주민들은 항복하고 베리 공작에게 복종하는 대신 자신들을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배상해달라고 요청했고, 프랑스 왕실은 이를 받아들였다.
1388년, 샤를 6세는 20세의 나이가 되자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거의 100년 동안 프랑스 국왕이 방문하지 않았던 프랑스 남부를 순행하기로 했다. 1389년 9월 2일, 샤를 6세는 론 계곡을 내려가서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1390년 1월 5일, 툴루즈에 도착한 샤를 6세는 가스통 3세의 알현을 받았다. 가스통 3세는 왕을 극진히 대접했고, 왕의 신하들과 협의한 끝에 툴루즈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6세는 비고르의 종신 연금 및 툴루즈의 연간 수입 100,000 프랑을 수령하며, 비고르와 툴루즈의 수혜자가 되는 대가로, 가스통 3세가 비고르와 툴루즈의 주권자임을 확인했다. 또한 자신의 친척인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이 영지와 직위를 물려받는 게 껄끄러워서 샤를 6세에게 자기 재산이 왕실에 돌아가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1390년 5월 15일과 6월 10일 파미에르와 지로나에서 아라곤 왕국의 국왕 추안 1세와 접견해 아르마냐크 가문에 대항하는 동맹 계약을 협상했다.
1391년 8월 1일, 가스통 3세는 소베테레 지역에서 사냥을 마친 후 소베테레와 오르테즈 사이의 도로에 있는 로피탈도리온에서 식사했다. 그날 식사에 참석한 에스판 뒤 리옹의 증언을 수집한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가스통 3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손을 씻던 중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의자에 거꾸로 엎어진 후 "나는 죽습니다. 주님, 참되십니다. 신이시여,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중얼거린 후 숨을 거뒀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의 유해는 소베테레 성에 이송된 후, 1391년 8월 2일 아침에 오르테즈로 옮겨졌고, 1391년 10월 2일 오레테즈의 설교자 수도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뒤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정해진 후계자가 없었기에, 6촌인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이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5. 가족
- 나바라의 아녜스(1334 ~ 1396): 나바라 왕국의 공동 국왕 필리페 3세와 호아나 2세의 딸. 1349년 결혼, 1362년 12월 나바라 왕국으로 추방됨.
- 가스통(1362 ~ 1380): 가스통 3세의 유일한 적법한 후계자. 아버지를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된 뒤 아버지의 명령으로 살해됨.
- 사생아
- 베르날(? ~ 1381):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군장교, 초대 메디나셀리 백작.
- 이베인(1360/1361 ~ 1393): 가스통 3세가 가장 총애한 자녀였다고 전해짐. 1376년 가스통 3세의 개인 경비대에 소속되었고, 1381년 라바스텐 전투에서 자유 용병대를 격파할 때도 함께 했음. 가스통 3세가 사망한 뒤 오르테즈에 보관된 푸아베아른 가문의 보물을 확보해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대신 100,000 플로린과 가구를 회수했음. 이후 장 드 베리의 아내인 잔 도베르뉴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측근이 되었으나, 1393년 1월 28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샤를 6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들었다가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횃불을 들이대는 바람에 타 죽어버림.('발 데 아르당(Bal des Ardents)' 사건)
- 그라티엔(? ~ ?): 이름만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