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3세 드 그레일리 Jean III de Grailly | |
생몰년도 | 1330년경 ~ 1376년 9월 7일 | |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템플 탑 | |
아버지 | 장 2세 드 그레일리 | |
어머니 | 푸아의 블랑슈 | |
형제 | 가스통 드 그레일리 | |
배우자 | 알브레의 로즈 | |
자녀 | 장 드 그레일리(사생아) | |
직위 | 부흐의 카프탈, 카스티용 자작, 가터 기사단 단원, 아키텐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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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흑태자 에드워드를 따라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다.2. 생애
1330년경 부흐의 첫번째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을 역임했던 장 2세 드 그레일리와 푸앙 백작 가스통 1세 드 그레일리의 딸인 블랑슈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가스통 드 그레일리[1]가 있었다.그레일리 가문의 시조인 장 1세 드 그레일리는 본래 사부아의 제네바 호수 기슭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통치 기간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삼촌인 사보이아 백작 피에르 2세의 수행단을 따라 잉글랜드를 방문한 뒤 당시 왕위 계승권자였던 에드워드의 기사가 되었다. 그 후 베나쥬 자작으로 선임되었고, 보르도의 제염소와 도르도뉴강 통행료 취득권을 획득했으며, 가스코뉴 영지의 세네샬로 발탁되었다. 1270년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1세의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으며, 1289년 트리폴리와 아크레에서 프랑스 자원부대를 이끌고 맘루크 왕조의 공세에 끝까지 항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기옌으로 돌아왔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침공에 맞서 항전했다.
장 1세 드 그레일리 이래로, 그레일리 가문은 대대로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스코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조부인 피에르 2세 드 그레일리(1285 ~ 1356)는 카스티용 자작으로서 가스코뉴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으며,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기사로서 백년전쟁에 참여했지만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 조부가 푸아티에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까지 살아있었기에, 그는 당대 기록에 '부흐의 카프탈'로 기록되었다. 어머니 블랑슈의 집안인 푸아 백작기 역시 남부 프랑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대귀족으로, 백년전쟁 시기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중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고 양국의 갈등을 이용해 세력 확장을 꾀했다.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1348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가터 기사단을 창설했을 때 처음으로 기사단에 뽑힌 일원 중 한 명이었으며, 1350년 11월 27일에 알브레 백작 베르트랑 5세의 딸인 로즈와 결혼했다. 1350년 11월 프랑스의 새 국왕으로 등극한 장 2세가 1351년부터 생장당젤리를 공략하고 여세를 이어가 에기용을 점령한 뒤 블라에, 아브작, 기트르를 위협했다. 가스코뉴 귀족들은 잉글랜드 왕실에 구원을 청하기로 하고, 아버지 장 2세가 사절단의 대표를 맡아 런던으로 향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를 구원하기로 하고,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000명의 맨앳암즈와 11,000명의 장궁병을 맡겨 가스코뉴로 파견했다. 장 3세는 1355년 9월 20일 보르도에 상륙한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사병대를 이끌고 가담했다.
장 3세는 1355년 10월 5일부터 12월 2일까지 프랑스 남부를 휩쓸며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자행하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원정에 동행했고, 1356년 흑태자의 2번째 원정에도 동행했다. 에드워드는 브르타뉴에서 남하하고 있을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군대와 투르에서 합세한 뒤 장 2세를 무찌르려 했다. 그러나 루아르 강의 수위가 높았던 데다 프랑스군이 강에 있는 다리를 파괴하거나 요새화했기 때문에,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루아르 강을 좀처럼 건너지 못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에드워드 왕자는 투르에 도착해서 헨리가 오기를 헛되이 기다리다가, 장 2세의 대군이 밀려오는 걸 알게 되자 급히 철수했으나 푸아티에에서 따라잡혔다. 에드워드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장 2세는 지금이 적을 섬멸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묵살했다. 이후 1356년 9월 19일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3세는 가스코뉴 기마병 60명과 궁수병 100명을 이끌고 모페르튀스 언덕 뒷편을 지나서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군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고지대에 자리잡은 그는 성 조지의 깃발을 펼친 뒤 적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어서 피해를 누적시킨 뒤 친히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했다.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중기병의 후방 습격에 와해되었고,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생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휴전이 이뤄지자, 1357~1358년. 푸아 백작이자 사촌인 가스통 3세 페부스와 함께 튜튼 기사단의 십자군에 참여해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한 원정을 이끌었다. 1358년 6월 프랑스로 돌아와서 샬롱앙샹파뉴에 이르렀을 때, 자크리의 난으로 인해 수많은 귀족이 피살당하고 있으며 노르망디 공작부인과 오를레앙 공작부인을 포함한 귀족 부인들이 모앙브리에서 농민 반란군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장 3세는 가스통 3세와 함께 이 여인들을 돕기로 마음먹고, 40명의 기사와 함께 모앙브리로 질주했다. 1358년 6월 9일, 그는 모앙브리를 포위하고 있던 농민 1,000명을 격파하고 귀족 여인들을 구원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이 일화를 기술하면서, 그를 기사도의 화신이라고 극찬했다.
1361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2]의 손자인 점을 들며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둘째 딸 잔의 아들인 장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무력으로 부르고뉴 공국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장 3세는 카를로스 2세의 지원 요청을 수락하고, 나바라군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1364년 3월, 장 3세는 나바라 왕국-가스코뉴 연합군을 이끌고 나바르에서 아키텐을 거쳐 북부 프랑스로 행진했다. 한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 1,200명은 노르망디의 롤부아즈를 공격해 4월에 함락시키고 뒤이어 망트, 베르누이, 묄렁을 잇따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 3세는 카를로스에게 복종하는 도시들이 더 이상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게클랭을 격파하기로 하고, 노르망디 서부의 수비대, 메인,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1,500명을 규합한 후 게클랭에게 접근했다.
1364년 5월 14일, 에브뢰에서 출발한 장 3세의 군대는 망트를 향해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외르 강변 고지에 도착했을 때 외르 강 다리 앞 언덕에 게클랭의 프랑스군이 주둔한 것을 확인했다. 두 군대는 이틀간 두 언덕 위에서 대치했다. 그러던 5월 16일 프랑스군 일부가 다리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자, 잉글랜드 용병대장 존 주엘이 장 3세에게 게클랭이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안전한 곳으로 철수하려 하는 게 분명하니 즉시 추격해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3세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저들은 우리를 언덕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저리 나오는 것뿐일세."
그러나 존 주엘은 상관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도록 하라! 나는 전장에 뛰어들겠다!"
이후 적을 향해 달려들자, 장병들은 "성 조지!"를 외치며 뒤따랐다. 그 광경을 본 장 3세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도 빨리 언덕을 내려가자. 존 주엘 경은 나 없이는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장 3세는 일부 기병대를 다리 쪽으로 보내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한 뒤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이 언덕에서 평원으로 내려오자, 게클랭은 적이 위장 후퇴에 속은 것에 기뻐하며 외쳤다.
"우리가 오늘 내내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졌다!"
프랑스군은 게클랭의 지시에 따라 돌아서서 자신들을 쫓아오는 적과 맞붙었다. 이후 반나절 동안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때 게클랭은 브르타뉴 출신 기병 예비대에게 적 측면을 돌아서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이 명령대로 따르자,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무너졌다. 프랑스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적을 밤늦게까지 추격해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장 3세는 30명의 부하들과 함께 도끼를 휘저으며 분전했으나 끝내 사로잡혔고, 존 주엘은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오직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잉글랜드 용병대 일부만 온전히 후퇴할 수 있었다.
코르슈렐 전투에서 참패하고 사로잡힌 그는 파리로 끌려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대면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 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샤를 5세는 이를 믿어보기로 하고 석방시켰으며, 느무르 영지를 하사했다. 그러나 아키텐 공작을 맡고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국왕의 가신이었던 그가 프랑스 국왕의 가신이 되어버린 건 명백한 배신이라고 비난했고, 흑태자 에드워드를 매우 존경했던 그는 에드워드에게 사과한 뒤 느무르를 프랑스 왕실에 반납했다.
1367년 페드로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에 복위시키기 위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원정에 동행했고, 그해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좌익을 맡아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고, 지난날 자신을 생포했던 게클랭을 포로로 삼았다. 1368년 카스티야에서 귀환한 에드워드가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하자, 이에 반발한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코밍즈, 알브레 영주들이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샤를 5세는 이를 기회로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던 에드워드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장 3세가 그를 대신해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에드워드는 그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1369년 6월 27일에 비고레 백국을 하사했다.
1370년 1월 2일 존 챈더스가 사망한 뒤 아키텐 무관장 직위를 계승했고, 에드워드가 요양 생활을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에는 에드워드의 형제인 곤트의 존을 따랐다. 1372년 프랑스군이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고자 출진했지만 수비즈 요새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가 오웨인 로고치가 이끄는 웨일스 용병대의 역습으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생포되었다. 샤를 5세는 그를 풀어주면 위험하다고 여겨, 몸값을 받고 풀어주길 거부하고 파리의 템플 탑에 가뒀다. 그러면서 자신을 섬기겠다고 맹세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장 3세는 자신은 잉글랜드를 위해 무기를 들기로 맹세했다며 거부했다. 그렇게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376년 6월 8일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살아갈 의지를 잃고 음식을 거부한 끝에 1376년 9월 7일에 옥사했다.
그는 아내 로즈 달브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때문에 삼촌인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가 그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사생아 장은 아름샹보의 기사이자 부트빌의 영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