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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랑 뒤 게클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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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베르트랑 뒤 게클랭
Bertrand du Guesclin
별명 브르타뉴의 독수리
브로셀리앙드의 검은 개
출생 1320년
프랑스 왕국 브르타뉴 브롱스
사망 1380년 7월 13일
프랑스 왕국 샤토뇌프드낭동
아버지 로베르 2세 뒤 게클랭
어머니 잔 드 말레메인
형제 올리비에 뒤 게클랭 외 8명
배우자 티파인 라게넬, 란 드 라발틴테니악
자녀 벨트란 데 토레스(사생아), 게레크 데 토레스(사생아)
직위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브르타뉴 전선2.3. 이베리아 전선2.4. 프랑스의 재정복을 이끌다2.5. 최후
3. 가족4. 후대의 평가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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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기사, 장군.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맹활약해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상실했던 프랑스 영토를 대부분 탈환한 것으로 유명한 명장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20년경 브롱스의 영주 로베르 2세 뒤 게클랭과 잔 드 말레메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0형제 중 맏이였다고 전해지나, 오직 올리비에 뒤 게클랭만 알려졌다. 이 인물은 형의 원정에 항상 동행했고, 1378년 세르부르에서 잉글랜드 기사 토머스 드 캔터베리에게 생포되어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형이 사망한 뒤 롱그빅 백작의 칭호와 라 구에르쉬 드 브르타뉴의 영주권을 물려받았지만 1390년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에게 37,000골드 프랑을 받고 매각했다는 사실이 당대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게클랭의 집안은 브르타뉴의 소박한 영주 가문이었다. 사실 게클랭은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귀족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로베르가 속한 지파는 별다른 이름을 날리지 못한 방계였다. 그가 살았던 브롱스는 브르타뉴 동부 지방에 속했는데, 이 지역은 브르타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브르타뉴 서부와는 달리 프랑스 북부, 벨기에 남부, 체널 제도의 고유 방언인 오일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게클랭의 모국어는 브르타뉴어가 아니라 오일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연대기들에 따르면, 게클랭은 키가 작고, 다리가 짧고 엉성하며, 어깨는 불균형하게 넓고, 팔은 길며, 머리는 크고 둥글고 매력적이지 않고, 피부는 멧돼지처럼 검었다고 한다. 1372년에서 1387년 사이에 프랑스 왕실에서 활동한 음유시인인 요한네스 퀴벨리에(Johannes Cuvelier)가 작곡한 <용감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삶>에 따르면, 그는 렌에서 디낭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퀴벨리에는 그의 어머니는 그보다 두 남동생을 우대했고, 아버지는 그에게 기사 훈련을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등 매우 나쁘게 대했으며, 종종 마음 속으로 그가 흐르는 물에 빠져 죽기를 바랐다고 기술했다. 그러다 한 번은 아버지가 없는 가족 식사 중에 평소처럼 방 구석으로 밀려난 그가 분노로 폭발해 장남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밀쳐냈다. 어머니는 그가 무거운 탁자를 뒤집기까지 하자 단단히 혼을 내려 했다. 이때 손금으로 미래를 점치는 데 정통한 한 유대인 여성이 찾아와서 이 호전적인 아들이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거라 예언했고, 부모는 그때부터 그를 잘 대했다고 한다.

게클랭은 어린 시절부터 힘, 신체 운동 기술 및 호전적인 취향으로 젊은 동료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가야르 드 베르빌(Guyard de Berville, 1697 ~ 1770)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 롱그빌 백작, 프랑스 랭스 보안관의 역사>에서 인용한 브르타뉴 전승에 따르면, 게클랭은 1337년 6월에 렌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종자로 참석했다. 이때 아버지 로베르는 기사 계급으로서 토너먼트에 참가했지만, 워낙 가난해 갑주와 군마를 살 돈이 없어 일꾼의 짐 말을 빌리고, 다 떨어져가는 옷과 철 쪼가리를 걸쳤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등록장 관리인도 그가 귀족인지 의심스러워 했다. 이에 격분한 게클랭은 토너먼트에서 패배한 뒤 밖으로 나가던 사촌 하나로부터 갑옷과 장비를 빌렸다.

이후 게클랭은 투구 바이저로 얼굴을 가린 채 수많은 기사[1]를 물리쳤지만, 아버지와 대결할 때는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창을 기울여 그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문장도 없는 이 기사가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 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그에게 도전한 기사가 가까스로 그의 투구 바이저를 날렸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로베르는 아들에게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고 아들에게 완전히 무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는 이 이야기를 훗날 프랑스의 명장으로서 맹활약한 게클랭을 부각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게클랭이 종자로서 여러 마상창시합에 참가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2.2. 브르타뉴 전선

그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이름을 날린 시기는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354년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유명한 기사이자 베쉐렐 요새의 수비대장이었던 휴 칼블리는 그해 4월 10일 콩부르 성을 습격해 그곳에 있는 프랑스 원수 아르눌 도드랭을 생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아르눌의 종자였던 게클랭은 칼블리의 공격을 예상해 궁수를 보초로 배치했다. 보초가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게클랭은 민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기습했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콩부르에 있던 아르눌이 이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 즉시 게클랭을 도우러 달려왔고, 많은 잉글랜드인이 살해되거나 생포되었다. 이때 휴 칼블리도 생포되었다. 게클랭은 이 공적을 인정받아 아르눌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게클랭은 브르타뉴 전역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그랑푸쥬레이를 기습 공략하는 등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1356년 10월 3일,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내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렌 공방전을 단행했다. 당시 그가 거느린 병력 규모는 불분명하나, 학자들은 당대 연대기 기록들을 종합해 1,500 ~ 4,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욤 드 페뉴와 베르트랑 드 생페른이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고 전해지며, 수비대 규모는 알려진 바 없으나 잉글랜드군보다 약간 많았다고 한다. 헨리는 당장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적다고 보고, 도시를 에워싸서 굶겨죽이기로 했다.

1357년 초, 게클랭은 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장병들을 독일인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힌 뒤 식량 수송 마차들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접근했다.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들이 아군과 합세하러 온 용병들이라 여겨 경계하지 않았고, 그들은 잉글랜드 진영을 그대로 통과해 렌 시에 식량을 전달했다. 이후 게클랭은 잉글랜드 진영을 야간에 습격하고 반격이 오기 전에 철수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William Bamborough)가 일기토를 신청하자, 베르트랑은 바로 응전해 그를 처단했다.

이렇듯 렌 공략이 뜻대로 되지 않고 베르트랑이 유격전으로 괴롭히는 상황에 시달리던 헨리는 1357년 7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장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으니 렌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헨리는 10만 리브르를 보상금으로 받고 렌 시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면서 잠깐동안 성벽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고, 렌 수비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오베르슈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연이어 안겼던 헨리를 물리친 게클랭은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무렵,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잉글랜드로 끌려간 아버지 장 2세를 대신해 프랑스를 이끌던 샤를 왕자는 게클랭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자신의 사람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게클랭을 퐁토르송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브르타뉴 군대의 왕실 대장으로 선임해 잉글랜드의 침략에 정기적으로 시달리는 앙주, 메인, 노르망디를 지키게 했으며, 연간 200 프랑의 종신 연금을 지급했다. 이후 게클랭은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던 1361년 1월, 게클랭은 휴 칼블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쥐녜-슈흐-사르트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 사블레 영주 기욤 1세 드 크라옹과 함께 이들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욤 1세는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고, 게클랭은 홀로 적과 싸우다 생포되었다. 이에 샤를 왕자는 숙부인 필리프 도를레앙에게 부탁해 3만 프랑에 달하는 몸값을 대신 지불하게 했다. 1362년, 게클랭은 브르타뉴 공작 샤를 드 블루아의 브르타뉴 북부에서의 공세에 참여했다.

1364년 4월, 잉글랜드와 연합한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를 응징하라는 샤를 왕자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군 1,2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롤부아즈를 공략했고, 뒤이어 망트, 베르누이, 묄렁을 잇따라 공략했다. 이때 나바라 왕국-가스코뉴 연합군을 이끌고 나바라에서 아키텐을 거쳐 북부 프랑스로 행진하던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카를로스에게 복종하는 도시들이 더 이상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게클랭을 격파하기로 하고, 노르망디 서부의 수비대, 메인,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1,500명을 규합한 후 게클랭에게 접근했다.

1364년 5월 14일, 에브뢰에서 출발한 장 3세의 군대는 망트를 향해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외르 강변 고지에 도착했을 때 외르 강 다리 앞 언덕에 게클랭의 프랑스군이 주둔한 것을 확인했다. 두 군대는 이틀간 두 언덕 위에서 대치했다. 그러던 5월 16일 프랑스군 일부가 다리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자, 잉글랜드 용병대장 존 주엘이 장 3세에게 게클랭이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안전한 곳으로 철수하려 하는 게 분명하니 즉시 추격해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3세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저들은 우리를 언덕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저리 나오는 것뿐일세."

그러나 존 주엘은 상관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도록 하라! 나는 전장에 뛰어들겠다!"

이후 적을 향해 달려들자, 장병들은 "성 조지!"를 외치며 뒤따랐다. 그 광경을 본 장 3세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도 빨리 언덕을 내려가자. 존 주엘 경은 나 없이는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장 3세는 일부 기병대를 다리 쪽으로 보내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한 뒤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이 언덕에서 평원으로 내려오자, 게클랭은 적이 위장 후퇴에 속은 것에 기뻐하며 외쳤다.
"우리가 오늘 내내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졌다!"

프랑스군은 게클랭의 지시에 따라 돌아서서 자신들을 쫓아오는 적과 맞붙었다. 이후 반나절 동안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때 게클랭은 브르타뉴 출신 기병 예비대에게 적 측면을 돌아서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이 명령대로 따르자, 나바라-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무너졌다. 프랑스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적을 밤늦게까지 추격해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장 3세는 30명의 부하들과 함께 도끼를 휘저으며 분전했으나 끝내 사로잡혔고, 존 주엘은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오직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잉글랜드 용병대 일부만 온전히 후퇴할 수 있었다. 샤를 왕자는 게클랭이 코르슈렐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음날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 즉위했다.

이후 게클랭은 샤를 드 블루아를 도와주기 위해 브르타뉴 전선으로 향했다. 1364년 9월 29일,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레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중앙 부대를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샤를 드 블루아가 전사하고 좌익과 우익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자신의 부대마저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장 4세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에 등극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게클랭은 샤를 5세가 몸값으로 10만 프랑을 친히 지불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2.3. 이베리아 전선

1365년, 게클랭은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고 있던 자유 용병대를 다른 나라로 보내기로 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놓고 페드로와 대결하고 있던 엔리케 2세를 옹립하는 원정에 그들을 고용하기로 했다. 그해 3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 기사 및 용병대가 엔리케와 함께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그는 프랑스와 카스티야 사이의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키텐으로 망명해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의탁했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1367년 2월, 흑태자 에드워드는 심복들과 함께 6,000가량의 아키텐 병사, 2,000 가량의 잉글랜드군, 잉글랜드 병사 1,000명, 나바라 군인 300명 등 1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에 진입했다. 엔리케 2세는 이에 맞서고자 병력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를 위해 푸아티에 전투의 영웅인 에드워드와 싸우려는 카스티야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4월까지 모인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고, 프랑스 용병 1,000명과 아라곤 출신 귀족들이 제공한 1,2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전력상 절대 불리했기에, 게클랭 등 많은 장교들은 엔리케 2세에게 전투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샤를 5세 역시 압도적으로 유리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과 회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신하들은 그가 침략자와 싸우지 않는다면 카스티야에 남아있는 지지자들이 뿔뿔이 사라질 거라고 충고했다. 여기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일부러 엔리케 2세를 깔아뭉개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엔리케 2세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나헤라 전투에서, 게클랭은 중앙 부대를 이끌고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보르도로 끌려간 그는 샤를 5세가 그의 몸값으로 책정된 6만 프랑을 또다시 지불해준 덕분에 1367년 12월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프로방스를 정복하기 위해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앙주 공작이자 샤를 5세의 동생인 루이 1세의 군영에 배속되었다. 그들은 아를을 곧 함락했지만, 타라스콘은 프로방스 군대에 의해 19일 만에 구출되었다. 나폴리 궁정 관료 레몽 2세 달굴트가 반격에 나섰지만 세레스테에서 패배했다.

1368년,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 앙주 공작과 게클랭에게 분노해 파문을 선언했다. 루이와 게클랭은 교황의 파문을 무시하고 프로방스 공략에 힘을 기울였지만, 프랑스군의 심각한 약탈에 격분한 주민들이 프로방스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점차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그러던 중 샤를 5세로부터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고 게클랭을 소환했다. 당시 흑태자 에드워드는 페드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잉글랜드간의 연합이 끊어졌고, 샤를 5세는 이를 기회 삼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프랑스의 동맹으로 삼기 위해 엔리케 2세를 옹립하려 했다.

1368년 9월,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은 군대를 일으켜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다. 백년전쟁 초기에 관한 주요 정보를 제공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2만에 달하는 무어인이 이에 응해 페드로에게 가담하면서, 페드로의 군세가 4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에 엔리케 2세가 1355년 톨레도에서 페드로를 따르던 유대인 1,200명을 학살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던 세파르딤이 대거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페드로를 끝까지 따르는 톨레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엔리케 2세는 페드로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게클랭은 일부 병력만 남겨서 톨레도를 그대로 포위하게 하고, 주력군은 페드로를 향해 진군하면서 첩자들을 사방에 보내 페드로의 군대에 대한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엔리케 2세는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후 1369년 3월 14일에 벌어진 몬티엘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후 그곳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페드로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이에 몬티엘과 톨레도 등 페드로를 따랐던 도시들이 항복하면서, 카스티야 내전이 막을 내렸다. 게클랭은 공적을 인정받아 엔리케 2세로부터 몰리나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연간 2만 리브르에 달하는 수입을 받게 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2.4. 프랑스의 재정복을 이끌다

1370년 10월, 프랑스로 돌아온 게클랭은 샤를 5세에 의해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그의 임무는 그해 8월 칼레에 상륙한 뒤 파리 근교까지 쳐들어오면서 약탈을 자행하는 로버트 놀스 휘하 잉글랜드군 6,000명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얼마 후 장 4세 드 모켄시 휘하의 브르타뉴 분견대와 합세해 4,000명을 확보했으며, 뒤이어 샤텔로에 집결한 루이 드 상세르 휘하 1,200명과 합류했다. 12월 1일 캉을 출발한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이르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건설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13주분만 지급했기 때문에,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매우 컸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12월 3일 밤,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느라 지친 병사들을 독촉하여 야간 행군을 시작해 12월 4일 이른 아침에 퐁발랭에 도착했다. 토머스 그랜디슨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서둘러 전투 대형을 결성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프랑스 중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화살 몇 발만 쏜 뒤 숲으로 도주했지만, 적의 맹추격으로 인해 대거 학살되었다. 그랜디슨의 부대는 샤토 드 라 페뉴 성벽 아래로 피신했다가 적이 쫓아오자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끝내 섬멸되었다. 퐁발랭 전투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이는 이는 토머스 그랜디슨 외 몇몇 고위급 장교 뿐이었다.

게클랭은 퐁발랭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한 뒤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피츠월터 쪽으로 향했고, 일부 병력에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피츠월터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스 수도원 내로 피신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버텨보려 했다. 그러나 루이 드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츠월터의 잉글랜드군과 거의 동시에 수도원에 도착했고, 수비대는 상세르의 즉각적인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적절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압도되었고, 게클랭이 뒤이어 도착한 뒤 패주하는 잉글랜드군을 대거 사로잡았다. 피츠월터를 비롯한 몇몇 고위급 장교들이 생포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 장병은 섬멸되었다.

퐁발랭과 바즈에서 용케 빠져나왔거나 다른 곳에서 약탈하느라 합류하지 못했던 잉글랜드인들은 루아르 남쪽의 생소뵈르로 향했다. 약 3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사토 드 쿠르시용 성을 점거했지만, 곧 그곳을 떠나 생모르르루아르라는 여울목으로 이동했다. 그곳 너머에는 잉글랜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있었다. 이후 수도원의 잉글랜드군과 합세한 그들은 보르도로 향했지만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자 샤토 드 브레수아르 성으로 피신했다. 그곳 역시 잉글랜드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보고 겁에 질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결국 패잔병들은 성 아래에서 프랑스군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후 게클랭과 상세르는 놀스가 약탈 행진 동안 점령했던 모든 마을과 성들을 탈환한 뒤 놀스와 민스터워스의 영국군을 추격했다. 놀스와 민스터워스는 곧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1372년, 게클랭은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포위했다. 이곳이 함락된다면, 아키텐과 잉글랜드간의 해상 보급이 끊어질 수 있었다. 아키텐을 지키던 곤트의 존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잉글랜드 육군 및 해군을 파견했으나, 그해 6월 22~23일 카스티야 왕국이 파견한 제노바 출신 제독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휘하의 카스티야 함대를 상대로 라 로셸 해전에서 궤멸되었다. 라 로셸은 이후에도 3개월간 버텼지만 9월 7일에 결국 항복했다. 한편, 게클랭은 샤를 5세의 형제인 루이 1세와 함께 푸아투 공략에 힘을 기울인 끝에 7월 31일에 생세브르 요새를 함락했으며, 8월 7일 푸아티에를 탈환했다. 잉글랜드군은 1372년 말에 이르면 푸아투 남부에 6개 미만의 요새만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루이 1세가 곤트의 존이 단행한 약탈 행진에 대응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남프랑스 방면 프랑스군을 홀로 지휘하게 된 게클랭은 1373년 3월 초 푸아티에 인근의 몽트뢰유보냉을 공략한 뒤 1373년 3월 중순 푸아투의 요충지인 시세를 포위했다. 그는 적 구원군이 오기 전에 시세를 서둘러 공략하려 했지만, 기사 로머트 마이턴이 이끄는 60명의 수비대의 결사 항전에 부딪쳐서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 존 데버루가 니오르 주변에 분산된 800명의 기사와 300명의 장궁병들을 규합하여 시세를 구원하고자 출진했다. 이들은 야밤에 숲길을 통해 이동해 적의 감시를 회피했고, 3월 21일에 시세 인근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게클랭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요구했다.

잉글랜드군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에 놀란 게클랭은 부하들을 불러모아서 어찌 대처할 지 논의했다. 그들은 "께서 잉글랜드군과 정면 대결하는 것을 금지했으니 전투를 회피하고 참호와 방어벽을 구축한 채 버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게클랭은 고개를 저으며 전투를 벌이겠다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프랑스의 샤를 왕이 왕위 계승자라는 말을 늘 들어왔소. 폐하께서 나를 무관장으로 임명했을 때, 그 분은 나에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잉글랜드군과 싸우라고 말했소. 나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고 믿소. 우리의 수는 잉글랜드인과 거의 같소. 그렇다면 전투를 거부하고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하여 불명예를 얻을 필요가 있겠소? 우리는 왕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배반하고 싶지 않소. 또한 우리는 잉글랜드인 만큼 전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소. 왕은 우리가 싸우는 것을 금지했소. 우리는 그것을 권장하지 않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수행한 모든 일이 항상 성공적이었으니, 이번에도 내게 순종해주길 바라오."

장군들은 이에 호응하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장군을 승리로 인도하겠습니다!"

게클랭은 영국 전령들에게 전투를 받아들인다고 전하게 한 뒤 시세 참호 앞에 군대를 배치한 후 연설했다.
"자, 나의 용감한 동료들이여. 여기 우리에게 전투를 요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항상 이겼던 자들과 같은 이들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해라. 그러나 약점을 드러낸다면, 그토록 노력하여 얻은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 너희의 영광, 재산, 특히 조국의 명예와 평온을 위해 싸워라!"

게클랭은 일부 병력을 남겨둬서 시세 수비대를 감시하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을 향해 진격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게클랭은 전군에 창을 내린 채 적 궁수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프랑스 장병들은 신속하게 전진했고, 궁수대는 자신들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드는 적의 기세에 기가 질려 화살 몇 발만 쏜 뒤 후퇴했다. 뒤에 있던 잉글랜드 보병대가 백병전을 준비하기 위해 창을 던지고 도끼를 꺼내는 모습을 본 게클랭이 외쳤다.
"전군, 창을 손에 꼭 쥐고 계속 진격하라!"

프랑스 보병대는 즉시 창을 치켜세우고 도끼를 든 적군을 향해 차분히 전진했다. 잉글랜드군은 수많은 창을 앞세워 전진하는 적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고, 일부는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 제노바 석궁병들이 양 측면에서 물러서는 잉글랜드군에게 화살을 연이어 쐈고, 프랑스 기사들은 말을 타고 적의 후방을 꾸준히 공격했다. 성 위에서 아군이 위태로운 것을 목격한 시세 수비대가 성밖으로 나와 구원하려 했지만, 베르트랑이 미리 배치해둔 프랑스 부대에 격퇴되었다.

반나절간 이어진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고지대에서 밀려나 뒷걸음질 치다가 끝내 패주했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600명을 사살하고 500명을 생포했다. 지휘관 존 데버루 역시 미처 도주하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아군이 궤멸되는 모습을 목도한 시세 수비대는 곧바로 항복했다. 게클랭은 잉글랜드 전사자 및 포로들로부터 갑옷과 말을 노획한 뒤 병사들더러 갈아입게 한 뒤 니오르 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진격했다. 잉글랜드인 복장을 한 프랑스인들을 본 도시 주민들은 "아군이 전투를 끝나고 돌아온 모양이다"라고 착각하고 도개교를 내렸고, 병사들은 "뒤 게클랭"을 외치며 요새화된 도시로 돌격했다. 그제야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 및 수비대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이리하여 게클랭은 푸아투 대부분을 제패했다.[2]

1376년, 게클랭은 노르망디의 퐁토르송 영주에 선임되었다. 1377년 7월 브뤼헤 휴전이 만료되자,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브르타뉴와 기옌에서 잉글랜드군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가론 강변의 베르주라크, 리부른, 생테밀리옹, 블라예를 탈환했다. 그러나 11~12월에 감행된 셰르부르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378년, 샤를 5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몰수해 왕실의 직할지로 삼았다. 이에 브르타뉴 영주들이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잉글랜드에 망명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는 이 때를 틈타 디나흐에 상륙했다. 이때 게클랭은 장 4세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그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게클랭은 왕이 자신에게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무관장의 검을 왕에게 반환하고 카스티야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개입으로 샤를 5세의 신임을 되찾았다.

1378년 가스코뉴 공략에 착수한 게클랭은 한때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 근교에 이르러 주변의 여러 성과 마을을 공략했지만,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필요한 보급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해 10월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사촌인 올리비에 드 모니와 함께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프랑스군은 게클랭의 활약에 힘입어 1369 ~ 1378년 원정에서 130여 개의 성과 마을을 재정복했다.

2.5. 최후

1380년, 게클랭은 오베르뉴 지역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는 자유 용병대 토벌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샤토네프 드 랑동을 포위 공격하던 그는 15일 이내에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는 수비대장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게클랭은 공방전 도중에 고열로 쓰러졌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여름 더위에 시달리다가 얼음물을 너무 많이 마신 바람에 몸져누웠다고 한다. 그는 브르타뉴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380년 7월 13일에 사망했다. 이후 지휘권을 인수한 루이 드 상세르는 포위된 요새의 도랑 가장자리로 전진하고 수비대장을 불러 항복하라고 요청했다. 수비대장이 게클랭에게만 항복할 것이라고 대답하자, 상세르는 게클랭이 방금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에 수비대장은 랑동의 열쇠를 게클랭의 시신이 담긴 관에 올린 뒤 정식으로 항복했다.

샤를 5세는 게클랭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체를 심장, 내장, 살 및 뼈로 분할하여 4중으로 매장하는 특권을 내렸다. 그 후 루이 드 상세르 원수의 주관하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 행렬이 퓌앙블레에서 멈추는 동안, 시신은 적출된 뒤 첫 번째 방부처리를 거쳤으며, 내장은 그곳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며칠 후 몽페랑에 이르러 뼈에서 살을 분리하기 위해 향료로 맛을 낸 포도주 냄비에 시신을 삶았고, 살이 몽페랑의 코르들리에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해골과 심장은 브르타뉴를 향해 계속 향했다. 그러다가 샤를 5세로부터 고인의 유골을 생드니 대성당에 묻으라는 특명이 내려지면서 유골이 도로 파리로 향했고, 심장만이 브르타뉴에 이르러 디낭에 있는 자코뱅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때 몽페랑의 무덤은 파괴되었지만, 나머지 세 무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3. 가족

  • 티파인 라게넬(? ~ 1373): 샤텔오제의 영주 로빈 3세 라게넬의 딸. 점성술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잔 드 라발(1350 ~ 1437): 샤티용 남작 장 드 라발 샤티용의 딸.
  • 정부: 카스티야 왕비 후아나 마누엘 데 비예나의 시녀 도나 소리아
    • 벨트란 데 토레스
    • 게레크 데 토레스: 부르고스 가르시아 데 토레스 대주교.

4. 후대의 평가

게클랭은 프랑스 왕실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의 침략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한 영웅으로서 후대 프랑스 역사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외젠 데프레즈(Eugène Déprez, 1874 ~ 1951)는 샤를 5세에게 명성을 안기고 막대한 업적으로 그의 세기를 장식한 영웅이며,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항상 죽을 준비가 된 기사로 묘사했다. 반면 브르타뉴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프랑스를 위해 싸움으로써 브르타뉴가 독립하지 못하게 만든 반역자로 간주했다. '브르타뉴 사회민족노동자운동'은 1941년 렌의 식물원 앞에 세워진 게클랭 동상을 망치로 파괴했고, '브르타뉴 해방전선'도 1977년 2월 12일 브롱스에 세워진 게클랭 동상을 폭파했다.

5. 여담

전승에 따르면, 게클랭은 자신의 검을 프랑스의 국운을 지킬 자에게 전달하라고 부탁했다. 그의 검은 미망인인 잔 드 라발이 물려받았고, 잔 드 라발은 외손자에게 게클랭의 검을 물려줬다. 그 외손자가 바로 샤를 7세의 프랑스 원수로서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였다고 한다.
[1] 전승에 따라 12명 또는 15명으로 전해진다.[2] 푸아투 완전 제패는 1375년 2월 최후의 잉글랜드군 거점인 겐카이 요새가 함락되면서 완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