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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파일: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jpg
이름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André de Laval-Montmorency
이명 앙드레 드 로에아크
André de Lohéac
출생 1408년
프랑스 왕국 라발
사망 1486년 12월 29일
프랑스 왕국 라발
아버지 장 드 몽포르
어머니 안 드 라발
형제자매 기 14세, 루이, 잔, 카트린
부인 마리 드 레
직위 로에아크와 몽장의 영주, 레 남작, 프랑스 원수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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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행적

1408년경 프랑스 왕국 라발에서 케르고를레, 라 로슈-베르나르 남작, 라 브레테세, 로에아크, 몽장 등지의 영주였던 장 드 몽포르와 라발의 영주인 기 12세 드 라발의 외동딸인 안 드 라발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기 14세 드 라발, 루이가 있었고, 누이로 잔[1], 카트린[2]이 있었다.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기수 기사로서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 때 아르마냑파를 돕기 위해 7명의 기사와 180명의 종자를 포함한 6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 1412년 장인이 사망하자 자신을 기 13세 드 라발이라고 칭했다. 1412년 7월 부르주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중지되자,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해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기도하기로 하고,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목적을 달성한 뒤 로도스로 갔다가 그곳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려 1414년 8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집으로 보낸 서신에서 아내에게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통치할 전권을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 드 라발이 브르타뉴, 앙주, 메인, 노르망디, 프랑스, 피카르디, 플란데런, 에노, 아르투아 등지에 넓게 펼쳐진 남편의 영지를 전적으로 관리했고, 아직 미성년자였던 장 드 몽포르의 아이들 역시 안의 후견을 받았다. 이에 장 드 몽포르의 아버지인 몽포르 영주 라울 드 몽포르가 자신이야말로 아이들을 양육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수년 간의 법정 소송 끝에,1417년 파리 의회에서 고인의 뜻대로 하기로 확정했다.

전승에 따르면, 앙드레는 외할머니이자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미망인이었던 잔 드 라발로부터 게클랭의 검을 물려받고 15살 때 잉글랜드군과의 전장에 나섰다고 한다. 1423년 9월 26일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공헌한 뒤 지휘관 장 8세 다르쿠르에 의해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428년 3월 9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라발을 공격하자, 그는 라발 성으로 후퇴한 뒤 6일간 항전했으나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후 몇 달간 억류되었다가 몸값을 넘기고 풀려났다.

1428년 6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 의해 메인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429년 6월 8일 오를레앙 공방전이 끝난 뒤 루아르 계곡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위해 잔 다르크장 2세 달랑송이 소집한 프랑스군에 가담한 뒤 루아르 원정파테 전투에서 활약했다. 뒤이어 랭스 행진에도 참여했고,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형 기 14세 드 라발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 샤를 7세는 본래 라발 남작이었던 기 14세를 라발 백작에 선임했다. 이는 라발 시를 잉글랜드군에 빼앗기면서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자비를 들여가며 자신을 위해 싸운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1430년, 앙드레는 1429년 9월 25일 잉글랜드로부터 되찾은 라발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433년 라발 백국의 총독으로 선임되어 노르망디를 공격하고 그곳에 관리를 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앙브루아즈 드 로레와 함께 노르망디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잉글랜드군을 교란했다. 이 무렵, 코탕탱 반도의 생질 수도원을 근거지로 삼은 잉글랜드 용병대장 베너블스가 주변 지역을 자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는 이들을 격퇴해달라고 청했다. 그와 앙브루아즈는 이를 받아들여 베너블스를 생질 수도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병사 800명을 이끌고 밤에 수도원이 있는 산지를 등반했다. 그러나 베너블스는 끝까지 버텼고, 프랑스군은 장병 200명을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후 베너블스는 군대를 일으켜 라씨로 진격했다. 이때 앙드레와 앙브루아즈가 이끄는 병사 700명이 그들을 기습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풍부한 전리품과 수많은 전리품을 챙겨 라발로 돌아갔다,

1436년 2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해 파리가 프랑스의 영토로 복귀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샤를 7세는 앙드레를 프랑스 제독으로 선임했다. 1439년에는 이해에 콩피에뉴에서 잉글랜드군에 협력하는 프랑스 장군 기욤 드 플라비에게 사로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사망한 피에르 드 리외를 대신해 프랑스 원수에 선임되었다. 1441년 파리 근교에 흩어진 잉글랜드군과 꾸준히 전투를 벌여 일드프랑스 일대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내고자 노력했다. 특히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샤를 7세와 도팽 루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군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해 함락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군은 파리 주변 지역인 일드프랑스에서 쫓겨났다.

1442년 보베로 쳐들어온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수성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으며, 1443년 도팽 루이와 함께 디에프 공방전을 치러 장기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144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앙주의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낭시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여했고, 1446년 앙주의 르네가 소뮈르에서 주최한 토너먼트에도 참가했다.

1449~1450년 형제 기 14세와 함께 노르망디로 출진해 생자크드뵈브롱, 모르탱, 쿠탕스, 생로, 카랑탕, 발로뉴 등지를 공략했으며, 포미니 전투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다. 뒤이어 캉, 팔레즈 공략에 기여했으며,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최후의 거점인 셰르부르 공방전에 참여해 공략에 성공했다. 1451년 장 2세 드 부르봉, 장 드 뒤누아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해 블랑크포르 전투에서 가스코뉴군을 궤멸시키고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를 포위해 6월 30일에 항복을 받아냈으며, 8월 20일에 바욘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가르코뉴 전역이 프랑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1452년 10월 잉글랜드의 장군 존 탈보트가 가스코뉴로 진군해 현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보르도를 포함한 가스코뉴 서부를 재공략하자, 샤를 7세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는 이 원정군에도 함께 했고, 7월 13일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존 탈보트는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위해 카스티용으로 진군했지만, 뒤이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앙드레는 가스코뉴 전역을 순조롭게 평정한 뒤 보르도를 포위해 기아에 시달리게 한 끝에 10월 14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장미 전쟁에 시달리면서 가스코뉴에 두 번 다시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고,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가스코뉴 공략을 완수한 뒤, 앙드레는 1454년 내내 라발 성에 머물렀다. 1455년, 샤를 7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장 5세 다르마냐크를 징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기옌 방면군 수장으로서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장 2세 드 부르봉과 함께 아르마냐크 백작령으로 쳐들어가 17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고, 장 5세 다르마냐크는 레크투르 성에서 저항하다가 아라곤 왕국으로 도주했다. 1456년, 샤를 7세는 그에게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아들 도팽 루이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루이를 공격해 격파함으로써 부르고뉴국으로 피신하게 만든 뒤, 도팽 루이의 영지였던 도피네 지방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1458년에는 라발 성의 르네즈 탑을 재건해, 자신의 근거지인 라발의 방어를 강화했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했고, 지난날 앙드레 때문에 부르고뉴국에 망명해야 했던 루이 11세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다. 앙드레는 프랑스 원수 직에서 경질된 뒤 왕실을 떠나 라발에 은거했다. 그러던 1465년 4월 프랑스의 대귀족들이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해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그는 500명의 중장병을 이끌고 브르타뉴 방면에서 진군해 1465년 7월 16일 몽레리 전투에서 루이 11세를 추종하는 군대를 격파하고 에탕프를 접수한 뒤 파리로 진군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군과 파리 근교에서 대치하다가, 그해 10월 29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평화 협약의 조건 중 하나는 앙드레가 프랑스의 첫번째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이 11세는 이에 따라 그를 프랑스 원수로 복귀시켰다. 1466년, 앙드레는 프랑스 제독으로 선임되어 1476년까지 원수직과 함께 그 직위를 맡았다. 1468년에는 파리의 총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후 루이 11세와 화해한 앙드레는 루이 11세가 설립한 생 미셸 기사단의 첫 15명의 기사 중 한 명에 선임되었다. 1471년 피카르디 총독에 선임되었고, 1472년에는 루이 11세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킨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 맞서 보베에서 항전해 격퇴했다. 1472년 8월 몽장성에서 루이 11세를 영접했으며, 1481년 퐁투아즈 시의 영주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라발에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486년 12월 29일에 사망했고, 라발에 있는 생투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앙드레의 동생인 루이 드 라발은 생투갈에서 형의 영혼을 위해 매년 성목요일과 사망 기념일에 미사를 거행하게 했다. 이 미사는 일명 '원수의 미사'로 알려졌으며, 1793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거행되었다.

앙드레는 1451년에 질 드 레의 외동딸이었던 마리 드 레와 결혼해 레의 새로운 남작이 되었으며, 마슈쿨 , 샹토세 쉬르 루아르 등지의 영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457년 11월 1일 마리가 사망할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이후에 재혼하지 않았기에 후손을 두지 못했다.


[1] 1405 ~ 1468, 부르봉-방돔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의 부인[2] 1412 ~ 1450, 브로세 자작 기 3세 드 쇼비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