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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 달랑송

<colbgcolor=#FFFACD><colcolor=#000000>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
Jean II d'Alençon, Duc de l'Alençon
파일:John II_Duke of Alenon.jpg
이름 장 2세 달랑송
Jean II d'Alençon
출생 1409년 3월 2일
프랑스 왕국 아르장탕
사망 1476년 9월 8일
프랑스 왕국 파리
아내 잔 드 오를레앙 (1424년 결혼/1432년 사망)
마리 다르마냐크 (1437년 결혼/1473년 사망)
자녀 카트린, 르네, 장(사생아), 로베르(사생아), 잔(사생아), 마들렌(사생아), 마리(사생아)
아버지 장 1세 달랑송
어머니 마리 드 브르타뉴
형제 피에르, 마리, 잔, 샤를로테
직위 알랑송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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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잔 다르크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귀족으로, 잔 다르크의 복권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말년에 샤를 7세루이 11세에게 밉보여 몰락했다.

2. 생애

1409년 3월 2일 프랑스 왕국 아르장탕에서 초대 알랑송 공작 장 1세 달랑송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딸 마리 드 브르타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 피에르, 마리, 잔은 요절했고, 막내 여동생 샤를로트는 수녀가 되었다. 6살 때인 1415년 10월 25일에 아버지 장 1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한 뒤 알랑송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423년 14살의 나이에 미래의 루이 11세가 될 도팽 루이의 대부로 선택되었다. [1]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 참가했다가 잉글랜드군에게 생포되었고, 1427년까지 억류되었다가 2만 크라운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당시 그의 영지 상당수가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정복으로 인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는 막대한 빚에 시달려서 몸값을 좀처럼 지불하지 못했다.

1429년, 시농에서 도팽 샤를을 따르던 그는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된 오를레앙을 구하기 위해 3,000명의 맨앳암즈를 이끌고 출전하는 잔 다르크에게 가세했다. 그는 처음부터 잔 다르크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고, 잔은 그를 "선량한 공작님"이라고 불렀다. 이후 벌어진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과 함께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워 도시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며, 뒤이은 루아르 원정에서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맡아 잔의 조언에 따라 공세 작전을 이어갔으며, 파테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 후 잔이 부르고뉴파가 장악하고 있던 랭스로 행차해 도팽 샤를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도팽 샤를과 다수의 귀족은 그러기엔 너무 위험하다며 꺼렸다. 하지만 그는 잔이라면 해낼 수 있다며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민심도 그녀를 지지했다. 결국 잔의 뜻대로 랭스 행진이 개시되었고, 그 결과 도팽 샤를은 랭스에 무사히 입성했다. 7월 17일에 거행된 대관식에 참석한 그는 샤를 7세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잔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탈환하자고 주장할 때 적극적으로 찬성했으며, 그녀와 함께 파리 공략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도중에 그를 생드니로 소환했고, 잔은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1차 파리 공방전을 치렀으나 실패했다. 이후 부르고뉴파와 휴전 협상이 이어지자, 그는 이에 반대해 1429년 말과 1430년 초에 걸쳐 노르망디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위궤양에 시달리던 그는 궁정을 떠나 영지로 돌아갔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에 내야 할 몸값 마련에 골머리를 앓다가 외삼촌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에게 푸제르 요새를 매각하는 대가로 12만 크라운을 챙겼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던 그는 1431년 크리스마스 때 낭트를 방문해 장 5세에게 어머니의 지참금 중 아직 미지급된 15,000 크라운을 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시원한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외삼촌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사촌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2]를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신 낭트의 주교이자 장 5세의 총리였던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그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사위인 기 14세 드 라발에게 지휘권을 맡겨 푸앙세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메인과 하부 노르망디에 주둔한 잉글랜드 중대가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장 2세 달랑송은 이에 맞서기 위해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및 여러 영주들로부터 무장병 2,000명을 지원받았다.

푸앙세 공방전은 1432년 1월 16일부터 2월 22일까지 진행되다가,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둘째 아들이자 장 5세의 동생이었고, 프랑스군의 사령관이기도 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해결되었다. 협약에 따르면, 알랑송 공작은 일전에 납치했던 장 드 말레트르와와 모든 잉글랜드인 및 브르타뉴인 포로를 석방하고, 플라스 드 라 게르슈를 담보로 제공하고 50,000 크라운의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장 5세는 1년 후 플라스 드 게르슈를 돌려주며, 마리 드 브르타뉴의 지참금 중 나머지 금액, 즉 15,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1435년,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간의 아라스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알랑송 공국의 미수복 지역을 탈환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고 여기고 샤를 7세에게 깊은 불만을 품었으며, 왕이 자신에게 부여한 12,000 크라운의 연금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1440년, 그는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장 드 뒤누아, 조르주 1세 드 라 트레무야유, 그리고 왕위 계승자 도팽 루이와 함께 샤를 7세에 대한 반란을 도모했다. 그들은 프라그리에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는 오베르뉴로 도피한 뒤 다시는 왕에게 도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동지들과 함께 사면받았다.

1449년 샤를 7세가 노르망디 탈환 작전을 벌였을 때 가담해 쎄와 알랑송을 탈환했다. 그러나 여전히 샤를 7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그는 1455년에서 1456년까지 요크 공작 리처드와 공모해 노르망디로 건너온 잉글랜드군에게 요새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그가 사절로 보냈던 피에르 포르탱이 샤를 7세에게 고발하면서 발각되고 말았다. 샤를 7세는 일단 이 일을 묻어둔 채 1456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실시했다. 잔 다르크에게 여전히 경외심을 품고 있었던 그는 기꺼이 재판에 출석해 잔의 활약상과 훌륭한 성품을 상세하게 증언해, 그녀가 복권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직후 샤를 7세의 밀명을 받은 장 드 뒤누아에게 체포된 뒤 그해 5월 27일에 에그모르트 성채에 투옥되었다.

1458년 8월 방돔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가 요크 공작 리처드와 공모한 사실이 공개되었다. 10월 10일,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하지만 사를 7세는 그의 형량을 감형해 로슈 감옥에서 징역을 살도록 하고, 그의 아내인 마리 다르마냐크가 알랑송 공작령에 속했던 페르셰 백국을 가지도록 허용했다. 그 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하고 루이 11세가 등극한 뒤 석방되었고, 영지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발루아 왕조에 반감을 품었고, 1465년 루이 11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공익 동맹에 합류했다. 반면 그의 아들 르네는 루이 11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후 루이 11세와 공익 동맹이 화해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468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와 동맹을 맺고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시도에 사사건건 맞섰다. 1473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고 왕과 대적하려 했으나, 그해 2월에 체포되어 투르 인근의 로슈코르봉 성에 투옥되었고, 몇 차례의 이전 끝에 루브르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루이 11세는 알랑송 공국을 몰수하고 왕실의 직할지로 삼았으며, 마리 다르마냐크 역시 폐르셰에서 쫓겨났다.

1474년, 그는 두 번째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그가 자신의 대부였기에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형을 집행하지 않고 루브르 감옥에 투옥시켰다. 1476년 사면을 받고 풀려났지만, 얼마 후인 그해 9월 8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2년 후인 1478년, 그의 아들 르네가 알랑송 공작에 선임되었고, 알랑송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3. 가족

  • 잔 도를레앙(1409 ~ 1432):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의 딸.
  • 마리 다르마냐크(1420 ~ 1473):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의 딸.
    • 카트린(1452 ~ 1505): 라발 백작 기 15세의 부인.
    • 르네 달랑송(1454 ~ 1492): 제3대 알랑송 공작.
  • 사생아
    • 장: 일명 기사 아르장탕 경. 1470년경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마담 페소아'라고 알려진 여인과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 로베르: 일명 기사 클로 앙드레 경. 일찍이 성직자가 되었고, 생 줄리앙 병원과 샤토 공티에 예배당의 관리자를 맡았다.
    • 잔: 보몽르로제 여백작.
    • 마들렌: 기사 앙리 드 브뢰이유의 부인.
    • 마리: 알메네케스의 성모 수녀원장.


[1] 참고로 루이 11세와는 부계(발루아)로 10촌 조-손뻘 관계인데, 장 달랑송이 할아버지뻘이지만 소위 작은집의 자손이라(루이 11세는 필리프 6세의 5대손, 장 2세 알랑송 공작은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초대 알랑송 공작의 증손.) 그런지, 할아버지뻘치고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났다.[2]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