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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드 리슈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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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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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3세 }}}}}}}}}
파일:아르튀르 드 리슈몽.jpg
이름 아르튀르 3세 드 브르타뉴(Arthur III de Bretagne)
별칭 아르튀르 드 리슈몽(Arthur de Richemont), 심판자(Justiciar)
출생 1393년 8월 24일
브르타뉴 공국 사르조
사망 1458년 12월 26일 (65세)
브르타뉴 공국 낭트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457년 9월 22일 ~ 1458년 12월 26일
아버지 장 4세 드 브르타뉴
어머니 후아나 드 나바라
형제 장 5세, 마리, 마르그리트, 질, 리샤르, 블랑슈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잔 달브레
카트린 드 룩셈부르크생폴
자녀 자케트 드 브르타뉴(사생아)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배척당하는 프랑스 무관장2.3. 프랑스군에 복귀하다2.4. 프랑스의 명장
2.4.1. 2차 파리 공방전2.4.2. 퐁투아즈 공방전2.4.3. 가스코뉴와 노르망디 원정
2.5. 브르타뉴 공작
3. 대중 문화에서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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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무관장, 브르타뉴 공작. 잉글랜드군과 전쟁을 치른 끝에 백년전쟁의 승리를 이끄는 프랑스의 명장이다. 하지만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성과 이권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을 오가는 행보를 보였고, 때로는 과격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해 후대 학자들로부터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초년기

1393년 8월 24일 사르조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딸 후아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장 5세, 마리[1], 마르그리트[2], 질[3], 리샤르[4]가 있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 잉글랜드 왕실이 아버지에게 부여한 칭호린 리치먼드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잉글랜드 정부는 장 4세가 사망한 뒤 그를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베드퍼드 공작 존을 리치먼드 공작에 새웠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브르타뉴 공작가는 이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1399년 아버지 장 4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새 공작 장 5세를 포함한 아직 미성년자인 장 4세의 모든 자녀에 대한 후견권을 얻었다. 1403년, 어머니 후아나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결혼했다. 이로써 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실 모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407년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이 부르고뉴 공장 용맹공 장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파리 시내에서 피살당한 후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형 장 5세와 함께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새로운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 등과 손잡고 아르마냑파를 결성해 부르고뉴파에 대적했다. 1412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아버지 헨리 4세의 지시에 따라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고 부르고뉴파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해 8월 22일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 협약을 무효로 처리하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부르주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노르망디에 막 상륙한 클라렌스 공작은 조약에 구속되지 않는 알랑송 백작 장 1세 달랑송과 리슈몽의 브르타뉴군과 합세한 뒤 알랑송과 페르슈의 부르고뉴파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후 잉글랜드군만 이끌고 메인과 앙주를 통과하며 약탈을 벌였고, 루아르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아르마냑파에게 조약 이행을 요구했다. 이에 아르마냑파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귀족 7명을 인질로 넘기는 조건으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1414년 7월, 리슈몽은 아라스를 포위한 아르마냑파 주력군과 합세했다. 하지만 아라스 공방전은 막심한 피해만 양산했을 뿐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아르마냑파 원정군에 끌려왔던 도팽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리슈몽는 이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아르마냑파 수뇌부는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받아들이기로 했고, 부르고뉴 공작 역시 수락했다. 이리하여 아라스 협약이 체결된 뒤, 도팽 루이는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한 리슈몽을 높이 평가하며, 부르고뉴 공작을 계속 지지했다가 아르마냑파에게 몰수된 장 2세 드 파르테나이의 영지인 보베, 생투엔, 파르테나이를 리슈몽에게 수여했다.

1415년 4월, 리슈몽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함께 아르마냑파에 의해 믈룅 성에 감금되었던 도팽 루이를 구출한 뒤 파리로 진군해 파리 시의 요충지들에 브르타뉴군을 배치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었고, 도팽 루이의 측근들이 이를 대신했다. 또한 도팽 루이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를 파리 시 외곽으로 쫓아냄으로써, 부르고뉴파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였다. 그해 6월, 리슈몽은 일전에 도팽 루이에게 수여받은 영지에서 발발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런데 반란을 진압 중이던 그해 8월,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군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리슈몽은 프랑스 무관장 장 1세 달랑송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자 파리로 귀환해 프랑스군에 가세했다.

1415년 10월 25일, 리슈몽은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로 끌려가서 포더링헤이 성에 투옥되었다가 1420년 로저 에쉬튼의 감독 하에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다. 리슈몽의 어머니이자 헨리 4세의 부인이었던 나바라의 후아나는 의붓 아들인 헨리 5세에게 리슈몽을 석방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던 1420년 9월, 헨리 5세는 리슈몽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풀어주고 프랑스로 보냈다. 리슈몽은 1420년 12월에 헨리 5세가 파리에 입성하는 것을 지켜봤고, 1422년 5월 모 공방전을 치른 끝에 모를 공략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것도 지켜봤다. 1422년 8월 31일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투렌 공작에 선임된 뒤 신변의 자유를 허락받은 리슈몽은 도팽 루이의 미망인이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누이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 결혼을 1년간 협상한 끝에 성사시켰다. 켤혼식은 1423년 10월 10일 디종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아 입지를 다지려 했다. 또한 리슈몽은 형 장 5세가 헨리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무제한의 자치를 인정받는 아미앵 협약을 맺도록 유도했다.

2.2. 배척당하는 프랑스 무관장

1424년 8월 17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베르뇌유 전투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다. 이에 도팽 샤를은 11월 30일 마콩에서 부르고뉴 및 브르타뉴 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얻고 싶다면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장기간의 협상 끝에, 장 5세의 동생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타협이 이뤄졌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도팽 샤를이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그해 4월, 리슈몽은 앙주 공작부인 욜랑드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도팽 샤를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6월 초, 리슈몽과 욜랑드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도팽 샤를의 군대와 대치했다. 도팽 샤를은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를 해임했다. 1425년 10월 초, 소뮈르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도팽 샤를이 접견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도팽 샤를에게 신하로서 선서한 뒤,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르마냑파가 숙청되었으니 도팽 샤를과 화해하라고 권유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퍼드 공작 존은 격분해 브르타뉴 공국에게 2년 전 아미앵에서 맺은 조약에 따라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리슈몽은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도팽 샤를의 신하가 되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1426년 2월 중순, 리슈몽은 브르타뉴군을 이끌고 퐁토르송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생잠을 포위했다. 이후 공성전을 한창 벌이던 3월 6일, 리슈몽이 잉글랜드 구원군이 오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브랑슈로 파견했던 기병대가 돌아왔다. 그런데 브르타뉴군은 이들이 잉글랜드 구원군인 것으로 오해해 무질서하게 패주했고, 생잠 주둔군은 이 때를 틈타 출격해 브르타뉴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리슈몽은 참패를 면치 못하고 도주했다. 이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를 침공하자,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4,500프랑을 배상금으로 내고 휴전 협약을 맺었다.

무관장을 맡은 후 처음 치른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한 리슈몽은 브르타뉴 공작의 상서인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시농으로 끌고 간 뒤, 도팽 샤를에게 생잠에서 패한 이유는 말레트르와가 잉글랜드와 내통해 기밀을 누설하고 전비를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장 5세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공세로 인해 궁지에 몰린 끝에 평화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기로 하면서, 그의 입지가 급속도로 위태로워졌다. 그는 더이상 브르타뉴 공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도팽 샤를과 신하들은 그의 진의를 의심했다.

이에 리슈몽은 무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강경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1427년 2월, 리슈몽은 왕의 총애를 받아 일개 종자에서 시종장으로 발탁된 뒤 정계와 군부에 많은 간섭을 하고 자기 사람을 대거 임용하던 피에르 2세 드 지악을 잡아 죽였다. 오베르뉴의 소귀족 출신인 시종무관 장 베르네가 뒤이어 시종장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베르네 역시 샤를 7세의 총애를 독점하며 다른 신하들을 견제했고, 리슈몽은 곧 베르네 역시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1427년 6월 말, 리슈몽의 부하들이 푸아티에 인근에서 장 베르네를 습격해 살해했다. 그는 이같은 정치 테러를 통해 자신에 대한 도전을 배제하려 했지만, 도팽 샤를이 자신의 총신들을 잇따라 죽이는 것에 반감을 품게 만들었다.

1427년 7월 15일,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가 3,000 병력을 이끌고 몽타르지를 포위했다.(몽타르지 공방전) 하지만 몽타르지 요새가 상당히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고 운하가 사방에 깔려 있어서 포위망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는 포병대를 활용해 포격을 며칠간 벌였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이 매일 밤 손상된 곳을 수리하고 대포로 맞대응했기 때문에 좀처럼 뚫지 못했다. 그러나 2달간 포위가 이어지면서, 도시 내에서 기근의 징조가 일기 시작했고 목재와 탄약도 고갈될 조짐을 보였다. 한편, 도팽 샤를은 몽타르지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리슈몽에게 몽타르지를 구원할 병력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앳암즈 1,600명과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등 유수의 기사들이 모집되었다.

하지만 리슈몽은 마지막으로 남은 정예 병력을 이번 전투에서 손실할 것을 우려해 출진을 그만두려 했다. 이에 격분한 샤를은 리슈몽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25세의 젊은 귀족 장 드 뒤누아를 새 지휘관에 선임했다. 이후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해 몽타르지를 구원했고, 이로 인해 리슈몽의 군사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여기에 시종장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가 도팽 샤를이 리슈몽에 대한 의심을 키우도록 부추겼고, 리슈몽은 점점 도팽 샤를의 궁정에서 배제되었다.

이에 리슈몽은 1427년 10월에 정부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귀족들을 결집해 반란을 일으켜 시농을 점령한 뒤, 간신인 트레무아유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겠다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그러나 1428년 왕실군이 반격을 가해 시농을 탈환했다. 이에 리슈몽은 부르주를 기습해 공략했지만, 샤를 7세가 7월에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에 도착하자 겁을 먹은 반란군은 트레무아유를 해임하라는 요구마저 철회하고, 그 대신 푸아티에에서 삼부회를 소집해 모든 국민들이 정부의 운영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고, 샤를 7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247년 9월에 시농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 리슈몽은 불출석했지만 반란에 가담했던 동료들은 그를 버리고 국왕의 소집에 응했다. 이후 리슈몽은 무관장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해임된 뒤 1,200명 가량의 브르타뉴 병사들만 이끌고 파르테네와 퐁트네 르 콩트 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는 데 만족해야 했다.

2.3. 프랑스군에 복귀하다

1428년 10월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포위했지만, 도팽 샤를은 리슈몽을 소환하길 거부하고 장 드 뒤누아에게 오를레앙 수비를 맡겼다. 1429년 5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루아르 원정을 단행했다. 이에 리슈몽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기로 하고 보장시로 진군하고 있던 프랑스 주력군에 접근했다.

도팽 샤를은 원정군 총사령관 장 2세 달랑송에게 리슈몽과 힘을 합치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래서 리슈몽이 합류하려고 찾아왔을 때, 장 2세는 그가 원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에 대한 향후 작전에 리슈몽의 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며 리슈몽을 변호했고, 다른 프랑스 장군들도 그녀의 의견을 지지했다. 잔은 리슈몽에게 자신이 도팽을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서면 보증을 하도록 요청했고, 리슈몽은 기꺼이 따랐다. 이에 장 2세는 리슈몽이 원정에 가세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프랑스군과 합류한 리슈몽은 파테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뒤이은 랭스 행진에도 참여해 도팽 샤를이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데 일조했다.

1432년 1월, 장 2세 달랑송이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총리이자 낭트의 주교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장 2세 달랑송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푸앙세를 포위 공격했다. 그는 형의 소환령을 받고 푸앙세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프랑스 무관장으로서 프랑스의 유력 귀족과 싸우는 것에 부담을 느끼다가 두 사람을 중재하기로 했다. 1432년 2월 22일, 장 5세와 장 2세 달랑송은 그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갈등을 해소했다.

1433년 6월 3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리슈몽의 종자인 얀 2세 드 로스니비넨에게 배를 찔려 부상을 입은 뒤 요양 생활을 하던 정적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를 체포해 몽트레조성에 감금했다. 샤를 7세는 자신의 시종장을 무단으로 체포한 리슈몽에게 별다른 처벌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무관장에 복직시켰다. 이후 리슈몽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하는 한편,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34년 7월 라옹과 보베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으며, 뒤이어 샹파뉴와 로렌으로 진군해 부르고뉴를 압박했다.

2.4. 프랑스의 명장

2.4.1. 2차 파리 공방전

1435년 9월 21일, 리슈몽은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아라스 협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했다.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았다. 또한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하기로 했고,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하기로 했으며,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1주일 전인 1435년 9월 14일에 사망했고, 섭정 직을 놓고 권력분쟁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여지가 사라졌다. 샤를 7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리슈몽에게 파리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1436년 3월 말 5,000여 병력을 일으켜 파리로 진군한 리슈몽은 도중에 부르고뉴 지원군과 합세한 뒤 4월 6일 생드니에서 잉글랜드군 3,000명을 격파하여 생드니 요새를 공략하고 그들을 파리 성내로 밀어냈다.

1436년 4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고, 파리 시민들은 밀 가격이 4배로 뛰어오르는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주아인 미셸 드 랄리에, 장 드 라 퐁텐 등 4명의 시민이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자, 샤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군에 협력해 자신과 맞선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 16일, 프랑스군은 우회로를 이용해 파리 동쪽 끝에 있는 샹자크 항구로 진입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레 알르와 노트르담에 도착했다. 로버트 윌러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이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주민들이 창문에서 원거리 무기나 돌멩이를 던지는 등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자 바스티유 생 앙투안 요새로 도피했다. 4월 17일,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고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잉글랜드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요새를 떠나 루앙으로 철수했다. 그 후 샤를 7세는 1437년 11월 12일 파리에 입성했고, 난리를 피해 도망친 파리 시민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2.4.2. 퐁투아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에서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리슈몽은 여세를 이어가 1437년 페이 드 콕스를 공략했으며, 1439년 7월 모 요새를 포위해 8월 12일에 함락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1440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장 2세 달랑송, 샤를 1세 드 부르봉, 장 드 뒤누아, 도팽 루이가 샤를 7세의 왕권 강화 및 귀족 사병 해체 정책에 반감을 품고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리슈몽이 이끄는 토벌대가 반란군을 조기에 제압했고, 반란자들은 왕에게 용서를 구해 사면받았다.

1441년 5월, 프랑스군 5,000명이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샤를 7세는 프랑스군의 명목상 사령관을 맡았고, 실질적인 지휘는 리슈몽이 맡았다. 5월 8일 크레일 성채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장 뷔로의 중포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2주 만에 성벽을 뚫었다. 크레일 사령관 윌리엄 페이토가 5월 24일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속절없이 패배하고 다음날 노르망디로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제 프랑스군은 일드프랑스의 유일한 잉글랜드 거점이 된 퐁투아즈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경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파리의 물자 수송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6월 6일, 프랑스군이 퐁투아즈를 포위했다. 샤를은 모뷔송 수도원에 본부를 세웠고, 도팽 루이는 생마르랭 수도원에 자리잡았다. 장 뷔로의 포병대는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퐁투아즈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의 근거지인 루앙에서 퐁투아즈로의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센강에 루비에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존 드 클린턴이 지휘하는 퐁투아즈 수비대와 시민들이 요새를 철저히 경비하고 무너지려는 성벽을 재빨리 수리하는 터라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6월 중순,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탈보트가 이끄는 구원군이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야밤을 틈타 루비에 요새 수비대의 감시를 뿌리치고 퐁투아즈에 보급품과 대포를 전달했다. 이후 탈보트는 6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 다섯 차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퐁투아즈 시의 상류 수문을 통해 군대와 식량을 전달했다. 그의 군대가 워낙 신속하게 이동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기에, 프랑스군은 이들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리슈몽에게 탈보트의 군대를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7월, 요크 공작 리처드 드 플랜태저넷이 이끄는 맨앳암즈 900명과 장궁병 2,700명이 아르플뢰르에 이르렀다. 그는 첩자들을 통해 적진을 살펴본 뒤, 도팽 루이가 맡고 있는 전방의 적 진영을 공격하기보다는 우아즈 강을 도하해 샤를 7세의 진영을 공격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작전을 개시했다. 샤를 7세는 적의 접근에 놀랐지만 즉시 요격하자는 부하들의 진언을 거부하고 푸아시로 물러났다. 탈보트가 철수하는 샤를 7세의 군대를 뒤쫓아가며 여러 차례 전투를 신청했지만, 샤를 7세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후 요크 공작은 우아즈 강을 여러 번 건너서 파리에서 포위군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들을 무찌르러 출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일절 대응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8월 중순에 노르망디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이 물러나자, 샤를 7세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퐁투아즈를 포위한 뒤 포격전을 재개했다. 탈보트는 프랑스군을 도발하고자 주변 농지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흩어진 적병들을 습격할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퐁투아즈만 공격했다.

9월 15일, 피카르디 하급 귀족이었던 로베르 드 플로크스가 이끄는 소규모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의 국경도시인 에브뢰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시선이 분산되었고, 퐁투아즈에 대한 지원은 갈수록 약해졌다. 9월 16일, 프랑스군 분견대가 성벽을 뚫고 진격해 요새화된 성당을 점령하고 잉글랜드 수비병 30명 중 24명을 사살했다. 9월 19일, 프랑스군이 총공격을 가했다. 퐁투아즈 성채는 수많은 중포의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수비대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기에, 포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최전선에 서서 부하들을 끊임없이 격려했고, 장병들은 그런 왕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이를 악물고 돌격했다.

결국 성벽이 돌파되었고, 프랑스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적병 400~500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사령관 존 드 클린턴을 포함한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탈보트는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일드프랑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병사들을 수습한 뒤 루앙으로 철수했다. 샤를 7세는 항복이 아닌 무력으로 점령된 퐁투아즈 시의 모든 재산을 압수했고, 몸값을 지불한 존 드 클린턴과 장교 대부분을 석방했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을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이 일소되었다.

2.4.3. 가스코뉴와 노르망디 원정

1442년 5월, 샤를 7세는 리슈몽과 함께 12,000명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가스코뉴의 도시인 타르타로 출진했다. 6월 8일 툴루즈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6월 11일 그곳을 떠나면서 2개 부대로 나뉘어 리슈몽이 좌익을, 샤를 7세가 우익 부대를 맡았다. 리슈몽의 군대는 리슬과 그흐나드를 거쳐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생세베르를 우회하여 아두르강을 도하했고, 샤를 7세의 군대는 오슈, 비흐, 노가로, 르 호가를 통과했다. 여러 마을이 샤를 7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샤를은 굳이 이 곳들을 정벌하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주변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주둔지를 지키기만 했다.

1442년 6월 21일 몽드아르상에서 샤를 7세와 리슈몽의 군대가 합류했다. 샤를 7세는 6월 23일 푸아 백작이 소유한 메일한에서 휴식을 취한 뒤 6월 24일에 타르타에 도착했다. 잉글랜드군과 가스코뉴 동맹군은 타르타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 샤를과 샤를의 스승을 맡던 카우나 영주와 오제로 드 생페르는 타르타 성문 열쇠를 리슈몽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타르타를 접수한 샤를 7세는 여세를 이어가 가스코뉴 방면 공세를 개시해 닥스, 콩돔, 마르망드, 생세베르 등지를 공략했다. 다만 가스코뉴의 핵심 도시인 보르도와 바욘 공략에는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12월 8일 라 레울을 공략한 뒤 몽토방으로 철수하여 겨울을 보냈다. 1443년 봄 재차 가스코뉴 전역을 개시한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상당수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1442년 2월 2일, 아내 마르그리트가 병사했다. 이후 리슈몽은 샤를 2세 달브레의 딸 잔과 재혼했다. 그해 12월 브르타뉴로 돌아와서 조카인 프랑수아 1세가 렌에서 브르타뉴 공작으로 즉위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투르 협약을 체결하면서 휴전을 맺은 뒤, 리슈몽은 샤를 7세의 이름으로 자유 용병대를 제거하고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군대의 규율이 회복되었고, 1445년 상비군인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이 조직되었다. 이 칙령으로 선발된 직업군인과 용병들은 우선 '랑스'라 불리는 6인 분대로 조직되었다. 하나의 랑스는 전신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 하나, 가벼운 갑옷을 입은 승마궁수 둘, 도끼나 검으로 무장한 경기병 하나, 비전투원인 종자 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중대는 100개의 랑스로 구성되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임명한 대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총 2000개의 랑스와 20개의 중대를 유지하고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 칙령군은 정부나 지역 주민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평시에는 왕국 전역에 흩어져 배치되고 필요할 때만 모여야 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의 전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1444년 리슈몽의 두번째 아내 잔이 사망했다. 1445년 7월 2일, 리슈몽은 생폴 백작 룩셈부르크의 피에르의 딸 카트린 드 룩셈부르크생폴과 세번째로 결혼했다. 1449년 3월 24일, 잉글랜드 왕국에 고용된 용병대장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쉬리엔이 단독으로 그렇게 했을 뿐 자기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때마침 칙령군 조직이 완료된 뒤 전쟁을 재개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샤를 7세는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리슈몽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가 브르타뉴에서 노르망디로 동진했고, 장 드 뒤누아피에르 드 브레제일드프랑스에서 북상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피카르디에서 노르망디로 서진했다. 그들은 각각 코탕탱 반도, 하류 노르망디, 상류 노르망디로 진격해 강력한 대포를 활용하여 요새들을 빠른 속도로 공략했다. 당시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은 1444년 투르 조약 체결 후에도 심각한 정쟁에 휘말린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거나 탈영하는 등 군기가 지극히 문란해졌기에, 프랑스군의 합동 공세에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역할을 맡았던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머스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포미니 마을은 바이외로 향하는 도로 인근 얕은 계곡에 자리잡았으며, 개울이 마을 서쪽에서 흘러내렸고 그 위에 돌다리가 세워져서 도로와 연결되었다. 키리엘은 다리를 앞에 둔 채 군대를 편성했다. 900명의 하마 기사들은 일부 장궁병들과 함께 최선두에서 대열을 형성했고, 두번째 대열엔 다수의 장궁병들이 배치되었으며, 세번째 대열엔 창병대가 편성되었다. 최전선의 궁수들은 날카로운 말뚝을 박고 앞쪽에 얕은 참호를 팠다. 키리엘은 적이 다리를 건너오는 걸 일부러 내버려뒀다가 다리를 막 건너온 적에게 일제 공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려 했다. 그러는 한편, 남쪽에서 또다른 적군이 나타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부 기병을 그쪽으로 보내서 새로운 적의 출현 여부를 감시하게 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장 2세는 적을 포착하자 3개의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그는 적의 위치를 볼 때 다리를 무작정 건넜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고 여기고, 리슈몽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젊은 귀족들이 어서 저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도보로 도로를 따라 전진했고, 기마병들은 다리를 신속하게 건넌 뒤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했지만 적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격퇴되었다.

이때 장 뷔로가 포병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다. 포병들은 최선두로 가서 2개의 중포를 설치한 뒤 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이전의 부정확하고 연사 속도가 매우 느렸던 대포들과는 달리, 이번 대포는 상당히 정확했고 연사 속도도 빨라서 잉글랜드군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숙련된 잉글랜드 궁수들은 곧 냉정을 되찾았고, 일부 궁수들은 대열을 이탈하여 적 포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빠르게 제압한 뒤 대포 2문을 탈취해 잉글랜드 전선으로 가져갔다. 이에 프랑스 맨앳암스와 궁수대는 물러났고, 장 2세는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리슈몽에게 가서 어서 빨리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얼마 후,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남서쪽 방향에서 포미니 마을로 행군했다. 키리엘이 적이 오는 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잉글랜드 기병들은 리슈몽의 군대를 발견하고 본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장 2세가 보낸 주민들 역시 리슈몽과 만나서 서둘러 구원하러 와달라는 장 2세의 뜻을 전했다. 리슈몽은 부관들에게 행군을 계속 이끌게 한 뒤 본인은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 장 2세의 군대로 달려갔다. 두 장군은 곧 조우한 뒤 적을 어찌 상대할 지 논의한 끝에 장 2세가 공격을 재개하고 리슈몽은 남서쪽 방향에서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키리엘은 새로운 적이 나타나자 새로운 전선을 편성하기로 하고 전군에 이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탈취한 대포 2문을 끌고 가느라 행군이 지체되었고, 이동이 완료되기도 전인 오후 7시경에 리슈몽의 군대에 속한 기병 1,200명이 여전히 이동중이던 일부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가공할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피에르 드 브레제는 잉글랜드군 후방의 소규모 요새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 기병을 이끌고 그쪽으로 달려가 접수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아군이 적 기병대에게 궤멸되는 모습을 본 잉글랜드군의 전의는 급격히 떨어졌고, 많은 이들이 전투 대열을 이탈하고 달아나다가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키리엘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어떻게든 항전하려 했지만, 장 2세와 리슈몽의 합동 공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다만 매튜 고프를 비롯한 일부 기병은 전장을 탈출하여 바이외로 달아났다. 500명의 잉글랜즈 장궁병들은 개울 옆 정원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이리하여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구원군을 섬멸한 리슈몽은 공세를 계속 이어갔고, 1450년 7월 캉을 포위 공격한 끝에 수비대로부터 열쇠를 받아냈다. 이후 노르망디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인 셰르부르를 포위 공격한 끝에 1450년 8월 12일 셰르부르를 함락하면서 노르망디 완전 석권을 달성했다. 그 후 리슈몽은 샤를 7세로부터 노르망디 총독에 선임되어 주민들을 복속시키고 잉글랜드의 재침략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백년전쟁의 마지막 군사 작전인 가스코뉴 원정엔 참여하지 않았다.

2.5.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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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반 시의 시청 광장에 세워진 리슈몽의 동상

1450년 7월 19일, 프랑스군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던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가 돌연 사망했다. 이후 리슈몽의 두번째 조카인 피에르 2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피에르 2세 역시 1457년 9월 22일에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이에 따라 리슈몽이 새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샤를 7세는 몽타르지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했지만, 리슈몽은 전임자들처럼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1458년 5월 11일에 아래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나는 항상 샤를과 그의 왕국을 섬겼다. 나는 무관장이므로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내 공국은 왕국의 일부가 아니었고, 왕국이 분할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프랑스의 귀족이 아니다. 그리고 내 신민들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나는 몽타르지나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1458년 12월 26일, 리슈몽은 향년 65세에 낭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낭트의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세 차례 결혼했지만 자녀를 한 명도 낳지 못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게트 드 브르타뉴를 낳았다. 그녀는 리슈몽의 종자이자 렌 순경이었던 아르투스 브레센티엘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샤를 7세에 의해 리슈몽의 적출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위는 전임 공작 장 4세의 손자인 프랑수아 2세가 물려받았다.

3. 대중 문화에서

  • 문피아 대체역사소설《용병대장과 성녀》에서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등장. 명장이라고 묘사된 것치고는 그저 주인공의 전투력 측정기 수준으로 졸전을 거듭한 끝에 경질되며, 최후조차 언급되지 않고 샤를 7세에게 근신하라는 축객령을 듣는 걸 마지막으로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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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다르크 가문
관련 인물 미카엘 ·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카타리나
프랑스 원정군 동료 (질 드 레 · 라 이르 · 리슈몽)
적대적 인물 (헨리 6세 · 선량공 필리프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피에르 코숑)
주군 (샤를 7세)
관련 장소 잔의 생가 동레미라퓌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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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 원정이 벌어진 곳 루아르 · 랭스 행진을 통해 주군 샤를이 즉위한 곳 랭스
파리 공방전이 벌어진 곳 파리 · 잔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가 벌어진 곳 생피에르르무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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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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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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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동음이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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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91 ~ 1446, 라 구에르쉬 드 브르타뉴의 영주. 알랑송 백작 장 1세 달랑송의 부인.[2] 1392 ~ 1428, 로앙 자작, 포르호에 백작 알랭 9세 드 로앙의 부인.[3] 1394 ~ 1412, 샹토세쉬르루아르의 영주[4] 1395 ~ 1438, 베르투스 백작.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아버지, 안 드 브르타뉴의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