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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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 Alain IV | ||
이름 | 알란 4세(Alain IV) | |
출생 | 1060년 | |
브르타뉴 공국 샤토랭 성 | ||
사망 | 1119년 10월 13일 (향년 58~59세) | |
르동 생소뵈르 수도원 | ||
재위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 |
1084년 ~ 1115년 | ||
아버지 | 호엘 2세 | |
어머니 | 하와이즈 | |
형제 | 마티아스 2세, 아델, 하와이즈, 힐데베르게, 베네딕트 | |
배우자 | 노르망디의 콩스탕스, 앙주의 에르맹가르드 | |
자녀 | 코난 3세, 조프루아 르 루, 아녜스(또는 하와이즈), 브라이언 피츠카운트(사생아), 기요마르크(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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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2. 생애
1060년경 브르타뉴 공국의 샤토랭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코르누아이유 백작, 렌 백작, 낭트 백작, 그리고 최종적으로 브르타뉴 공작이 된 호엘 2세이고, 어머니는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의 딸이자 코난 2세의 누이인 하와이즈였다. 형제로 마티아스 2세[1], 아델[2], 화와이즈[3], 힐데베르게[4], 베네딕트가 있었다.1084년 4월 1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이후 조부와 아버지가 캉페를레의 성십자가 수도원에 부여한 모든 특권을 확인했으며, 샤토랭의 수문, 공장 및 어장을 란데베네크 수도원에 기증했다. 한편, 그는 코난 2세의 이복형제이며 렌 백작으로서 아버지 대에 브르타뉴 공국으로부터 독립한 렌 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를 물리치고 렌 백국을 되찾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이끌고 렌으로 진군했다.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는 렌에서 포위된 뒤 항복한 후 캉페를레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이후 알란 4세는 렌 백국을 직할령으로 삼고, 동생 마티아스 2세를 낭트 백작으로 세워서 삼촌이며 크코르누아이유 주교 브누아의 보좌를 받게 했다. 마티아스 2세는 1103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낭트 백국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귀속되었다.
알란 4세는 1086년 또는 1087년에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딸인 노르망디의 콩스탕스와 처음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1090년에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콩스탕스가 하인들에게 독살되었다고 기술되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1093년, 알주 백작 풀크 4세의 딸 에르맹가르드와 재혼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을 선포했을 당시, 브르타뉴는 평온했기 때문에 다른 브르타뉴 영주들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기로했다. 그 해 여름, 그는 레올 자작 에르베 1세, 게일과 몽포르 영주 라울 1세와 아들 라울, 팡티에브르 백작 조프루아 1세의 아들 코난, 리우 드 로에악, 쇼타드 당세니스 등과 함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십자군에 참가한 그는 1096년에서 1101년까지 5년간 브르타뉴를 떠났으며, 아내 에르맹가르드가 그를 대신해 브르타뉴를 다스렸다.
1101년 십자군에서 돌아온 알란 4세는 경건한 아내의 영향으로 종교 문제에 관심을 점점 더 가졌고, 렌 주교인 마르보드가 이끄는 세속 성직자 개혁을 지지했다. 그 영향으로, 세속 성직자 개혁을 주창한 보드리 드 부르게유가 돌(Dol)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루아르 수도원의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1100년부터 1112년까지 남아잇는 14개 기부 증서 중 7개는 루아르 계곡의 수도원들에 기부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106년, 알란 4세는 5월 4일부터 5월 19일까지 벌어진 캉데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편에서 승리에 일조했다. 또한 그해 9월 헨리 2세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벌인 틴체브레이에 참여해 헨리 1세의 승리에 일조했다. 헨리 1세는 그의 기여에 감사를 표했고, 그의 사생아인 브라이언 피츠카운트를 윌링포드의 영주로 선임했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에 따르면, 1113년 3월에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와 오르메토페레에서 만난 뒤 브르타뉴의 주권을 헨리 1세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 왕의 봉신에 속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알란 4세가 헨리 1세와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건 분명하다. 그는 자기 아들 코난 3세를 헨리 1세의 사생아인 마틸다 피츠로이와 약혼했다. 1115년, 알란 4세는 공작에서 퇴위하고 코난 3세에게 넘긴 뒤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1119년 10월 13일에 사망했고, 사후에 그곳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노르망디의 콩스탕스(1061/1065 ~ 1090):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딸.
- 앙주의 에르맹가르드(1067 ~ 1146): 앙주와 투르 백작 풀크 4세의 딸.
- 코난 3세(1095/1096 ~ 1148): 브르타뉴 공작.
- 조프루아 르 루(? ~ 1116):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
- 아녜스 또는 하와이즈(1102 ~ 1118):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의 아들인 보두앵 7세의 부인.
- 사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