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1:53:08

알릭스 드 투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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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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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여공작
알릭스 드 투아르
Alix de Thouars
파일:알릭스 드 투아르.jpg
이름 알릭스(Alix)
출생 1200년
브르타뉴 공국 낭트
사망 1221년 10월 21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지위 브르타뉴 여공작
1203년 ~ 1221년
아버지 기 드 투아르
어머니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형제 카트린, 마르그리트
배우자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자녀 장 1세, 욜랑드, 아르튀르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2. 생애

1200년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인 낭트에서 기 드 투아르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의 장녀로 출생했다. 형제로 카트린[1], 마르그리트[2]가 있었다. 1201년 어머니 콩스탕스가 사망한 뒤 리치먼드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1202년, 이부 형제이자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가 잉글랜드 국왕 존 왕에 대적했다가 생포되었다. 그 후 그는 루앙 탑에 갇혀 지내다가 1203년경에 실종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아르튀르 1세의 여동생인 엘레오노르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존 왕에게 체포된 뒤 브리스톨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에 귀족들은 알릭스를 여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녀의 아버지 기 드 투아르는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브르타뉴 보안관을 맡기로 했다.

1209년,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중재 아래 기 드 투아르와 기 드 투아르와 팡티에브르 백작 알란 1세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기의 장녀 알릭스는 알란 1세의 어린 아들 앙리 1세 다보구르와 약혼하기로 했으며, 브르타뉴 귀족들이 앙리 1세 다보구르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1212년 12월 29일 알란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기 드 투아르의 충성심과 권위를 그다지 확신하지 못했고, 기 드 투아르가 존 왕에게 자기 자식의 후견권을 맡길 것을 우려했다. 이에 자신의 충실한 기사인 피에르 드 드뢰를 알릭스와 짝지우기로 했다. 이리하여 알릭스와 앙리 1세 다보구르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피에르 드 드뢰와 알릭스는 1213년 1월 27일 약혼식을 거행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기 드 투아르는 이로부터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1213년 4월 13일에 사망했다.

1214년 2월 또는 3월, 알릭스와 피에르 드 드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피에르는 알릭스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가 되었다. 1221년 10월 21일 알릭스가 사망한 뒤, 피에르 1세는 브르타뉴 공작이 된 장남인 장 1세를 대신해 1237년까지 브르타뉴 공국의 보안관으로 남았다. 알릭스는 낭트 인근의 남쪽의 소리니에르에 위치한 빌뇌브 수도원에 묻혀 있던 어머니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1225년 112월 24일, 그녀의 딸 욜랑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금도금 및 에나멜 구리로 만든 묘비를 세웠다. 이 묘비는 프랑스 혁명 중에 파괴되었지만, 묘비에 새겨진 그림은 17세기 프랑스 역사가이자 그림 및 판화 수집가인 프랑수아 로제 드 게니에르(François Roger de Gaignières, 1642 ~ 1715)의 컬렉션과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브르타뉴 역사가 기 알렉시스 로비노(Guy Alexis Lobineau, 1667 ~ 1727)의 <브르타뉴의 역사> 삽화에 보존되었다.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이 무덤에 묻힌 행복한 브르타뉴 여백작은 순수함에서 비둘기와 동등했다. 그녀는 겸손한 부를 누렸고, 세상이 그녀를 비열하게 대하는 와중에도 세상을 기쁘게 했다. 그녀의 삶은 마침내 행복한 죽음으로 끝났고, 고귀한 알릭스는 이 수녀원의 형제들을 먹여살렸다.

3. 가족

  •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1187 ~ 1250): 드뢰 백작 로베르 2세 드 뢰의 아들, 브르타뉴 공작(1213 ~ 1221), 브르타뉴 보안관(1221~ 1237).
    • 장 1세 드 브르타뉴(1217 ~ 1286): 브르타뉴 공작.
    • 브르타뉴의 욜랑드(1218 ~ 1272): 앙굴렘, 팡티에브르, 라 마르쉐 백작이자 뤼지냥 영주인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부인.
    • 아르튀르 드 브르타뉴(1220 ~ 1224): 크라옹 영주이자 앙주 세네샬인 아이머리 1세의 딸인 잔과 약혼했지만 요절했다.


[1] 1201 ~ 1237/1240, 비트리 남작 앙드레 3세의 부인[2] 1201 ~ 1220, 로앙 자작 조프루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