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3:53:52

장 1세 드 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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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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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장 1세 드 브르타뉴
Jean Ier de Bretagne
파일:장 1세 드 브르타뉴.jpg
이름 장(Jean)
출생 1217년
브르타뉴 공국 낭트
사망 1286년 10월 8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지위 브르타뉴 공작
1221년 ~ 1286년
아버지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어머니 알릭스 드 투아르
형제 욜랑드, 아르튀르, 올리비에
배우자 나바라의 블랑카
자녀 장 2세, 피에르, 알릭스, 티보, 티보, 엘레오노르, 니콜라, 로베르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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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 생애

1217년경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인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와 브르타뉴 여공작 알릭스 드 투아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욜랑드[1], 아르튀르[2]가 있었다. 4살 때인 1221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고, 아버지 피에르 1세는 브르타뉴 보안관 자격으로 그의 섭정이 되었다. 1237년 11월 16일 성년이 되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정식으로 브르타뉴 공국 통치를 맡았다.

그는 먼저 반란을 일으킨 크라옹 자작 피에르를 복종시켰고, 1241년 9월 8일 브르타뉴 영주들을 소집해 자신에게 충성 맹세하도록 한 뒤 멜룬에서 루이 9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42년 영국과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시농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지만, 내심 잉글랜드 국왕을 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지극히 소극적으로 임했다. 124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자, 124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접촉해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들 장 공자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딸인 베아트릭스의 약혼을 성사했다. 한편, 그는 1236년에 샹파뉴 백작이나 나바라 국왕인 티발트 1세의 딸 블랑카와 결혼했는데, 티발트 1세는 지참금으로 나바라 왕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티발트 1세가 아들 티발트 2세를 낳으면서 논란이 생기자, 장 1세는 1254년 연간 3천 파운드의 금전적 보상을 받는 대가로 나바라 왕국 승계를 포기하기로 했다.

1240년 4월 10일, 플로에르멜에서 열린 공작 회의에서 고리대금업을 종식하겠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전역에서 유태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1259년 3월 28일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그해 11월 아들 장 공자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생드니 대성당에서 거행했다. 1268년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를 장 공자에게 넘겼고, 루이 9세가 튀니지 십자군을 단행할 때 작은 아들 피에르에게 브르타뉴군을 이끌고 가세하게 했지만, 피에르가 사망하자 자기가 장남 장 공자와 함께 참여했다. 그 해 8월 25일 루이 9세가 튀니지에서 병사하자 브르타뉴로 돌아왔고, 장 공자와 처남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는 십자군과 함께 시리아로 가서 1273년 상반기까지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 1세는 1237년 친정을 시작한 이래 49년간 이어진 오랜 통치 기간 동안 공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렸으며, 종종 길고 숙련된 법적 절차와 관련된 인수를 통해 영토를 확대했다. 그는 1240년 3월에 레옹 자작 에르베 3세로부터 브레스트 요새를 구입했으며, 1265년에서 1276년 사이에 뒤이어 레옹 자작이 된 뒤 자금난에 시달리던 에르베 4세로부터 레옹 자작령의 모든 권리와 영토를 점진적으로 인수했다. 또한 생마티외 세관을 1265년부터 3,000 리브르에 임대해 1275년에 훨씬 많은 돈을 받고 매각했으며, 1274년 2월 12일 콩케 성을 인수했으며, 1276년 10월 26일 처남인 롤랑 드 디낭몽타필랑으로부터 플루곤벨린, 생 르낭의 플루아르젤 성을 7,210 리브르에 인수했다. 이외에도 1250년경에 무질락 성을 획득했고, 1265년경에 구랭 자작령을 획득했으며, 아들 피에르는 헤데 성을 인수했다. 여기에 라 로슈디낭의 잔과 소송전을 벌인 끝에 라로슈드낭 일대를 30,000 리브르에 구입했다. 1272년에는 로한 자작과 공모해 랑보의 조프루아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로 그의 영주권과 다른 영지를 가져갔다.

그가 영지를 확보하기 위한 집념이 대단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아바구르 영주 알란 2세가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물려받은 영지 전체를 16,000 투르누아 리브르에 사들인 일을 들 수 있다. 이 거래는 1264년에 성사되었지만, 알란 2세의 아버지 앙리 2세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여기고, 1267년 파리 왕립 재판소에 손자인 앙리 3세의 이름으로 아들이 "광기, 방탕, 통치 무능"하므로 거래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재소했다. 이후 법정 공방은 1283년까지 16년간 쭉 이어졌는데, 그 결과 라글과 디낭 절반이 브르타뉴 공작에게 양도되고, 나머지 영지는 앙리 2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앙리 3세는 1286년 장 1세가 사망한 뒤에야 자기 몫이었던 디낭과 라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 1세는 아버지 피에르 1세와 마찬가지로 브르타뉴 성직자들과 갈등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1240년 로베르 주교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로 부임하면서 낭트 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그는 새 주교가 부임할 때까지 자기가 관리하겠다며 그곳의 수입을 공작 국고로 돌렸다. 이후 새로 선출된 낭트 주교 갈레란이 교황령에 불만을 제기하고 공작을 파문했으며, 낭트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장 1세는 1247년에 그에게 용서를 빌고 파문을 해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 1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1230년 아버지 피에르 1세에게 내린 교령에서 피에르 1세의 이름을 직접 명시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만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 교령에 기재된 사안을 따르지 않겠다고 나오자, 분쟁이 또 벌어졌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태도를 바꿀 것을 권고했지만 따르지 않자, 낭트 주교 갈레란은 1249년 재차 파문을 선고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집을 부리다가 1256년 4월 7일 교황령에 사절을 보내 사죄하면서 분쟁을 끝냈다. 이렇듯 성직자들과 마찰을 벌이는 와중에도 아내 블랑카와 함께 시토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그들이 설립한 수도원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1272년 5~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푸아 백작 로제 베르나르 3세를 상대로 원정을 떠났을 때 기사 60명과 함께 가담했으며, 1285년 필리프 3세가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후 발발한 아라곤 십자군을 이끌었을 때 장남이자 후계자인 장 공자에게 브르타뉴 기사단을 맡겨 가담하도록 했다. 1286년 10월 8일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 낭트에서 사망했고, 빌리에르 마을에 있는 노트르담 드 프리에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1726년 브르타뉴 공작 3세의 부인이었던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의 뼈와 한 석관에 나란히 놓여서 새 교회에 안치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후 수도원은 폐허로 변했다. 1841년 수도원 잔해에서 그와 이사벨라의 뼈가 들어 있는 석관 유적이 발견되었고, 1842년 재건된 예배당에 옮겨졌다.

3. 가족

  • 나바라의 블랑카(1226 ~ 1283): 상파뉴 백작이나 나바라 왕국의 국왕 티발트 1세와 보주 백작 기샤르 4세의 딸인 보주의 아네스의 딸.
    • 장 2세(1239 ~ 1305): 브르타뉴 공작, 리치먼드 백작.
    • 피에르(1241 ~ 1268): 디낭, 헤데, 레옹, 엔봉 및 라 로슈디낭 영주.
    • 알릭스(1243 ~ 1288): 블루아 및 샤르트르 백작 장 1세 드 블루아샤티옹의 부인.
    • 티보(1245 ~ 1246): 요절.
    • 티보(1247년 11월 9일): 출생한 직후 사망했다.
    • 엘레오노르(1248): 출생한 직후 사망했다.
    • 니콜라(1249 ~ 1251): 요절.
    • 로베르(1251 ~ 1259): 요절.


[1] 1218 ~ 1272, 앙굴렘, 팡티에브르, 라 마르쉐 백작이자 뤼지냥 영주인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부인.[2] 1220 ~ 1224, 크라옹 영주이자 앙주 세네샬인 아이머리 1세의 딸인 잔과 약혼했지만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