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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 | 바오로 6세 | 요한 바오로 1세 | 요한 바오로 2세 | 베네딕토 16세 | ||||||
제266대 | ||||||||||
프란치스코 | }}}}}}}}}}}} |
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177대 호노리오 3세 | → | 제178대 그레고리오 9세 | → | 제179대 첼레스티노 4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그레고리오 9세 |
출생 | 1170년 |
사망 | 1241년 8월 22일 (향년 70~71세) |
재위 | 제178대 교황 |
1227년 3월 19일 ~ 1241년 8월 22일 |
[clearfix]
1. 개요
제178대 교황.2. 생애
전전임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로, 1145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1] 본명은 우골리노 데이 콘티 디 세니(Ugolino dei Conti di Segni).막강한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인 덕분에 파리와 볼로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1198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206년 오스티아 교구 주교 추기경을 지냈고, 이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동을 정력적으로 지원하였다.[2] 실제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요청에 따라 프란치스코회의 후원자를 자침하였고, 글라라 수녀회의 회칙과 재속수도회인 제3회의 회칙 작성을 맡기도 했다. 1227년 3월 18일 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사망하자 바로 다음날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즉위하자마자 1228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1232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이단자에 대한 망치'로 불린 교회학자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1236년에는 독일 출신의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엘리자베트 튀링겐을 시성하였다.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지속적인 옹호와 지원, 관심 외에도 그레고리오 9세는 또다른 강력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도 지원하였다. 이를 위해 1234년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코를 시성하였고, 당시 급속히 세력을 불린 프랑스의 알비파를 상대하기 위해 도미니코회에 이단심문 권한을 주었다. 이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권리는 막강하여 주교들이 반발하기도 했으나, 교황은 도미니코회를 옹호하였다.[3] 한편 1230년에는 라이문도(Raimundo)[4] 로 하여금 1918년까지 700년(!) 가까이 유효했던 교회법전을 편찬하도록 위임하기도 했다.
이 외에 그레고리오 9세 시기에 가장 치열했던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15~1250)와의 권력투쟁이었다. 독일 슈바벤 외에도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남북으로 교황령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라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2세는 시대를 앞서간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문화에 개방적이고 비종교적인 인물. 교황이 이런 성향의 황제에게 불신을 가지고 적대했고, 결국 교황과 황제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는 제4차 십자군의 탈선, 제5차 십자군[5]의 실패 등으로 위축된 동방 십자군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요구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이 자기 영토를 공격할 것을 걱정한 데다 비종교적인 성향 탓에 원정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레고리오 9세가 파문으로 위협하며 강력하게 요청하자 결국 제6차 십자군을 실행했는데, 도중에 병을 얻었다는 이유로 귀국했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에 처했고, 이 조치에 분노한 황제파 세력이 로마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바람에 교황은 페루자로 피신해야 했다.
시칠리아에서 정양한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6월 20일, 파문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출정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1229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기독교 세력은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포함한 성지를 확보하였고[6], 자유로운 순례도 허용되었다. 기한은 10년 6개월로 한시적이었는데, 아이유브 왕조 쪽에서 갱신을 원했기에 일단 1244년까지 15년 동안은 예루살렘이 기독교 측에 일시적으로 귀속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 쪽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한 성공이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파문이 여전히 유효했기에 성지 전체가 파문에 처해지는 일이 일어났다.[7]
어쨌든 프리드리히 2세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교황의 요구대로 십자군 원정을 잘 수행했기에 교황은 명분상 파문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1230년 파문령을 물리고 황제와 일시적으로 화해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를 둘러싼 영토 문제로 두 사람은 대립을 끝내지 않았고, 결국 1239년 교황이 다시 황제를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번에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교황령을 위협하였다.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압박하는 가운데, 그레고리오 9세가 사태 타개를 위해 소집한 시노드는 황제가 주교들의 참석을 방해했기에 개최조차 되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결국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은 간신히 끝났다.
3. 여담
여담으로 고양이 학살에 대한 1등 공신이다. 1233년 6월 13일, 고양이는 악마의 분신이라 무조건 죽이고 키우는 사람도 처벌한 근거가 된다는 칙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1] 이곳은 130년 뒤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파 이탈리아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수난을 당한 '아나니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2] 이 과정에서 엄격한 청빈을 강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놓고 논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였다. 이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강조한 엄격한 청빈함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나, 좀더 온건한 규율로 더 많은 수도회원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둔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프란치스코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형제회로 갈라지게 된다.[3] 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성과 할거성이 강했던 중세 지방교회를 통제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도미니코회는 교황에게만 충성하고 순명하였으므로, 교황 직속의 이단재판관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은 지방에 토지를 갖고 지방 권력자와 밀착하기 쉬운 주교들에 대한 강력한 견제 카드이기도 했다.[4] Raymond of Penaport. 스페인 출신의 법률가로 21세기에도 도미니코 수도회 내에서 유명했던 장상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일례로 교회법전 편찬이 끝난뒤 고령의 나이(당시 70세)와 건강을 이유로 총회에서 은퇴를 신청한게 받아들여졌는데, 다음회 총회에서 이 사실이 밝혀지자 분노한 도미니코 회원들이 은퇴를 허락했던 당시 장상들을 전부 경질시켰다(...). 이유는 이렇게 귀중한 인력을 낭비했다는 이유.[5] 1215년 실시된,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의 실패한 원정. 일부에서는 정규 십자군 원정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6] 이슬람 성지인 오마르 모스크만은 예외로 하였다.[7]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개의치 않고 1229년 3월 17일 예루살렘에 입성해 성지와 성소들을 순례하고 참배하였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성지 예루살렘에 입성한 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