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23:37:15

도미니코

1. 개요2. 초기 생애와 활동3. 도미니코 수도회4. 창작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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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 Dominic-FounderSaint-FCP-s.jpg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모셔진 전신상

라틴어: Sanctus Dominicus
영어: Saint Dominic
프랑스어: Dominique
스페인어: Santo Domingo de Guzmán

가톨릭수사신부이자 성인. 축일은 8월 8일[1].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

2. 초기 생애와 활동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1170년 스페인 카스티야, 칼레루에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지만 1~2년 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영주였고, 어머니는 그 지방의 귀족 출신이었다. 팔렌시아에서 공부한 뒤, 1196년경 오스마 주교좌 성당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채택한 의전 사제단[2]에 가입하여 몇 년 뒤 부원장이 되었다. 1203년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가 궁정 선교단의 일원으로 덴마크에 파견되었을 때, 도미니코도 함께 갔다.

도미니코는 이 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남프랑스에서 이단 알비파와 카타리파가 교회에 가하고 있는 위협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이단자들은 이라는 2가지 최고 존재가 각각 영혼과 물질을 지배하고 있으며[3], 먹고, 마시고, 출산하고, 세상의 물건을 소유하는 육체와 관계된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이런 육에 관련된 일과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마니교의 교리를 부활·발전시켰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철저히 금욕생활을 하는 '완전한' 계층이 생겨난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체계가 잡힌 알비파 성직 위계제가 생겨났고, 지방의 봉건영주들, 특히 툴루즈의 백작은 알비파를 지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막을 것을 호소했다.

2번째 여행에서 도미니코와 디에고 주교교황을 방문했으나, 교황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으므로[4] 그들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1206년 교황의 사절과 설교자들이 복음 전파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해져서 주교와 도미니코에게 의논하러 왔을 때, 주교와 도미니코는 그들도 자신들처럼 맨발로 길을 걷고 청빈한 생활을 하는 등의 금욕적인 실천[5]을 해야만 이교도를 개종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도미니코의 '복음 전파 설교' 의 시초이다. 그는 1206년 이교에서 개종한 한 무리의 여성들로 구성된 수녀원을 프루예에 설립했는데, 이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1208년 교황사절 '카스텔노의 베드로' 가 툴루즈의 백작이 보낸 밀사에 의해 살해되자[6][7], 교황그리스도교를 믿는 군주들에게 전쟁을 시작하도록 요청했다. 교황 측 지도자는 프랑스 왕의 신하 몽포르의 시몽이였고, 알비파의 지도자는 툴루즈의 백작이고, 프랑스 왕의 적대자이며 잉글랜드 존 왕의 처남인 아키텐의 영주 레몽 6세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도미니코의 활동은 프루예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계속되었고 마침내 다른 6명이 더 가담했다. 오랫동안 끌어온 전쟁은 1213년 뮈레에서 시몽의 승리로 끝났다. 가톨릭 세력이 툴루즈에 입성했고, 도미니코와 그의 친구들은 주교 마르세유의 풀케의 환영을 받았으며 1215년 주교 설교자로 선정되었다.

3. 도미니코 수도회[8]

그해 폴케 드 마르세유의 헌장을 보면 설교에 중점을 둔 도미니코의 수도회 계획은 급격하게 발전했는데, 이 계획의 특징은 회원들에게 신학적인 기반을 형성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도미니코는 회원들을 영국인 알렉산더 스타벤스비가 툴루즈에서 하는 강의에 데리고 갔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가하는 폴케 드 마르세유와 로마에 가서 그의 계획을 교황에게 제출했으나, 교황은 현존하는 수도회의 회칙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도록 권유하면서 "수도회가 아니라 기존의 규칙서를 채택한 설교단을 창설하고 싶다" 는 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권유했다. 도미니코에는 불행하게도 그가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을 금지하기로 한 법령이 비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도미니코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만났다고 한다. 이 두 성인의 우정을 통해,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 모두 강력한 전통을 형성했다.

1216년 여름 도미니코는 16명의 동료들과의 회합을 위해 툴루즈로 돌아갔다. 이 회의는 ' 창립회'(capitulum fundationis)라고 부르며 부분적으로 정식 교회법에 근거를 둔 성직, 수도원 생활, 종교적인 청빈에 관한 일련의 '규범'(consuetudines)과 성 아우구스티노 회칙을 채택했다. 이들은 지금도 도미니코회 회칙의 핵심을 이룬다. 1216년 7월 인노첸시오 3세가 세상을 떠나자 도미니코는 다시 로마로 갔는데, 결국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도미니코회에 대한 공식승인을 받았다 (1216. 12. 22).

도미니코는 그의 이상을 구상하고 수도회원들을 그의 이상에 따라 단련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명료한 비전의 제시[9], 확고한 명령, 정확한 집행 등 뛰어난 지도력이 있었고, 성격이 온화해서 그에게 이야기하러 온 사람, 심지어 책망을 하러 온 사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남은 생애를 산시스토 교회가 있는 로마에서 살았고, 많은 시간을 여행을 하며 보냈다. 1218~19년 로마에서 툴루즈와 스페인으로 갔다가 다시 파리밀라노를 거쳐 로마로 되돌아오는 긴 여행[10]을 했고, 1220년에 롬바르디아를 여행했다. 어디서나 그가 세운 수도원은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프랑스와 북이탈리아 주요지역에 새로이 많은 수도원 설립을 계획했다. 로마에서 교황은 그에게 다양한 수녀회를 개혁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는데, 1221년 도미니코는 마침내 수녀들을 산시스토에 모았다. 그때 수사들은 도미니코회 총본부가 있는 산타사비나로 옮겨갔다.

1220년 오순절에 첫 번째 총 수도회 참사회의가 볼로냐에서 열렸고, 민주적인 대표행정체계가 고안되었다. 도미니코는 이 회의에서 원치않았지만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곧 건강을 이유로 사퇴했다. 2번째 총회도 1221년 오순절에 볼로냐에서 열렸으며 수도회는 지역적으로 여러 관구로 나누어졌다. 도미니코는 1221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뒤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성 도미니코가 그의 주변에서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남긴 소중한 마지막 유언은 이러하다.

"서로 서로 형제들 간에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여라."

4.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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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1] 최초에는 8월 6일이었는데 "주님의 거룩하신 변모 축일" 때문에 후에 이틀 뒤인 8월 8일로 변경되었다.[2] 이때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접한 경험이 후에 수도회를 창설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3] 기독교 내부에서는 흔히 영지주의라고 부른다.[4] 1203년에 이미 시토회 회원들이 설교 권한을 받아 출발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절된것.[5] 일부 당시 자료와 도미니코회의 측의 이야기에 따르면, 시토회가 설교를 위해 너무 많은 재산들을 준비해 갔기 때문에, 당시 가난했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는 바람에 설교에 실패했다고 한다.[6] 도미니코회 2대 총장인 복자 삭소니의 죠르단의 기록에 따르면 카스텔노의 베드로의 죽음은 도미니코회가 전혀 원하진 않던 전환점이었지만 정작 그가 암살 당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았다고 한다. 교황대사가 매일같이 공공장소에서 이단자들을 도발했기 때문.[7] 미국 출신 도미니칸 William A. Hinnebuch가 저술한 'The Dominicans : A Short History'에 따르면 당시 반응은 거진 "언젠간 암살 당할 줄 알았는데 진짜 암삼당했네;" 급.[8] 도미니코 수도회의 별칭은 Domini canis이다. 라틴어로 '주님의 개'라는 뜻이지만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을 뜻하는 라틴어 표현 Dominicani를 의도한 말장난이기도 하다.[9] 그의 회원들의 지역배치와 정확한 수도회칙의 세부규정들에 이르기까지.[10] 약 5442 km를 완전히 걸어서 여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