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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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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머스 몬타구.jpg
성명 토머스 몬터규
Thomas Montagu
출생 1388년 6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솔즈베리
사망 1428년 11월 3일
프랑스 왕국 오를레앙
아버지 존 몬터규
어머니 모드 프랜시스
형제자매 리처드, 앤, 마가렛, 엘리자베스
아내 엘레노어 홀랜드, 앨리스 초서
자녀 앨리스
직위 솔즈베리 백작, 가터 기사단 기사, 노르망디 공국 총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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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제4대 솔즈베리 백작.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아 "모든 잉글랜드 장군 중 가장 능숙하며 경험이 풍부하고 성공한 장군"으로 일컬어졌지만, 오를레앙 공방전 초반에 전사했다.

2. 생애

1388년 6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솔즈베리 백작령에서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와 런던 시장 아담 프랜시스의 딸인 모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400년 1월, 아버지가 헨리 4세와 자식들을 모조리 죽이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처형된 뒤, 솔즈베리 백작령은 왕실에 몰수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매우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지만,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이자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의 자매인 엘레노어 홀랜드와 결혼하면서 얻은 아내의 영지 덕분에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1409년 6월 14일, 토머스는 헨리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아버지 영지 일부를 돌려받았다. 그해 10월, 그는 솔즈베리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1421년 헨리 5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솔즈베리 백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했고, 웨일스에서 발발한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으며, 1412년에는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후원을 받았다.

1414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잉글랜드 국왕 대표로 프랑스를 처음으로 방문해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과 헨리 5세의 결혼 가능성을 타진했다. 1415년 4월 16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헨리 5세의 합법적인 유산을 보장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는 데 찬성했으며, 7월에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등이 헨리 5세를 암살하려 한 사우샘프턴 음모가 적발된 뒤 이를 심판한 7명의 위원회에 소속되어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기사 3명, 종자 36명, 기마궁수 80명을 이끌고 왕의 원정에 가담한 뒤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0월 아쟁쿠르 전투에 참전해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415년 11월 중순 헨리 5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1417년 7월 왕과 함께 다시 프랑스에 상륙한 뒤 2차 캉 공방전 중에 후방 경비대를 지휘했으며, 루앙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1419년 노르망디 총독에 선임된 뒤 프랑스 영토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1420년 트루아 조약 체결에 참여해, 헨리 5세가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하면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3월 3일 프레네 성을 공략했으며, 프레네를 구원하려 온 아르마냑파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1421년 1월, 헨리 5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분쇄하고 본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카트린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로 떠났다. 클라렌스 공작이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헨리 5세를 대신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4,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뒤 1421년 3월 중순 파리 서쪽 베르네에서 출발해 앙주의 수도 앙제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토머스 몬타구 역시 이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군은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앙제를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1421년 3월 22일, 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정찰을 나갔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랭커스터의 토머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심문 끝에 아군이 보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랭커스터의 토머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장군들은 대부분의 장궁병들이 식량을 수집하기 위해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며, 잉글랜드군의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모두 모일 때까지 출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방어 상태가 어떤지 등의 정보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랭커스터의 토머스는 지금 즉시 기습을 가하면 적이 전의를 잃고 도망칠 거라며 반대 의견을 일축하고 진영에 남아있던 2,5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면서 솔즈베리 백작에게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을 뒤따르게 했다.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지시에 따라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하던 토머스 몬타구는 보제 전투에서 아군이 참패했고 랭커스의 토머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패잔병들을 모은 뒤 다음날 새벽에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유해를 수습한 뒤 서둘러 철수했다. 그러다가 르망에서 온 주민들이 휘스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중앙 부분을 철거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자, 흰색 십자가가 달린 프랑스식 휘장을 착용한 잉글랜드 궁수병들이 다가와서 "우리는 프랑스 군인들이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은 그 말에 속아 다리를 수리해줬다가, 본색을 드러낸 잉글랜드군에게 학살당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이후 샹파뉴와 브리 지방의 총독에 선임되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 후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하면서, 헨리 5세의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프랑스 서부 도시 부르주를 중심지로 삼고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던 샤를 도팽은 지금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력이 닿는 지역에 전령을 잇따라 보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 하니 프랑스를 구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남부 전역의 장정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고, 아라곤, 롬바르디아에서도 용병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1423년 여름, 보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스코틀랜드 장군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방돔 백작 루이가 이끄는 8,000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오셰르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욘 강에 있는 크라방을 먼저 공략한 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헨리 5세의 섭정을 맡고 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은 이 소식을 접하자 토머스 몬타구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크라방을 구원하게 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아르투아의 본은 1,000명의 부르고뉴군을 파견해 잉글랜드군과 합류하게 했다.

1423년 7월 29일 오세르에 집결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오세르 대성당에서 전쟁 회의를 개최했다. 토머스 몬타구는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고, 부르고뉴 장군들은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7월 30일 오세르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욘 강의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크라방에서 4마일 떨어진 지점에 이른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은 욘 강변에 숙영지를 세웠다. 토머스 몬타구는 적을 발견한 뒤 그들이 설치한 숙영지를 공격하기엔 지형이 너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몇 마일을 되돌아가서 욘 강을 건너기로 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몇 마일을 되돌아가 빈셸스에 있는 욘강 서쪽 제방을 건넌 뒤 크라방 마을 맞은편에 이를 때까지 서쪽 강둑을 따라 행진을 이어갔다. 이윽고 마을 맞은 편에 도착한 연합군은 적군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크라방으로 다시 이동해 욘 강과 마을 성벽 사이의 제방을 장악하고 욘 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토머스 몬타구는 최전선에 잉글랜드군 2개 사단을 배치하고 부르고뉴군을 그 뒤에 배치한 뒤 강을 도하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전투 대형을 형성한지 3시간 후, 토머스 몬타구는 "성 조지! 배너(Banners)여, 전진하라!"라고 외치며 도하 명령을 내렸다. 이에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강으로 돌진했고,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강 건너편에 있는 프랑스군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부르고뉴군이 뒤를 따라갔고,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윽고 욘 강변에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우익 사단은 성문으로 이어지는 욘 강 다리를 공략하기 위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을 몰아붙여 조금씩 전진했다.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크라방에 주둔하고 있던 부르고뉴 수비대는 적군이 다리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출격해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 후방을 요격했다. 그러자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은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롬바르드인과 아라곤인이 먼저 대열을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프랑스인들이 뒤따라 도주했다. 반면 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도주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섬멸되었다. 특히 다리에 갇힌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몰살당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군은 크라방 전투에서 1,200명을 상실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스코틀랜드 사령관 존 스튜어트, 프랑스 사령관 방돔 백작 루이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스튜어트는 한쪽 눈을 잃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미미했을 것이다. 샤를 도팽은 생포된 장군들을 데려오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이후 토머스 몬타구는 노르망디 총독으로서 1425년 8월 르망을 공략하는 등 아르마냑파에 속한 요새와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1424년 8월 17일, 토머스 몬타구는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해 좌익 부대를 이끌고 아군의 대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승전을 전한 뒤 추가 병력을 모집했다. 1428년, 베드퍼드 공작 존은 전쟁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도팽 샤를을 끝장내기 위한 오를레앙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사실 베드퍼드 공작 본인은 처음엔 오를레앙보다는 앙주의 중심지인 앙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토머스 몬타구는 앙제를 공략한들 도팽 샤를의 저항은 계속 이어질 거라며, 루아르 강변의 핵심 거점인 오를레앙을 공략한 뒤 루아르 강을 도하한 후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를 포위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당시 잉글랜드의 포로였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소유인 곳을 압수하는 것은 기사로서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겼기에 망설였지만, 다른 장성들이 토머스 몬타구의 주장에 동조하자 마음을 달리 먹고 오를레앙 공략을 지시했다.

1428년 8월, 파리에서 출발한 토머스 몬타구의 군대는 도중에 부르고뉴군과 피카르디 방면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했다. 총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마다 판이한데, 현대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르고뉴군 1,500명을 합쳐 5,000명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들은 처음엔 앙주로 향하여 이전에 도팽 샤를의 지지자들이 점령한 4개의 도시를 탈환하고 8월 하반기에 샤르트르를 공략한 후 남동쪽의 진빌로 진군해 역시 함락한 후 후방의 식량 창고로 삼았다. 이후 자르조, 보장시, 멘 일대를 공략해 오를레앙으로 접근하는 루아르 강 경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10월 12일 오를레앙에 도착한 토머스 몬타구는 구원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고 여기고 공세를 개시해 오를레앙 인근의 올리베 마을을 장악하고 프랑스군을 루아르 강의 오른쪽 강둑에서 밀어냈다. 그 후 오를레앙 인근의 루아르 강 동쪽 강변에 있는 134m 높이의 몽생로방 언덕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오를레앙 시민들은 이에 맞서 오를레앙 교외의 모든 주택을 파괴해 적의 피난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고, 주변의 농지와 숲을 황폐화시켜서 적이 오래 머무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은 투렐 요새를 공격했지만 치열한 백병전 끝에 격퇴되었다. 이후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투렐 요새 앞의 토성을 곡괭이로 파헤치기로 했다. 이 시도는 성공했고, 토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투렐 요새로 도주했다. 토머스 몬타구는 토성이 있던 곳에 대포를 배치한 뒤 투렐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결국 투렐 요새 성벽이 허물어질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군은 10월 23~24일 밤 투렐 요새를 버리고 다리의 마지막 경간을 파괴한 뒤 본성으로 후퇴했다.

10월 24일, 토머스 몬타구는 투렐 요새의 2개 탑 중 하나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봤다. 그런데 노트르담 탑에 설치된 대포가 그 쪽으로 쏜 포탄이 그의 머리에 명중했고, 그는 한쪽 눈이 찢어지고 얼굴이 짓이겨진 채 쓰러졌다. 이후 멍 슈흐 루와흐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11월 3일에 사망했다. <오를레앙 공방전 일기>의 저자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잉글랜드인에게는 매우 큰 불행이었지만 왕국에 큰 축복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군대와 나라의 사령관으로서 가장 유명하고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후 오를레앙 공방전은 반년간 이어지다가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잉글랜드군이 1429년 5월 8일에 철수하면서 막을 내렸다. 일부 학자들은 토머스 몬타구가 우연히 포탄에 맞아 죽지 않았더라면 초전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오를레앙의 얼마 안 되는 수비대를 압도하고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고 본다. 토머스 몬타구의 유해는 잉글랜드로 이송된 뒤 비샴 수도원에 있던 아버지의 시신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엘레노어 홀랜드: 토머스 몬타구의 첫 부인.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이자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의 자매.
    • 앨리스 몬타구(1407 ~ 1462): 토머스와 엘레노어의 딸.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셋째 아들 리처드 네빌의 부인으로, 리처드는 결혼으로 인해 제5대 솔즈베리 백작이 되어 왕국에서 손꼽히는 유력 귀족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장미전쟁의 주역인 '킹 메이커'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태어났다.
  • 앨리스 초서: 토머스 몬타구의 두 번째 부인. 잉글랜드 시종장 토머스 초서의 딸, 시인 제프리 초서의 손녀. 토머스 몬타구와 결혼하기 전에 기사 존 펠립과 결혼했으며, 토머스 몬타구가 전사한 뒤 초대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과 결혼했다.

이외에 사생아로 존(또는 제임스) 몬타구를 두었고, 켄트주 러즈던(Luddesdown)의 장원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몬타구 가문의 적통은 토머스에서 끊겼지만, 보턴 하우스(Boughton House)를 근거지로 한 후대의 몬태규 가문(본래 성은 라드(Ladde))은 솔즈베리 백작 몬타구 가문의 후손을 자처했다. 토머스의 사생아 제임스 몬타구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관련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드-몬태규 가문은 헨리 8세-에드워드 6세 시기에 잉글랜드의 대법관(Lord Chief Justice)을 역임한 에드워드 몬태규 경의 후손이며, 이후 맨체스터 공작위 및 샌드위치 백작위를 수여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명인으로는 제4대 샌드위치 백작이자 샌드위치의 발명자로 알려진 존 몬태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