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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네빌(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colbgcolor=#FFB6C1>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Ralph Neville, 1st Earl of Westmorland
파일:Ralph Neville_1st Earl of Westmorland.png
이름 랄프 네빌
Ralph Neville
출생 1364년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
사망 1425년 10월 21일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스테인드롭
아버지 존 네빌
어머니 모드 퍼시
형제 앨리스, 엘레노어, 모드, 토머스, 엘리자베스
배우자 마거릿 스태퍼드(1383년 결혼 / 1396년 사망)
조앤 보퍼트[1](1396년 결혼)
자녀 모드, 앨리스, 필리파, 존, 엘리자베스, 앤, 랄프, 마거릿, 캐서린, 엘레노어, 리처드[2], 헨리, 로버트, 윌리엄, 존, 조지, 앤, 토머스, 커스버트, 조앤, 에드워드, 세실리[3]
직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서부 국경 사령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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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스코틀랜드군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364년경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에서 라비의 네빌 남작 존 네빌과 제2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의 딸 모드 퍼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앨리스[4], 엘레노어[5], 모드[6], 토머스[7], 엘리자베스[8]가 있었다. 1433년 어머니 모드 퍼시가 사망한 뒤, 아버지 존 네빌은 코르비의 제4대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의 딸인 엘리자베스 라티머와 재혼했고, 존 네빌[9], 엘리자베스 네빌[10]을 두었다.

그가 속한 네빌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 일대에서 퍼시 가문 다음으로 중요한 가문으로 손꼽혔다. 할아버지 랄프 네빌에드워드 2세에드워드 3세 시기에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다양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백년 전쟁 시기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침공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물리치고 데이비드 2세를 사로잡았으며, 흑태자 에드워드의 동료로서 그의 원정에 동행했다. 그리고 아버지 존 네빌은 곤트의 존의 후원과 2차례의 결혼을 통해 노섬벌랜드와 요크셔에 방대한 토지와 저택을 보유하고 막강한 부를 쌓았다. 어머니 모드 퍼시는 북부 잉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집안인 퍼시 집안 출신이었다.

1380년 16살의 나이에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지휘를 받으며 브르타뉴로 원정을 떠났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랄프는 다른 7명의 청년들과 함께 생오메르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1381년 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1381년 말 헨리 '핫스퍼'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분견대를 지휘했다. 1383년 또는 1384년에 아버지와 함께 데이비드 2세를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는 대가로 받기로 한 몸값의 마지막 분할금을 받아냈다. 1385년 10월 26일 리처드 2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후, 그는 제5대 클리퍼드 남작 로저 드 클리퍼드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척인 토머스 클리퍼드와 함께 칼라일 성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386년 3월 27일 토머스 클리퍼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소장에 선임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아버지는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388년 10월 17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라비의 네빌 남작과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고, 12월 6일 의회에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1389년 봄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5월 24일에 트렌트 북쪽의 왕립 숲 소장 직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을 맡았다. 또한 요크 인근의 러스켈프와 해튼 성 인근 숲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미들햄에서 주간 박람회를 개최할 권리도 부여받았다. 1389년 7월과 1390년 6월에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으며, 1391년 6월 다른 북부 영주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임의로 소규모 전쟁을 벌일 권리도 허용받았다. 1393~1394년에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다시 임했으며, 요크셔의 노스 라이딩스와 웨스트 라이딩스의 순회 판사로 재직했다.

그는 이 당시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서부 국경 사령관을 맡고 있었지만, 리처드 2세가 헨리 퍼시에게 노섬벌랜드 백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반면, 그는 여전히 남작에 불과했다. 그래도 삼촌 알렉산더 네빌이 리처드 2세의 총애를 받았던 덕분에 1395년 5월 왕의 기사가 되었고, 그 자격으로 연간 130파운드의 수입을 받았다. 1397년 곤트의 존의 유언 집행자가 되었으며,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딸인 조앤 보퍼트와 결혼했다. 또한 1395년에 리치먼드 백작령을 임대했으며, 1396년 11월 브르타뉴의 또다른 영토인 펜리스와 소워비를 리처드 2세에 의해 수여받았다. 1397년 2월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로부터 워크온트위드를 인수해, 동부 스코틀랜드 지역에 대한 발판을 마련했다.

1397년 9월, 리처드 2세가 청원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때 그는 왕을 위해 청원파 숙청에 앞장섰고, 리처드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9월 29일 랄프 네빌에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1398년 9월 16일 곤트의 존의 아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에게 추방되고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사망한 뒤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이를 물려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자,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돕기로 했다. 1399년 7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레이븐스펀에 상륙하자, 그는 즉시 가담해 거사의 성공에 기여했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함께 런던 탑에 갇힌 리처드 2세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1399년 10월 13일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헨리 4세로 등극할 때, 그는 작은 홀 하나를 들고 왕의 옆에 섰다.

1399년 9월 30일 백작 원수로 종신 임명되었고, 10월 20일 명예 리치먼드 백작위를 평생 누렸다. 1401년 3월 헨리 4세의 큰 딸인 블랜치와 독일왕 팔츠의 루퍼트의 아들 루트비히 사이의 결혼 협상을 진행한 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1403년 가터 기사단 기사로 발탁되었다. 또한 헨리 4세는 1402년 3월에 그를 헨리 '핫스퍼' 퍼시를 대신해 록스버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다. 이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퍼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1403년 6월, 헨리 '핫스퍼' 퍼시가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7월 21일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4세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때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군대를 일으킨 뒤 아들과 합세하려고 남하했지만, 도중에 랄프 네빌이 이끄는 군대에 가로막혀서 그러지 못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노섬벌랜드 백작이 1399년부터 수행했던 서부 국경 사령관에 선임되었고, 헨리 '핫스퍼' 퍼시가 맡았던 동부 국경 사령관 직은 헨리 4세의 14살된 아들 랭커스터의 존이 물려받았다.

1405년 5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 잉글랜드 원수 토머스 모브레이,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마스 바르돌프도 여기에 가담했다. 헨리 퍼시는 그 전에 랄프 네빌이 영지에 머물고 있을 때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전에 위험을 경고받고 탈출했다. 이후 반란군은 1405년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포된 스크루프 대주교와 모브레이 원수는 처형되었다. 이후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퍼시는 바르톨프 남작 및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편에 섰던 몇몇 영주들의 머리를 참수한 뒤 요크 성벽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의회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의 모든 영지는 압수되었고, 그의 작위는 회수되었다. 그는 큰 유혈 사태 없이 반란을 진압한 대가로 1405년 6월 컴벌랜드와 노섬벌랜드에 있던 퍼시 가문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고 헨리 5세가 등극한 뒤에도 스코틀랜드 국경 방위를 지속했다. 1415년 7월 22일 예버링 전투에서, 440명의 잉글랜드 궁수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군 4,000명의 노섬벌랜드 침공을 격퇴했다. 그는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의 사위인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가 사우샘프턴에서 헨리 5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 이후, 헨리 5세는 랄프 네빌이 프랑스 원정 도중 배신할 것을 우려해 스코틀랜드 국경 방위만 맡기고 프랑스 원정에 데려가지 않기로 했을 거라 추정한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갓난 아기였던 헨리 6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425년 10월 21일 더럼주 스테인드롭에서 사망했고, 스테인드롭에 있는 성 메리 교회에 안장되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위는 본래 장남 존 네빌이 이어받을 예정이었지만, 장남이 1420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존 네빌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랄프 네빌이 칭호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장에 영지 분할에 관련해 손자 랄프 네빌이 언급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재산의 대부분은 랄프 네빌의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가 낳은 자식들에게 상속되었다.

손자 랄프 네빌은 작위만 주어졌을 뿐 대부분의 영지를 잃은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지만, 잉글랜드 국정을 거머쥔 보퍼트 가문의 비호를 받은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손자 랄프는 보퍼트 가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끌어들여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네빌 가문의 거대 영지의 상속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 그러다가 144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합의를 맺었다. 랄프 네빌은 라비의 남작권을 되찾았지만, 나머지 분쟁 지역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첫째 아내 마가렛 스태퍼드의 아들 및 손자들과 둘째 아내 조앤 보퍼트의 아들 및 손자들간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장미 전쟁이 발발한 뒤, 마가렛 스태퍼드의 손자들은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고, 조앤 보퍼트의 자녀와 손자들은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11]

3. 가족

  • 마거릿 스태퍼드(1364 ~ 1396): 2대 스태퍼드 백작 휴 스태퍼드의 딸.
    • 모드 네빌(? ~ 1438): 제5대 모레이 남작 피터 모레이의 부인.
    • 앨리스 네빌(1384 ~ ?):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와 초혼, 기사 길버트 랭커스터와 재혼.
    • 필리파 네빌(? ~ 1453년에서 1458년 사이): 6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부인.
    • 존 네빌(1387년 이전 ~ 1420): 네빌 남작,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사령관. 아들 랄프 네빌은 1425년 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칭호를 물려받았다.
    • 엘리자베스 네빌: 수녀.
    • 앤 네빌(? ~ 1413년 이전): 리즈데일 남작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의 부인.
    • 랄프 네빌(1392 ~ 1458): 바이웰 및 스티퍼드 남작.
    • 마거릿 네빌(? ~ 1464년 또는 1465년): 제3대 볼턴의 스크루프 남작 리처드 스크루프와 초혼, 기사 서드베리의 윌리엄 크레소너와 재혼.
  • 조앤 보퍼트(1377 ~ 1440):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딸. 랄프 네빌과 결혼하기 전에 웜의 기사 로버트 페러스와 결혼했고, 1396년 11월에 랄프 네빌과 재혼했다.
    • 캐서린 네빌(1397 ~ 1483):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초혼, 기사 토마스 스트랭웨이즈와 재혼, 초대 보몬트 자작 존 보몬트와 삼혼, 기사이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 존 우드빌과 사혼.
    • 엘레노어 네빌(1398 ~ 1472): 4대 베르게르시 남작 리처드 디스펜서와 초혼, 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재혼.
    • 리처드 네빌(1400 ~ 1460): 토머스 몬타구의 딸이자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타구와 결혼한 뒤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킹메이커(the Kingmaker)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버지.
    • 헨리 네빌(1402): 유아기에 사망.
    • 로버트 네빌(1404 ~ 1457): 더럼 주교.
    • 윌리엄 네빌(1405 ~ 1463): 초대 켄트 백작.
    • 존 네빌(1406): 유아기에 사망.
    • 조지 네빌(1407 ~ 1469): 초대 라티머 남작.
    • 앤 네빌(1408 ~ 1480):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의 부인.
    • 토머스 네빌(1410): 유아기에 사망.
    • 커스버트 네빌(1411): 유아기에 사망.
    • 조앤 네빌(1412 ~ 1453): 성 클레어 수도회 수녀.
    • 에드워드 네빌(1414 ~ 1476): 베르게베니 남작. 현재 네빌 가문의 가주이자 애버개브니(Abergavenny) 후작인 제6대 애버개브니 후작 크리스토퍼 네빌(1955 ~ )이 에드워드의 직계 후손이다. 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인 제16대 백작 앤서니 페인(1951~ )은 에드워드의 여계 후손이다.
    • 세실리 네빌(1415 ~ 1495): 요크의 리처드의 부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리처드 3세의 어머니.

[1]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 캐서린 스윈포드의 딸.[2]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버지.[3]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내로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어머니.[4] 1358 ~ 1433, 제2대 드앵쿠르 남작 윌리엄 드앵쿠르의 부인.[5] 1360 ~ 1441년 이후, 초대 럼리 남작 랄프 럼리의 부인.[6] ? ~ ?, 기사 윌리엄 르 스쿠르프의 아내.[7] ? ~ 14407, 퍼니웰 남작, 네빌 남작.[8] ? ~ ?, 수녀[9] 1382 ~ 1430, 코르비의 제6대 라티머 남작[10] 링콘셔 보안관 토머스 드 윌러비의 부인.[11] 조앤의 딸 세실리 네빌이 요크의 리처드의 아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