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B6C1><colcolor=#000000>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Richard Neville, 5th Earl of Salisbur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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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리처드 네빌 Richard Neville |
출생 | 1400년경 |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 | |
사망 | 1460년 12월 31일 (향년 60세)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폰트프랙트 성 | |
아버지 |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
어머니 | 조앤 보퍼트 |
형제 | 헨리, 로버트, 윌리엄, 존, 조지, 토머스, 커스버트, 에드워드, 캐서린, 엘레노어, 앤, 조앤, 세실리 |
배우자 |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 |
자녀 | 리처드, 토머스, 존, 조지, 랄프, 로버트, 조앤, 세실리, 앨리스, 엘레노어, 캐서린, 마거릿 |
직위 | 제5대 솔즈베리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핵심 추종자로, 장미 전쟁 시기 요크 공작을 보좌했지만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참패하고 처형당했다.2. 생애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1]의 장남이다. 아버지 랄프 네빌은 잉글랜드 북부의 더럼, 노스 요크셔, 링컨셔 등지에 걸친 대규모 영지를 경영한 귀족으로,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국경을 전담했다. 그러다가 헨리 4세의 찬탈을 지지한 대가로 여러 직위와 상을 받았으며, 퍼시 가문의 반란 진압에 공헌하면서 명실상부한 잉글랜드 북부 최강의 귀족이 되었다.1420년 3월, 헨리 5세는 리처드 네빌을 스코틀랜드의와의 서부 국경 수호자로 선임했다. 이 직책은 평시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왔으며, 칼레와는 달리 영구적인 수비대가 필요하지 않아 군사 지출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인들과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충돌하면서 군인들의 숙련도가 무척 강했다. 리처드는 이외에도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더럼의 순회판사를 역임했다.
랄프 네빌은 첫번째 아내 마거릿 스태퍼드와의 사이에서도 여러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인 존 네빌이 부친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1420년 프랑스 전선에 보내졌다가 병사했다. 1425년에 사망한 랄프 네빌은 유언장에서 장손인 랄프 네빌에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칭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언장에 영지 분할에 관련해 손자 랄프 네빌이 언급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재산의 대부분은 랄프 네빌의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가 낳은 자식들, 그중에서도 조앤 보퍼트의 장남 리처드 네빌에게 주로 상속되었다. 손자 랄프 네빌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작위만 주어졌을 뿐 대부분의 영지를 상실했다. 역사가 찰스 로스는 이에 대해 "야심찬 가족 사기"라고 평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자기가 잉글랜드 북부에 건설한 대규모 영지를 상속인이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성인 아들이 미성년 손자보다 이를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이런 유언장을 남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편, 리처드 네빌은 1421년 2월 이전에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터규의 외동딸인 앨리스 몬터규와 결혼했다. 1428년 토머스 몬터규가 오를레앙 공방전을 벌이던 중 전사한 후, 앨리스 몬터규는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이 되었고, 리처드는 앨리스의 남편 자격으로 제5대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그의 형제들이 상속이 부당하게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1430년대 내내 그와 마찰을 벌였고, 때로는 무력 충돌까지 벌어졌지만, 리처드는 어머니가 속한 보퍼트 가문이 잉글랜드의 정계를 지배한 덕분에 꿋꿋이 버텼다.
1431년, 리처드는 프랑스로 가서 어린 국왕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때 왕실 위원회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에게 솔즈베리 백작이 없는 동안 그의 영지를 공격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그 대신 4,000 파운드를 지불했다. 리처드는 귀환한 후에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부 국경 수호자를 겸임했다. 그러나 1436년 재정이 열악해졌자는 이유로 서부와 동부 국경 수호자 직위 모두 사임했고, 왕실은 그에게 거액의 금전적 보상을 지불했다. 같은 해 여동생 세실리 네빌과 결혼한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함께 프랑스 원정에 나섰고, 1437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11월에 왕실 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1438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443년, 리처드 네빌은 잉글랜드 정부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비로소 합의를 맺었다. 랄프 네빌은 라비의 남작권을 되찾았지만, 나머지 분쟁 지역은 리처드가 그대로 가져가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갈등은 이것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과 두 동생 존 네빌, 토머스 네빌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령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언장 대로 따랐을 뿐인데도 그들이 행패를 부린다며 반감을 품었다. 그 결과 장미 전쟁으로 이어진 1450년대의 정치적 사건 동안, 네빌 가문의 두 분파 대표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측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지지했고, 솔즈베리 백작 측은 요크 공작을 지지했다.
1443년의 합의로 네빌 가문 내 유산 분쟁이 수그러든 후, 리처드는 퍼시 가문과 갈등을 벌였다. 퍼시 가문은 당초 잉글랜드 북부 최강의 귀족 집안이었지만,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에드워드 4세에게 패사하면서 몰락했다. 그 후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인 헨리 퍼시가 스코틀랜드 왕국에 망명했다가 헨리 5세 즉위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복귀했지만, 헨리 5세와 뒤이은 헨리 6세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가 빚더미에 시달렸다. 자연히 그들은 퍼시 가문의 부흥을 위해 네빌 가문의 영지를 탐냈다.
1450년대 초부터, 리처드 네빌과 퍼시 가문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리처드 네빌의 아들 토머스 네빌과 재3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의 조카이자 상속녀인 모드 스탠호프와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 토머스 네빌의 결혼이 성사된 후 갈등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결혼으로 전통적으로 퍼시 가문의 소유였던 레슬 성이 네빌 가문에게 넘어가자, 퍼시 가문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60세가 다 되어가던 노섬벌랜드 백작 본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인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가 1453년 8월 24일 7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요크 근처 헤워스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네빌 가문의 행렬을 급습했다. 충돌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상자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이 일로 양자간의 갈등이 극심해진 것은 분명하다.
1453년 10월에는 토프클리프에서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또다른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자기 가문 영지를 넓히기 위해 네빌 가문의 편에 섰다. 1454년 5월, 헨리 6세가 광기에 걸리면서 나라를 통치할 수 없게 되면서 섭정을 맡은 요크 공작 리처드는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의 전쟁을 막고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에그리몬트 남작과 엑서터 공작을 응징하기로 했다. 엑서터 공작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몬내고 항복한 뒤 폰트프렉트 성에 감금되었지만, 에그리몬트 남작은 탈출에 성공했다. 6월에는 엑서터 공작과 에그리몬트 남작이 자신들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을 모집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요크에서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1454년 10월 31일,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 중 하나인 스탬포드 브리지 근처에서, 솔즈베리 백작의 두 아들 [[토머스 네빌(1460년 사망)|토머스 ]와 존 네빌은 매복을 조직하여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와 그의 동생 리처드 퍼시를 급습해 생포했다. 이때 수백 명이 전사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토머스 퍼시와 리처드 퍼시는 먼저 미들햄 성으로 이송된 후 요크 공작의 보호 아래 넘겨졌다. 이후 두 퍼시 형제는 11월에 의회에 출두하여 왕명에 거역하고 무력 충돌을 벌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아내, 아들들에게 총 16,800마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선고받았고,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렇듯 잉글랜드 북부의 패권을 놓고 퍼시 가문과 다툰 끝에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리처드 네빌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정쟁을 벌이는 걸 지원했다. 1455년 봄,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녀의 고문들은 요크 가문 일원과 추종자들을 배제하고 대규모 의회를 소집했다. 이에 요크 공작은 자신과 추종자들을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아들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동한 채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요크 공작의 정적인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군대가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요크군을 저지하러 출진했다. 그 해 5월 22일, 양자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요크군이 승리를 거뒀고, 에드먼드 보퍼트,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등은 전사했으며, 헨리 6세는 생포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요크 공작은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런던으로 향했다. 그 후 의회를 소집해 헨리 6세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호국경으로 취임하고,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추종자들에게 여러 요직을 수여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요크 공작에게 원한을 품은 보퍼트 파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리처드를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그러던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습격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프랑스인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458년 3월 24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르시에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요크의 리처드, 마그리트 왕비 및 보퍼트 파 귀족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를 거행했다. 솔즈베리 백작도 이 행사에 참여해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면서, 모든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해 나라를 잘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모습일 뿐이었고, 요크파와 랭커스터파 간의 정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458년 5월 말, 솔르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워릭 백작이 중립국인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공격한 것은 왕명에 위배된다며 그를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자금 및 물자 공급을 중단했고, 워릭 백작은 이에 대응해 카스티야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를 지속하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했다.
1459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왕을 대신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은백조 문양을 수여하고 귀족에 등록하는 한편,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1459년 6월, 마르그리트는 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은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들로 성에서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이에 호응해 두 아들 토머스, 존과 함께 5,000 장병을 이끌고 솔즈베리에서 러들로로 남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솔즈베리 백작의 행군을 저지하기로 하고,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에게 솔즈베리 백작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오들리 남작에게 솔즈베리를 죽이든, 살리든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하지만 1459년 9월 23일에 벌어진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솔즈베리 백작은 적군을 격파하고 오들리 남작을 처단했다.
이후 솔즈베리 백작은 랭커스터군 증원군이 근처에 있어서 언제라도 자기들을 덮칠 것을 우려해, 러들로를 향해 남쪽으로 서둘러 진군하기로 했다. 그레고리 연대기에 따르면, 지역 수도사를 고용하여 밤새도록 블로어 히스(Blore Heath)에 머물게 하고 주기적으로 대포를 발사하여 근처의 랭커스터군에게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믿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러들로에서 요크 공작과 무사히 합류했고, 뒤이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칼레 수비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하지만 당시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 왕비가 러들로 인근에서 집결한 병력은 요크군의 2배에 달했다.
요크군은 러들로 남쪽의 러드퍼드 다리 인근에 방어용 도랑을 파고 대포를 매설한 수레로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1459년 10월 12일, 1459년 10월 12일, 랭커스터군이 헨리 6세를 앞세워 러드퍼드 다리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 후 양자는 협상을 시도했다. 헨리 6세는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의 죽음에 첵임이 있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사면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요크군 수뇌부는 거부했다. 이때의 교섭은 요크군 장병들에게 왕이 갑옷을 입은 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걸 확인시켜줬고,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들을 쳐부술 생각만 했을 뿐 왕에게 칼을 들이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여기에 랭커스터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는 왕을 따르는 자에게 사면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앤드류 트롤로프가 이끄는 칼레 수비대 600명이 밤을 틈타 랭커스터군에게 귀순했고, 일부 분견대가 뒤이어 귀순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요크 공작,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은 군심이 떠났으니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러들로로 돌아가겠다고 공식 발표한 뒤, 극비리에 군대를 버리고 웨일스로 도망쳤다. 10월 13일 새벽, 요크군은 지휘관이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자 헨리 6세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고, 왕의 사면을 받았다. 이리하여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솔즈베리 백작은 아들 워릭 백작과 함께 칼레로 이동했고, 1460년 워릭 백작, 요크 공작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켄트주에서 병력을 모집하며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실군은 노샘프턴으로 물러났고, 솔즈베리 백작 등은 런던에 입성했다.
그 후 런던에 남은 일부 랭커스터군이 런던 탑에서 농성하자, 워릭 백작과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1만 장병을 이끌고 노샘프턴으로 진군하고, 솔즈베리 백작은 존 웬록과 함께 2,000 장병을 이끌고 런던 탑을 포위했다. 여기에 런던 탑 수비대가 대포를 난사한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결성한 민병대의 지원도 받았다. 이후 런던 탑 공방전을 치르던 중이던 7월 10일, 워릭 백작과 마치 백작이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크게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7월 16일, 요크 가문의 귀족들은 화려한 의식을 치르며 런던에 입성했고, 헨리 6세는 런던 주교궁으로 보내졌다. 이제 런던 탑 수비대는 희망을 잃고 7월 19일 항복했다.
1460년 10월 16일, 아일랜드에 망명했던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왕처럼 행진하며 런던에 입성했다. 이후 열린 런던 의회에서, 요크 공작은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올리며 자기에게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싸늘하게 침묵함으로써 이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헨리 6세의 '간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뭉쳤지, 헨리 6세를 폐위하고 리처드를 왕으로 옹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 등도 리처드의 행동에 몹시 당황했다. 이후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이 중재해, 헨리 6세를 왕으로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헨리 6세가 아닌 다른 남자와 왕비가 불륜 관계를 맺어서 탄생한 사생아로 간주하고, 요크 공작이 헨리 6의 계승자로 지명되도록 했다.
한편,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스코틀랜드에서 용병대를 끌어모은 뒤 잉글랜드 북부로 진군해 랭커스터파 인사들을 대거 끌어모았다.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요크 공작과 요크파 인사들의 영지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1460년 가을, 요크 공작은 솔즈베리 백작 등 가장 가까운 지지자들과 약 5,000명의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러 출진해, 12월 21일 요크셔의 웨이크필드 시 인근 킬더 강 남쪽의 샌달 성에 도착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랭커스터군과 함께 웨이크필드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폰트프랙트 성에서 성탄절를 보냈다. 그 직후, 그녀는 요크 공작을 물리치기 위해 웨이크필드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공성 병기가 딱히 없었고, 때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녀가 요크 공작이 있는 샌달 성을 공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요크 공작은 장남이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티지 않고 회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이리하여 1460년 12월 30일에 벌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군은 섬멸되었고, 요크 공작과 그의 차남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가 살해되었다. 또한 포로로 잡힌 솔즈베리 백작은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간 뒤 12월 31일 참수되었다. 요크 공작, 러틀랜드 백작, 솔즈베리 백작의 머리는 요크 성의 미클게이트에 전시되었다. 이 수급 밑에는 "요크가 요크 마을을 내려다보게 하라"는 표지판이 세워졌다고 한다. 훗날 솔즈베리 백작의 작위는 장남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물려받았다.
3. 가족
- 앨리스 몬터규(1405 ~ 1462):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터규의 딸.
- 조앤 네빌(1423 ~ 1462): 제16대 아룬델 백작 윌리엄 피츠앨런의 부인.
- 세실리 네빌(1426 ~ 1450): 제14대 워릭 백작 헨리 뷰챔프의 부인.
- 리처드 네빌(1428 ~ 1471): 1449년부터 워릭 백작, 1460년 이후 제6대 솔즈베리 백작. 역사 기록에서 킹메이커로 일컬어진 최초의 인물이다.
- 토머스 네빌(1429 ~ 1460): 아버지와 함께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망했다.
- 앨리스 네빌(1430 ~ 1503): 제5대 피츠휴 남작 헨리 피츠휴의 부인.
- 존 네빌(1431 ~ 1471): 1464년부터 1470년까지 노섬벌랜드 백작. 1471년부터 몬터규 후작.
- 조지 네빌(1433 ~ 1476): 1465년부터 요크 대주교, 1470~1471년 잉글랜드 대법관.
- 캐서린 네빌(1453 ~ 1503/1504): 제6대 하링턴 남작 윌리엄 본빌과 초혼, 초대 헤이스팅스 남작 윌리엄 헤이스팅스와 재혼.
- 엘레노어(1438 ~ 1482년 이전): 제2대 1459년부터 스탠리 남작이자 맨섬의 국왕, 1485년부터 초대 더비 백작이 된 토머스 스탠리의 부인.
- 랄프 네빌(1440 ~ ?):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
- 마거릿 네빌(1444 ~ 1506):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의 부인.
- 로버트 네빌(1446 ~ ?):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