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랄프 드 크롬웰 Ralph de Cromwell |
출생 | 1403년경 |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 |
사망 | 1456년 1월 4일 |
잉글랜드 왕국 크롬웰 남작령 | |
아버지 | 제2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 |
어머니 | 조앤 |
누이 | 모드 |
배우자 | 마거릿 데인코트 |
지위 | 제3대 크롬웰 남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에 소속되어 프랑스군과 맞섰다.2. 생애
링컨셔에 상당한 가문 재산을 소유한 제2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과 출신이 일려지지 않은 조앤의 외아들이다. 누이로 리처드 스탠호프 경의 아내인 모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1403년생으로 알려졌지만, 1394년에 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1415년, 랄프는 헨리 5세의 지휘하에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141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문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프랑스 전선으로 돌아온 그는 1418년 2차 캉 공방전에 참여했고, 1419년 클래런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지휘 아래 노르망디 공국 정복전에 참여했으며, 1420년 트루아 평화 협상에 참석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전쟁 위원회 일원으로서 문서에 언급되었지만, 내각에 소환되지는 않았다.헨리 6세의 미성년 시기 내각의 위원이 되었고, 1422년 크롬웰 남작으로서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으며, 섭정 의회를 구성하도록 위임받은 영주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곧 재무부 장관을 맡았고,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 사이의 정쟁에서 추기경 편을 들었다. 1432년, 글로스터 공작은 추기경이 부재중인 튼을 타 랄프의 사임을 강요했지만, 랄프는 1년 후 복직했다. 1436년 부르고뉴군에 포위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군대에 참여해 칼레를 구원하는 데 한 몫 했다. 같은 해에 왕실 마구간과 마사냥 책임자가 되었다.
1441년 글로스터 공작의 아내 엘레노어 코밤이 마녀 마저리 조드메인(Margery Jourdemayne)으로부터 물약을 받아 복용함으로써 임신을 이루려 한 사건을 조사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443년 윌리엄 드 라 폴이 왕의 총애를 받아 급격하게 부상하자 불만을 품고 사임했다. 1445년 노팅엄 성의 경찰관이자 셔우드 숲의 관리인이 되었다. 1449년, 윌리엄 드 라 폴과 그의 추종자인 링컨셔 지주 윌리엄 탤보이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텔보이스는 런던 탑에 감금되고 3천 파운드에 달하는 벌금을 물었고, 윌리엄 드 라 폴은 이 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포함한 여러 혐의로 5년 추방형에 처해졌다가 영국 해협에서 니콜라스 호 선원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후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정쟁이 벌어졌을 때 요크 공작 편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군 편에서 참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456년 1월 4일에 사망했고, 태터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1424년 7월 4일 이전에 제4대 데인쿠르 남작 존 데인쿠르의 딸인 마거릿 데인쿠르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고, 사후 그의 재산과 작위는 누이 모드의 딸이자 그의 여조카인 모드 스탠호프와 그녀의 남편인 토머스 네빌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