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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네빌(1460년 사망)

<colbgcolor=#FFB6C1><colcolor=#000000> 토마스 네빌
Sir Thomas Neville
파일:Sir_Thomas_Neville_d.1460.png
성명 토머스 네빌
Thomas Neville
출생 1429년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
사망 1460년 12월 30일 (향년 31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웨이크필드
아버지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어머니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
형제 리처드, , 조지, 랄프, 로버트, 조앤, 세실리, 앨리스, 엘레노어, 캐서린, 마거릿
배우자 모드 스탠호프
직위 솔즈베리 기사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가족과 함께 요크 가문의 핵심 추종자로 활약했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2. 생애

1429년경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에서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의 두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1448년 그의 삼촌인 더럼 주교 로버트 네빌에 의해 더럼 교구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을 때 처음으로 역사 기록에 언급되었으며, 교구 수입 중 20파운드를 급여로 받았다. 1450년 3월 24일 글래모건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고, 1451년 3월 12일 디스펜서 가문 상속권 분쟁 중에 형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위한 헌장을 작성했고, 리처드로부터 워릭셔 내 연금을 받았다. 1453년 1월 5일, 토머스는 에드먼드 튜더, 재스퍼 튜더 형제와 함께 런던 탑에서 헨리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역사가 랄프 그리피스는 이 조치는 최근에 랭커스터 왕조와 관계가 악화된 네빌 가문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보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 무렵, 네빌 가문은 퍼시 가문과 잉글랜드 북부 내 영지를 놓고 대립했다. 그러던 1453년 3월 1일, 헨리 6세는 노팅엄셔의 램프턴 출신 기사 리처드 스탠호프의 딸이자 제6대 에레스비의 윌러비 남작 로버트 윌러비의 미망인인 모드 스탠호프와 토머스의 결혼을 허락했다. 이 결혼은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의 불화가 폭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모드 스탠호프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지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헨리 보퍼트 추기경을 지지하고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갈등을 벌였던 제3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의 조카이자 공동 상속자였다. 따라서 랄프 드 크롬웰은 이 결혼을 통해 정적들에 맞서 네빌 가문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네빌 가문은 이 결혼을 통해 이전에 퍼시 가문의 소유지였던 레슬 성이 네빌 가문에게 넘어갔다.

이 상황에 불만을 품은 퍼시 가문은 결혼을 훼방놓기로 했다. 1453년 8월 24일,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가 7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요크 근처 헤워스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네빌 가문의 행렬을 급습했다. 충돌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상자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이 일로 양자간의 갈등이 극심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 해 10월에는 토프클리프에서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또다른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자기 가문 영지를 넓히기 위해 네빌 가문의 편에 섰다.

1454년 5월, 헨리 6세가 광기에 걸리면서 나라를 통치할 수 없게 되면서 섭정을 맡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의 전쟁을 막고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에그리몬트 남작과 엑서터 공작을 응징하기로 했다. 엑서터 공작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몬내고 항복한 뒤 폰트프렉트 성에 감금되었지만, 에그리몬트 남작은 탈출에 성공했다. 6월에는 엑서터 공작과 에그리몬트 남작이 자신들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을 모집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요크에서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1454년 10월 31일,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 중 하나인 스탬포드 브리지 근처에서, 토머스와 존 네빌 형제는 매복을 조직하여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와 그의 동생 리처드 퍼시를 급습해 생포했다. 이때 수백 명이 전사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토머스 퍼시와 리처드 퍼시는 먼저 미들햄 성으로 이송된 후 요크 공작의 보호 아래 넘겨졌다. 이후 두 퍼시 형제는 11월에 의회에 출두하여 왕명에 거역하고 무력 충돌을 벌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아내, 아들들에게 총 16,800마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선고받았고,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1455년 5월 22일, 토머스 네빌은 아버지와 함께 요크 공작 리처드의 군대에 배속되어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전사했다. 그 후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의 불화는 복수전으로 치달았다.

1457년, 토머스는 랄프 드 크롬웰과 함께 재무부 장관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 왕국와의 서부 국경 공동 관리인이었던 토머스의 아버지와 형 리처드는 그를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500마크의 급여를 줬다. 몇 달 후, 토머스는 삼촌이자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을 대신하여 보증을 섰다. 1459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추종하는 랭커스터파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지지하는 요크파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요크 공작을 지지했고, 토머스는 두 형제 리처드, 존과 함께 하버지를 따랐다.

1459년 9월, 솔즈베리 백작은 미들럼에 있는 자기 성에서 5,000 장병을 이끌고 출발해 러들로로 향해 요크 공작과 합류하려 했다. 9월 23일, 그들은 블로어 히스 근처에서 대규모 랭커스터군과 맞닥뜨려 블로어 히스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랭커스터군은 대패했고, 그들의 지휘관인 제5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가 전사했다. 다음 날, 토머스는 남동생 존과 아버지의 가신 제임스 해링턴과 함께 랭커스터군에게 생포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세 사람은 도주하는 랭커스터군을 추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생포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토머스는 동생 존, 제임스 해링턴과 함께 체스터 성에 투옥되었다.

1460년 7월 10일,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마치 백작 에드워드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그때까지 갇혀 있었던 토머스와 존 형제는 풀려났다. 그 후 토머스는 아버지와 함께 왕실 마구간 관리인을 맡았고, 질서 유지 위원회에 배속되었으며, 랭커스터 공작령의 여러 영지를 받았다. 1460년 10월 10일,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요크 공작 리처드는 의회를 소집한 뒤 왕관에 손을 올리며 왕이 될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정당한 국왕인 헨리 6세를 폐위하고 그를 옹립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토머스는 아버지, 형 리처드와 함께 요크 공작과 귀족, 성직자 대표들 사이에서 중재를 맡았고, 요크 공작은 10월 13일 왕이 되는 걸 포기하고 헨리 6세가 왕으로 남지만 본인이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타협안에 동의했다. 이 결정은 10월 25일에 발표되었고, 10월 31일에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그 결과 헨리 6세는 형식적으로는 왕으로 남았지만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요크 공작이 되었다.

1460년 12월, 요크 공작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파 잔당이 잉글랜드 북부에 집결한 뒤 자기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것이 몹시 거슬렸다. 그는 12월 9일 솔즈베리 백작과 토머스 네빌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서 출발해 북상했다. 12월 21일, 요크 공작의 군대는 요크셔의 웨이크필드 시에서 킬더 강 남쪽의 샌달 성에 도착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랭커스터군과 함께 웨이크필드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폰트프랙트 성에서 성탄절를 보냈다. 그 직후, 그녀는 요크 공작을 물리치기 위해 웨이크필드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공성 병기가 딱히 없었고, 때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녀가 요크 공작이 있는 샌달 성을 공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요크 공작은 장남이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티지 않고 회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이리하여 1460년 12월 30일에 벌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군은 섬멸되었고, 요크 공작과 그의 차남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가 살해되었다. 토머스의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은 생포된 뒤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가 12월 31일 참수되었으며, 토머스는 전투를 치르던 중 목숨을 잃었다. 요크 공작, 러틀랜드 백작, 솔즈베리 백작과 토머스를 포함한 요크파 지도자 6명의 수급은 요크 성루에 매달려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승리한 뒤, 토머스와 그의 아버지의 유해는 요크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633년 2월, 그들의 유해는 비샴 수도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모드 스탠호프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모드 스탠호프는 기사 거베이스 클리프턴과 결혼했다. 하지만 거베이스 클리프턴 역시 튜크스베리 전투 후 생포된 뒤 1471년 5월 6일 참수되었다. 모드는 1497년까지 생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