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B6C1><colcolor=#000000> 초대 몬터규 후작 존 네빌 John Neville, 1st Marquess of Montagu | |
성명 | 존 네빌 John Neville |
출생 | 1431년경 |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 | |
사망 | 1471년 4월 14일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바넷 | |
아버지 |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
어머니 |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 |
형제 | 리처드, 토머스, 조지, 랄프, 로버트, 조앤, 세실리, 앨리스, 엘레노어, 캐서린, 마거릿 |
배우자 | 이사벨라 잉골데스소프 |
자녀 | 조지, 앤, 존, 엘리자베스, 마거릿, 루시, 이사벨라 |
직위 | 노섬벌랜드 백작, 몬터규 후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남동생으로, 형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 최강의 가문이었던 네빌 가문을 이끌며 장미 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나, 1471년 바넷 전투에서 형과 함께 전사했다.2. 생애
1431년경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에서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1453년 1월 그리니치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간의 영지 분쟁에 큰형 리처드 네빌, 작은 형 토머스 네빌과 함께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1454년 10월 31일,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 중 하나인 스탬포드 브리지 인근에서, 존은 형 토머스와 함께 매복을 조직하여 에그리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와 그의 동생 리처드 퍼시를 급습해 체포했다. 이때 수백 명이 전사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토머스 퍼시와 리처드 퍼시는 먼저 미들햄 성으로 이송된 후 요크 공작의 보호 아래 넘겨졌다. 이후 두 퍼시 형제는 11월에 의회에 출두하여 왕명에 거역하고 무력 충돌을 벌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아내, 아들들에게 총 16,800마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선고받았고,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장미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아버지와 두 형을 따라 요크 왕조에 가담했다.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형 토머스와 함께 아버지의 지휘를 받으며 제임스 투셰와 존 서튼이 이끄는 랭커스터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직후의 어느 시점에서 형 토머스와 아버지의 가신 제임스 해링턴과 함께 랭커스터군에게 생포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세 사람은 도주하는 랭커스터군을 추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생포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존은 형 토머스, 제임스 해링턴과 함께 체스터 성에 투옥되었다.
1459년 10월 12일, 요크군은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와해되었고, 요크 측 수장들은 아일랜드와 칼레로 망명했다. 1459년 10월 코번트리에서 소집된 일명 '악마의 의회'는 요크파 수뇌부의 영지와 작위를 일체 몰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에도 감금 생활을 이어가던 존은 1460년 7월 큰형 리처드 네빌이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물리치고 헨리 6세를 잡은 후에야 풀려났다. 1460년 11월 1일, 요크 공작은 존을 왕의 시종으로 임명해 헨리 6세를 보좌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다.
1460년 12월, 요크 공작은 자기 영지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랭커스터파를 응징하기 위해 솔즈베리 백작 등과 함께 출진했다. 이때 존은 큰형 워릭 백작과 함께 런던에 남았다. 그 해 12월 30일, 요크 공작, 솔즈베리 백작, 그리고 작은 형 토머스 네빌이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모조리 잡혀 죽었다. 1461년 2월, 존은 워릭 백작과 함께 군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남하하면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랭커스터군을 응징하러 출진했다. 그러나 2월 17일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적군에게 생포되어 한동안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
1461년 3월 29일,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이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풀려난 존은 1461년 5월 23일 의회에 소환 되었고, 몬터규 남작에 선임되었다. 1462년 5월 21일, 그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462년 12월 24일 뱀버러 성 공방전에 참가해 함락에 기여했으며, 1463년 더럼주의 순회 판사 및 더럼 주교구의 수석 집사를 맡았다. 1463년 1월 엘른윅 성 공방전에 참여해 반란군을 진압했으며, 그 해 스코틀랜드와의 동부 국경 수호자에 선임되어 1470년까지 역임했다.
1464년 초, 랭커스터군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여러 성을 접수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정부와 휴전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침략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양자는 그 해 5월 5일 요크 시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지만, 랭커스터군이 스코틀랜드 사절이 요크로 가는 걸 막으려 하면서 회담이 성사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존은 에드워드 4세의 지시에 따라 6,000 병사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사절들이 요크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랭커스터군 총사령관인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는 뉴캐슬 인근에서 몬터규 후작의 군대를 습격하려 했지만, 정찰병이나 내부 고발자의 경고를 받은 몬터규 후작은 매복 공격을 회피하고 북쪽으로 계속 이동해 뉴캐슬로 향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진군해 알른윅으로 이동한 후, 울러를 향해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1464년 4월 25일 노섬벌렌드의 울러에서 남동쪽으로 7마일 떨어진 글랜턴 마을 북쪽의 헤즐리 무어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서머셋 공작의 5,000 병사와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헤즐리 무어 전투에서, 존은 승리를 거두었고 적장 랄프 퍼시를 처단했다. 랭커스터군이 이렇게 무너진 뒤, 스코틀랜드 사절단은 요크에 무사히 도착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랭커스터파는 알른윅에서 병력을 재편성한 뒤 서머셋 공작의 지휘하에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남하했다. 당시 임무를 완수하고 뉴캐슬로 물러나던 존은 랭커스터군이 또다시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타인 강 남쪽 기슭을 따라 북진했다.
1464년 5월 14일, 존은 헥섬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했다. 존은 전투 다음 날 생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를 처형했다. 뒤이어 끌려온 로스 남작 토머스 로스, 헝거포드 남작 로버트 헝거포드도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랭커스터파의 주요 인물 30명이 추가로 처형되었다. 윌리엄 테일보이스 경은 헨리 6세를 위해 쓸 군자금 2,000파운드를 가지고 석탄 구덩이에 숨어서 스코틀랜드로 피신하려 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한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의 군대에 동행했다가, 헥섬 전투 패전 후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커셔로 도주해 1년간 은거했다. 그는 처음엔 어느 수도원에 숨었다가, 먼케스터 성으로 이동해 존 페닝턴의 보호를 받았다.이후 볼튼에 잠시 머문 뒤, 와딩턴에 사는 리처드 탬페스트라는 인물에 의해 몇 달간 숨겨졌다. 그러나 그의 형제 존 템페스트는 열렬한 요크파였고, 헨리 6세의 정체를 알아보자마자 존의 부관인 제임스 해링턴 경에게 고발했다. 결국 1465년 7월 13일 저녁 식사를 하던 헨리 6세는 제임스 헤링턴 일행의 습격을 받고 도주하다가 클리더로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런던으로 이송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그의 공적을 기려 존을 퍼시 가문의 작위였던 노섬벌랜드 백작에 선임했으며, 퍼시 가문이 소유했다가 왕실에 몰수당했던 영지도 수여했다. 존은 1466년에 노섬벌랜드의 종신 보안관으로 선임되어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1469년 4월, 레데스데일의 로빈이 정부의 권력 남용과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월에는 홀더니스의 로빈이라는 인물이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이었지만 랭커스터 파를 지지했다가 쫓겨난 헨리 퍼시의 복위를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다. 존이 진압에 나서 홀더니스의 로빈을 사살했지만, 레데스데일의 로빈은 탈출한 뒤 반란을 이어갔다.
1469년 7월 26일, 존의 형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에지코트 전투에서 왕실군을 제압하고 에드워드 4세를 붙잡았다. 그 후 워릭 백작은 1469년 9월 의회를 소집한 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존은 여러 귀족과 함께 에드워드 4세 지지를 천명하며 호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지하에 숨어 있던 랭커스터 지지자들이 에드워드 4세가 체포되면서 정계가 혼란한 때를 틈타 험프리 네빌의 지휘하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험프리 네빌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은 워릭 백작과 조지 왕자는 1469년 9월 에드워드 4세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풀어줬다.
에드워드 4세는 네빌 가문의 권세를 약화하기로 마음먹고, 1470년 3월 25일 퍼시 가문의 영지를 헨리 퍼시에게 돌려주고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세웠다. 그 대신 존을 몬터규 후작으로 선임했다. 후작은 백작보다 지위가 높았지만, 존에게는 별도로 새로운 영지가 수여되지 않았다. 형 워릭 백작이 조지 플랜태저넷과 짜고 반란군 지휘관 로버트 웰스와 내통했다가 로스코트 전투로 반란을 진압한 에드워드 4세에게 발각당하면서 해외로 망명했을 때, 존은 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가 영지를 끝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은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1470년 9월, 해외로 망명했던 형 리처드 네빌이 랭커스터파 인사들과 함께 다트머스 항에 상륙했다. 에드워드 4세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군하자, 존은 이때를 틈타 10월 2일 잉글랜드 북부에서 랭커스터파를 집결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 네빌 형제에게 북쪽과 남쪽에서 협공당하게 생기자, 에드워드 4세는 어쩔 수 없이 킹스린에서 배를 타고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다. 1470년 10월 5일, 워릭 백작과 몬터규 후작이 런던에 입성했고,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와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런던 탑에서 헨리 6세를 알현한 뒤 복위 소식을 알렸다. 1470년 10월 13일, 헨리 6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개적으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았다. 이후 존은 스코틀랜드와의 동부 국경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1470년 12월에 잉글랜드 북부 왕의 부관으로 선임되면서 잉글랜드 북부 전체의 보안을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챙겼다. 여기에 존의 아들 조지는 베드퍼드 공작이 되었다.
1471년 3월 14일,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 요크셔의 레이븐스퍼 항에 상륙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뒤 형이 있는 코번트리 성채를 포위하자, 존은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와 함께 코번트리를 구원하러 출진했다. 그 해 4월 5일, 에드워드 4세는 적 구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워릭 백작은 몬터규 후작, 옥스퍼드 백작, 엑서터 공작과 합류한 뒤 에드워드 4세를 추격했다. 그는 런던 주둔군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농성하고 있을 때, 자신이 에드워드 4세를 따라잡아서 회전을 벌이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 런던을 지키고 있던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마중하러 갔고, 서머셋 공작으로부터 런던을 지키고 있으라는 부탁을 받은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에드워드 4세와 협상한 끝에 4월 10일 성문을 개방했다. 에드워드 4세는 런던에 입성한 뒤 헨리 6세의 신변을 확보한 후 런던 탑에 가뒀다.
1471년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북상하면서, 랭커스터파가 다시 데려가는 걸 막기 위해 헨리 6세를 끌고 갔다. 워릭 백작과 몬터규 후작 형제는 에드워드 4세가 이미 런던을 접수하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넷에서 북쪽으로 반 마일 떨어진 런던 로드의 능선에서 군대를 정지시켰다. 그 후 4월 14일에 벌어진 바넷 전투에서, 일보 기록에 따르면 존이 워릭 백작에게 말에서 내린 뒤 걸어서 싸우도록 설득했고, 본인이 일반 군인과 동일한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대의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말을 후방에 묶어뒀다고 한다. 그는 그레이트 노스 로드에서 중앙 부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4세의 중앙 부대와 정면 충돌했다.
존은 바넷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연대기 작가 필리프 드 코민은 그를 매우 용감한 기사라고 평했고, 부르고뉴의 연대기 작가 장 드 와브랭은 전투가 한창일 때 "로망스의 영웅처럼 적의 팔과 머리를 모조리 베어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바넷 전투는 에드워드 4세의 승리로 끝났고, 존과 형 워릭 백작은 함께 전사했다. 다음 날 두 네빌 형제의 유해는 세인트 폴 성당에 "공개적으로 알몸으로" 안치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 후 두 사람의 형제인 조지 네빌이 시신을 수습한 뒤 비샴 수도원에 안장했다.
3. 가족
- 이사벨라 잉글데스소프(1441 ~ 1476): 에드먼드 잉글데스소프 경의 딸이자 제2대 우스터 백작 에드워드 팁토프트의 외조카. 존 네빌이 사망한 뒤 야텐던의 윌리엄 노리스 경과 재혼했다.
- 조지 네빌(1461 ~ 1483): 베드퍼드 공작. 아버지가 전사한 후 작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1475년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의 네빌 상속권이 삼촌인 리처드 네빌의 딸 앤 네빌과 결혼한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넘어갔고, 조지는 외할아버지인 에드먼드 잉글데스소프와 외할머니인 조앤 팀토프트의 영지 절반만 소유했다. 1478년 성인이 되기 직전에 공작의 작위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베드퍼드 공작위를 박탈당했고, 이 칭호는 에드워드 4세의 셋째 아들인 요크의 조지에게 주어졌지만 1479년 3월 조지 왕자가 요절하면서 왕실로 넘어갔다. 이후 리처드 3세의 치세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83년에 사망했다.
- 앤 네빌: 스토노르의 윌리엄 스토노르 경의 부인.
- 존 네빌: 유아기에 사망.
- 엘리자베스 네빌: 제6대 메셈의 스크루프 남작 토머스 스크루프와 초혼, 헨리 웬트워스 경과 재혼.
- 마거릿 네빌: 존 모티머 경과 초혼,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과 재혼했지만 결혼 무효 처분을 받았고, 로버트 다운스 경과 재차 결혼함.
- 루시 네빌: 올드워크의 토머스 피츠윌리엄 경과 초혼, 앤서니 브라운 경과 재혼.
- 이사벨라 네빌: 밀롬의 윌리엄 허들스턴 경과 초혼, 윌리엄 스미시 경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