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Edmund Beaufort, 4rd Duke of Somerset | |
성명 | 에드먼드 보퍼트 Edmund Beaufort |
출생 | 1438년 |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 |
사망 | 1471년 5월 6일 (향년 32~33세) |
잉글랜드 왕국 튜크스버리 | |
아버지 |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
어머니 | 엘리노어 뷰챔프 |
형제 | 헨리, 존, 엘리노어, 조앤, 앤,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
직위 | 서머셋 공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4대 서머셋 공작.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로서 요크파와 대결했지만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뒤 곧바로 처형당했다.2. 생애
1438년경 제2대 서머셋 공작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딸인 엘레노어 뷰챔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서머셋 공작 작위는 형 헨리 보퍼트에게 넘어갔다. 이후 형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한 그는 1461년 토우턴 전투 패전 후 형과 함께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형과 함께 프랑스로 파견되어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 요크파에 맞서는 형의 원정에 동행했다.1464년 5월 형 헨리 보퍼트가 헥섬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4세를 국왕으로 받든 잉글랜드 왕국은 헨리 보퍼트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몰수했지만, 랭커스터파는 에드먼드를 제4대 서머셋 공작으로 받들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스코틀랜드 왕실이 요크 왕조와 화해하자 동생 존과 함께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1468년 6월 용담공 샤를이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인 요크의 마거릿과 결혼하자, 신부가 도착하기 전날 브뤼헤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470년 10월 에드워드 4세가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 축출되고 헨리 6세가 복위하자 1471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와 작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하지만 그는 요크파의 핵심 인사였던 워릭 백작을 몹시 불신했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워릭 백작 간의 화해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신 처럼 워릭 백작을 불신하는 인사들과 함께 워릭 백작의 권세를 억제하려 노력했다.
1471년 3월 14일, 에드워드 4세가 뷰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에 힘입어 잉글랜드에 돌아왔다. 워릭 백작은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출진하면서, 그에게 런던 수비를 맡겼다. 그러던 중 프랑스에 가 있던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마중하러 갔다. 그는 런던 수비를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에게 맡겼다. 그러나 조지 네빌은 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 접근하자 그와 협상한 끝에 4월 10일 성문을 개방했다. 에드워드 4세는 런던에 입성한 뒤 헨리 6세의 신변을 확보했다.
1471년 4월 14일, 워릭 백작 등이 이끄는 랭커스터군이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의 요크군에게 참패하고 워릭 백작이 전사했다. 며칠 후 웨이머스에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와 합류한 에드먼드는 이 소식을 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절망에 빠져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지만,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구하고 에드워드 4세를 타도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에드먼드도 왕자의 뜻에 동의했다. 결국 마르그리트 왕비는 운명을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원정을 지속하는 데 동의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실질적인 랭커스터군 사령관을 맡았고, 랭커스터파의 중요 지지 기반인 웨일스로 가서 재스퍼 튜더와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이를 막기 위해 맹렬히 추격했고, 1471년 5월 4일 적군에게 따라잡힌 에드먼드는 어쩔 수 없이 튜크스베리 전투를 치렀다. 그는 우익 부대를 통솔해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적군과 맞서다가, 적군이 퍼붓는 포탄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양산되자 글로스터 부대에 대한 측면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는 중앙 부대 지휘관 존 웬록에게 자신을 지원하라고 지시한 뒤, 요크군 좌익과 튜크스베리 숲 사이 지역으로 진격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휘하 부대의 뱡향을 틀어서 서머셋 공작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튜크스베리 숲에 숨어 있던 요크군 기마 창병 200명이 오른쪽 측면에서 서머셋 공작을 공격했다. 여기에 존 웬록은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의 나머지 군대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서머셋 공작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웬록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요격당한 서머셋의 부하들은 혼란에 휩싸인 끝에 패주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서머셋 공작은 전장을 떠나던 존 웬록과 마주친 뒤, 자신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은 그를 질책하고 철퇴로 웬록의 머리를 쪼개버렸다고 한다. 서머셋 공작의 군대가 무너지자, 다른 2개의 랭커스터 부대도 잇달아 붕괴했다. 랭커스터 장병들은 어떻게든 도주하려 했지만, 후방에 흐르던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이 추격병들에게 대거 살육되었다.
참수되는 에드먼드 보퍼트.
튜크스베리 전투 패전 후, 에드먼드는 추종자 15명과 함께 튜크스베리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수도원장은 에드워드 왕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고는 수도원의 피난처에서 그들을 데려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왕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다음날 서머셋 공작과 그의 동료들이 수도원에서 나오자마자 체포한 뒤 약식 재판 후 처형했다. 그의 유해는 튜크스베리 수도원 남쪽의 아치 아래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서 가문의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을 후손을 남기지 않았고,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그와 함께 전사한 동생 존 보퍼트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보퍼트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