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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넷 전투 영어: Battle of Barnet | ||
| | ||
| 시기 | ||
| 1471년 4월 14일 | ||
| 장소 | ||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바넷 | ||
| 원인 | ||
| 잉글랜드 왕국의 패권을 둘러싼 에드워드 4세 추종 세력과 랭커스터파 및 네빌 가문의 대결. | ||
| 교전 세력 | ||
| 요크 왕조 | 랭커스터 가문 | |
| 지휘관 | ||
| 병력 | ||
| 8,000명 | 10,000명 | |
| 피해 | ||
| 500명 | 2,000명 | |
| 결과 | ||
| 요크군의 승리 | ||
| 영향 | ||
| 에드워드 4세의 재집권. | ||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71년 4월 14일,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과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랭커스터군이 맞붙은 대규모 회전. 에드워드 4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재집권했다.
2. 배경
1470년 3월 12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는 로스코트 전투에서 로버트 웰스가 이끄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로버트 웰스를 체포한 뒤 3월 19일에 처형했다. 이때 로버트 웰스는 반역을 자백하면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반란의 공범이자 선동자로 지목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로버트 웰스와 주고받은 서신도 발견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두 사람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하고 체포령을 내렸고, 두 사람은 추격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그들은 처음엔 워릭 백작의 본거지였던 칼레로 가려 했지만 거부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후 워릭 백작은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주선으로 앙제의 생 모리스 대성당에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만나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동안 그녀에게 맞서 싸운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 왕비는 워릭 백작이 여전히 런던 탑에 투옥되어 있는 남편 헨리 6세를 복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해준다면 그가 잉글랜드의 권신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자기 딸 앤 네빌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할 음모를 꾸몄다.
1470년 9월 초,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왕조의 복귀를 꾀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상했다. 워릭 백작은 이 때를 틈타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고 재스퍼 튜더,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함께 9월 13일 다트머스 항에 상륙했다. 이후 웨일스에서 랭커스터파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에드워드 4세는 뒤늦게 워릭 백작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돌려 돈캐스터로 이동했지만, 10월 2일 몬터규 후작 존 네빌이 잉글랜드 북부에서 랭커스터 파를 결집히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몬터규 후작은 지난날 워릭 백작의 동생으로서 형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형에게 호응하기로 했다. 이제 네빌 형제에게 북쪽과 남쪽에서 협공당하게 생기자, 에드워드 4세는 어쩔 수 없이 킹스린에서 배를 타고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다.
1470년 10월 5일, 워릭 백작과 몬터규 후작이 런던에 입성했고,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와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런던 탑에서 헨리 6세를 알현한 뒤 복위 소식을 알렸다. 1470년 10월 13일, 헨리 6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개적으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았다. 이후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는 곧 곤경에 처했다. 랭커스터파는 1461년 토우턴 전투 이래 요크 파벌에게 빼앗겨버린 영지를 돌려받기를 강력히 원했고, 요크파는 워릭 백작에게 충성한 대가로 토지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고심 끝에 에드워드 4세와 함께 플란데런으로 도망친 소수의 추종자들의 영지만 몰수해 랭커스터 파와 요크파에 나눠줬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양자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은 에드워드 4세가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박탈당한 뒤 요크 공국을 받았지만, 자기가 왕이 되지 못하고 헨리 6세가 복위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147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가 상속인 없이 사망한 경우 조지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로 합의되었지만, 이 때문에 랭커스터 파의 강한 경계를 받아야 했다. 여기에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는 에드워드 왕자가 사망한 뒤엔 자신들이 권좌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고, 이를 이루기 위해 여러 음모를 꾸몄다.
1471년 초, 루이 11세가 부르고뉴 공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워릭 백작에게도 함께 선전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워릭 백작이 이에 응하자,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에드워드 4세에게 원정군을 지원해 줄 테니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왕위를 되찾으라고 독려했다. 그 해 3월 11일, 에드워드 4세는 용담공 샤를이 제공한 전선 36척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향했고, 3월 14일 요크셔의 레이븐스펀에 상륙했다. 그는 자신이 왕위를 위해 헨리 6세에게 도전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요크 공작이라는 칭호를 주장하기 위해 돌아온 거라고 선언했고, 이 때문에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후 요크로 진군해서 지역 귀족들의 호응을 얻어 입성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노팅엄에 입성한 후, 4월 1일에 비로소 자신이 잉글랜드 국왕으로 돌아왔음을 선포했다. 토머스 파레 경, 제임스 해링턴 경, 윌리엄 스탠리 경, 윌리엄 노리스 경과 그들의 개인 수행원이 합류했다.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도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형의 편지를 받고 진영을 바꿔서 벤버리에서 에드워드 4세와 합류했다. 워릭 백작은 상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코번트리 성채에 숨어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에드워드 4세는 코번트리를 포위했고, 조지 왕자는 워릭 백작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워릭 백작은 조지 왕자의 배신에 분노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그의 형제인 몬터규 후작과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의 합류를 기다렸다. 여기에 프랑스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속히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와 달라고 청했다.
1471년 4월 5일, 에드워드 4세는 몬터규 후작, 옥스퍼드 백작, 엑서터 공작의 구원군이 코번트리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워릭 백작은 몬터규 후작, 옥스퍼드 백작, 엑서터 공작과 합류한 뒤 에드워드 4세를 추격했다. 그는 런던 주둔군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농성하고 있을 때, 자신이 에드워드 4세를 따라잡아서 회전을 벌이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 런던을 지키고 있던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마중하러 갔고, 서머셋 공작으로부터 런던을 지키고 있으라는 부탁을 받은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에드워드 4세와 협상한 끝에 4월 10일 성문을 개방했다. 에드워드 4세는 런던에 입성한 뒤 헨리 6세의 신변을 확보한 후 런던 탑에 가뒀다. 4월 13일,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북상하면서, 랭커스터파가 다시 데려가는 걸 막기 위해 헨리 6세를 끌고 갔다. 이후 양군이 바넷에서 조우하면서, 잉글랜드의 패권을 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471년 4월 13일 저녁,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이 하트퍼드셔의 바넷에 도착했다. 워릭 백작은 런던으로 이동하던 중 적이 먼저 런던을 접수하고 자신을 치러 왔음을 인지하고 바넷에서 북쪽으로 반 마일 떨어진 런던 로드의 능선에서 군대를 정지시켰다. 랭커스터군은 그의 지휘하에 전투 대형을 갖췄다.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는 우익 부대를, 워릭 백작은 중앙 부대를,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는 좌익 부대를 이끌었다. 기병들은 좌우 측면에 배치되었고, 궁수대는 중앙 부대 전면에 집중 배치되었다. 그들은 이런 대형으로 밤을 보냈다.에드워드 4세는 그날 밤 바넷을 지나 랭커스터군의 진영 인근에 도착한 뒤 진영을 세우고, 동이 트자마자 전투 대열을 정비해 전투 준비를 했다. 요크군 우익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지휘했고, 중앙은 에드워드 4세가 이끌었으며, 좌익은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지휘했다. 에드워드 4세는 신뢰할 수 없는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을 자기 곁에 둬서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으며, 헨리 6세도 그의 곁에 억류되었다. 요크군의 마지막 행군은 어둠 속에서 이뤄졌는데, 그들은 랭커스터군의 위치를 잘못 계산하여 큰 문제를 야기했다. 요크군의 방어선이 랭커스터군의 좌익과 중앙 부대과 마주쳤지만, 우익 부대는 적과 마주치지 않았다. 거기에 요크군 좌익 부대는 랭커스터군 우익 부대에게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적군 진영에 예상보다 더 가까이 진을 쳤다.
전투 당일인 4월 14일 아침엔 몇 야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꼈기 때문에, 랭커스터군은 적이 그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은 대포를 맹목적으로 발사해 적진을 초토화하려 했지만, 그 포탄들은 전부 공터에 떨어져서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장병들은 나팔과 북소리, 그리고 중무장한 병사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었다. 오전 5시 경, 양군의 공격 명령이 내려졌고, 양자는 서로를 향해 진군했다. 워릭 백작은 말을 후방으로 보낸 뒤 부하 기사들과 함께 도보로 최전선에 갔고, 에드워드 4세는 다른 기병들에겐 말에서 내려 아군과 함께 싸우라고 지시하면서도 본인은 흰 말을 계속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
이렇게 백병전이 벌어질 무렵, 요크군 우익 부대는 반대편에 적군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우익 부대의 지휘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방향을 돌려 엑서터 공작이 지휘하는 랭커스터 좌익 부대 측면을 공격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의 군대는 경사지를 따라 이동해야 했기에, 진격은 느리고 힘들었다. 한편, 옥스퍼드 백작이 지휘하는 랭커스터 우익 부대도 자기들을 상대할 적군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 역시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요크군 좌익 부대를 측면에서 공격했다. 요크군 좌익 부대는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고, 옥스퍼드 백작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살육을 자행하고, 바넷에 진입한 뒤 마을을 약탈했다. 그 사이, 각군의 중앙부대는 안개 속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렇듯 양자가 상대방의 좌측 측면을 강타하면서, 랭커스터군은 방향을 돌려 동쪽을 향했고, 요크군은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옥스퍼드 백작은 바넷 약탈을 완료한 뒤 병사들을 규합하여 전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는 짙은 안개 속에서 힘겹게 행군하다가 목표로 삼았던 요크군 후방이 아닌 랭커스터군 후방과 마주쳤다. 옥스퍼드 백작의 병사들은 자기들이 워릭 백작의 군대와 조우했음을 인지했지만, 워릭 백작의 병사들은 요크군이 후방에서 나타났다고 오판하고 그들에게 화살을 퍼부은 뒤 돌격했다. 옥스퍼드 백작의 군대는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고 여기고 "반역이다! 워릭 백작이 배신했다!"라고 외쳤다. 옥스퍼드 백작은 가능한 한 많은 병사를 수습한 뒤 전장을 떠났고, 워릭 백작의 병사 상당수가 이들을 추격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약 3시간이 지나서 양측 모두 지쳤을 때, 에드워드 4세는 예비군을 투입하고 전군에 공격을 재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힘을 얻은 요크군이 몰아붙이기 시작할 때, 안개가 걷히면서 랭커스터군이 북쪽으로 떠나는 모습이 드러났다. 요크군은 이들을 맹추격했고, 워릭 백작은 전장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후방에 남겨뒀던 자기 말을 타려고 했다가 여러 무장병들의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몬터규 후작도 전사했고, 엑서터 공작은 처음에는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부상을 입고 생존한 뒤 에드워드 4세에게 항복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그대로 전장을 이탈해 자기 영지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