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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코트 전투 영어: Battle of Losecoat | ||
| 시기 | ||
| 1470년 3월 12일 | ||
| 장소 | ||
| 잉글랜드 왕국 이스트 미들랜즈 에핑엄 인근 티켄코트 워렌 북쪽의 그레이트 노스 로드 옆 평원 | ||
| 원인 | ||
|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하려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음모. | ||
| 교전 세력 | ||
| 요크 왕조 | 반란군 | |
| 지휘관 | ||
| 병력 | ||
| 미상 | 미상 | |
| 피해 | ||
| 미상 | 미상 | |
| 결과 | ||
| 요크군의 승리 | ||
| 영향 | ||
| 워릭 백작과 조지 왕자의 프랑스 왕국 망명과 랭커스터파와의 결탁. | ||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70년 3월 12일,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사주를 받은 반란군을 물리친 전투.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이를 계기로 랭커스터파와 결탁해 에드워드 4세 타도에 힘썼다.2. 상세
1469년 7월 26일, 워릭 백작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사주를 받은 반란군이 토벌대를 상대로 에지코트 전투에서 격파했다. 노팅엄에 있던 에드워드 4세는 생포된 뒤 미들햄 성에 구금되었고, 토벌대 지휘관이었던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와 데본 백작 험프리 스태퍼드는 피살되었다. 1469년 9월, 워릭 백작은 의회를 소집한 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의 동생 존 네빌을 포함한 귀족들이 에드워드 4세 지지를 천명하며 호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여기에 지하에 숨어 있던 랭커스터 지지자들이 에드워드 4세가 체포되면서 정계가 혼란한 때를 틈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워릭 백작과 조지 왕자는 1469년 9월 에드워드 4세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풀어줬다.이후 에드워드 4세는 네빌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랭커스터 파 인사로서 토우턴 전투 후 워릭 백작 의 동생 존 네빌에게 영지를 잃었던 전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화해하고, 그의 작위와 영지를 돌려줬다. 워릭 백작은 네빌 가문을 배제하려는 왕의 움직임에 분개했고, 조지 왕자를 왕으로 올리기 위해 정변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1470년 2월, 지난날 랭커스터 파에 가담했다가 토우턴 전투 후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하여 사면받았던 윌로비 드 에레스비 남작 로버트 웰스가 에드워드 4세의 말 관리인 토머스 버크와 사적인 갈등을 벌인 끝에, 토머스 버크의 본거지인 케인즈버러 올드 홀을 습격했다. 에드워드 4세는 로버트 웰스의 아버지인 제7대 웰스 남작 리처드 웰스와 외삼촌인 토머스 다이모크 경을 런던으로 불러들여서 로버트 웰스의 행위를 설명하게 했다. 두 사람 모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피신했다가, 3월 3일 사면 약속을 받고 그곳에서 나왔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군대를 이끌고 링컨셔로 진군하기로 하자, 로버트 웰스는 국왕이 토머스 버크를 구하려고 오는 게 아니라 이전에 사면받았던 랭커스터 파벌을 모조리 죽이고 링컨셔를 초토화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는 워릭 백작과 조지 왕자가 자신과 함께 한다고 선전하고, 스스로 "링컨셔 평민 대장"으로 내세웠다. 1470년 3월 7일, 에드워드 4세는 반란군이 스탬퍼드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기에 워릭 백작이 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출격시키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에드워드 4세는 두 사람이 반란군과 결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워릭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기 전, 에드워드 4세는 어머니 세실리 네빌의 런던 자택에서 클래런스 공작을 만났다. 클래런스 공작은 형을 돕기 위해 영지로 가서 군대를 규합하겠다고 권했고, 에드워드 4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3월 11일, 에드워드 4세는 포더링헤이에 도착한 뒤, 반란군이 레스터로 진로를 변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로버트 웰스에게 서한을 보내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자기가 잡고 있는 그의 아버지 리처드 웰스를 처형하겠다고 경고했다. 리처드 웰스 또한 아들에게 서신을 보내 반란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로버트 웰스는 군대를 스탬퍼드로 돌려보내기로 했지만,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음을 바꿔 에핑엄 인근 티켄코트 워렌 북쪽의 그레이트 노스 로드 옆 평원에서 전투 대형을 짰다.
1470년 3월 12일, 에드워드 4세의 군대가 로스코트 필드에 도착했다. 에드워드 4세는 전투 대열을 배치한 뒤, 양군 사이의 공간에 리처드 웰스와 토머스 다이모크 경을 끌어낸 후 양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반란군은 "워릭!"과 "클래런스!"라는 함성을 지르며 진군했고, 에드워드 4세는 포탄이 한 발 발사된 직후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리하여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듯 했지만, 토벌대가 반란군 최전선과 맞붙기도 전에 반란군이 왕의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과 싸우기를 기피하고 도망치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로버트 웰스와 그의 보병 사령관 리처드 워렌은 반군이 무너지자 도주했지만 이내 체포되었고, 일주일 후인 3월 19일에 처형되었다. 이때 로버트 웰스는 반역을 자백하면서,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을 반란의 공범이자 선동자로 지목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로버트 웰스와 주고받은 서신도 발견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두 사람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하고 체포령을 내렸고, 두 사람은 추격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그들은 처음엔 워릭 백작의 본거지였던 칼레로 가려 했지만 거부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후 워릭 백작은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주선으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화해하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자기 딸 앤 네빌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 후 그는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