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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드 베레(13대 옥스퍼드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John de Vere, 13th Earl of Oxford
성명 존 드 베레
John de Vere
출생 1442년 9월 8일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브레인트리 헤딩엄 성
사망 1513년 3월 10일 (향년 70세)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브레인트리 헤딩엄 성
아버지 12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어머니 엘리자베스 하워드
형제 오브리, 조지, 리처드, 토머스, 메리, 조앤, 엘리자베스
배우자 마거릿 네빌, 엘리자베스 스크로프
자녀 캐서린(사생아)
지위 제13대 옥스퍼드 백작, 법무장관, 잉글랜드 무관장, 해군 제독, 왕실 근위대 대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서 요크 왕조에 대적했으며, 군대를 이끈 경험이 일천했던 헨리 7세를 대신해 총사령관을 맡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쳤다. 그 후 헨리 7세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며, 헨리 7세의 아들인 헨리 8세 치세 초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생애

1442년 9월 8일, 12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기사 존 하워드의 딸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462년 2월, 그의 아버지 존과 형 오브리는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노퍽에서 잉글랜드 무관장인 초대 우스터 백작 존 팁토프트의 주관하에 재판을 받은 뒤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버지 존은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고, 형 오브리는 6일 전에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어린 존은 에드워드 4세의 허락을 받아 같은 해인 1462년에 옥스퍼드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고, 옥스퍼드 가문의 세습 지위인 잉글랜드 대신관을 맡았다.

1464년 1월 18일, 에드워드 4세는 존에게 옥스퍼드 백작의 작위와 영토를 부여한다는 헌장을 공식적으로 내렸다. 1465년 5월 26일, 그는 잉글랜드 대신관으로서 에드워드 4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대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1468년 11월, 그는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1469년 1월에 풀려났고, 그 해 4월 5일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는 아마도 그의 처남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탄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469년 7월, 존은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반란에 가담하여 에드워드 4세를 한때 실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1470년 봄 반격을 가해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을 축출했고, 존 역시 프랑스로 망명한 뒤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합류했다. 이후 워릭 백작을 설득해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도록 했고, 1470년 9월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의 잉글랜드 침공에 참여했다. 에드워드 4세는 곧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고, 런던 탑에 갇혀 있던 헨리 6세가 복위했다. 그 해 10월 13일, 존은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가는 행렬에서 헨리 6세 앞에서 왕실의 예복을 들고 행진했다. 그 후 아버지와 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우스터 백작 존 팁토프트를 대신해 무관장에 선임되었고, 우스터 백작에게 사형을 선고한뒤 1470년 10월 8일 타워 힐에서 참수했다.

1471년 3월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요크셔 해안에 상륙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워릭 백작과 함께 이에 맞섰고, 4월 14일 바넷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 우익을 이끌었고, 에드워드 4세의 최측근인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요크군 좌익을 몰아붙여서 격파한 뒤 도주하는 적을 맹추격한 뒤 텅 비어 있는 바넷 시를 약탈했다. 약탈을 마친 뒤, 존은 군대를 수습한 뒤 에드워드 4세의 군대 후방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당시엔 안개가 무척 자욱했기 때문에, 그의 군대는 워릭 백작의 군대 쪽으로 잘못 행진했다. 그들은 워릭 백작의 군기를 알아봤지만, 워릭 백작의 병사들은 옥스퍼드 백작의 문장을 요크 가문의 문장으로 착각하고 공격했다. 이에 옥스퍼드 백작의 병사들은 "반역이다! 워릭 백작이 배신했다!"라고 외쳤고, 옥스퍼드 백작은 즉시 자기 영지로 철수했다. 결국 바넷 전투는 에드워드 4세의 승리로 끝났고, 워릭 백작은 전사했다.

그 후 존은 두 형제 조지, 토머스 및 40명 가량의 분견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프랑스로 이동해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은 뒤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선박을 약탈했으며, 때때로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그의 직위와 재산을 몰수했다. 1473년 9월 30일, 존은 콘월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바위 섬인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섬은 곧 존 포르테스큐가 지휘하는 왕실군에게 포위되었다. 그의 부하 대부분은 탈영했고, 존도 화살에 얼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1474년 2월 15일, 존은 어쩔 수 없이 형제들과 함께 왕실군에 항복했다.

에드워드 4세는 존을 칼레 인근의 암메 요새에 감금했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하워드는 자기 재산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양도해야 했다. 그 후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478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턱까지 물이 차 있던 해자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지만 발각되어 도로 감금되었다. 1484년 8월,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된 리처드 3세는 존을 잉글랜드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존은 이를 알게 되자 암메 요새 대장 제임스 블런트를 설득해 브르타뉴 공국에 망명 중이던 헨리 튜더에게 함께 귀순하기로 했다. 헨리 튜더는 암메 요새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뒤 자기를 찾아온 존을 기쁘게 맞이했다. 이 후 존은 암메 요새로 돌아와서 지역 수비대를 설득해 헨리 튜더를 받들게 했다.

1485년 8월 7일, 존은 헨리 튜더와 함께 프랑스 용병 2,000명을 거느리고 웨일스 서부 항구인 밀보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 후 웨일스에서 헨리 튜더를 지지하는 지역 유지 및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내 전력을 6천 명으로 끌어올린 뒤, 런던을 향해 진군하다가 8월 22일 보스워스 평원에서 리처드 3세가 이끄는 8천 왕실군과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보스워스 전투에서, 존은 전투를 이끈 경험이 부족한 헨리 튜더를 대신해 총사령관을 맡았다. 리처드 3세의 군대가 능선을 따라 쭉 늘어선 것을 본 존은 전위, 중앙, 후위의 3개 부대로 나누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에 병력을 하나로 모으고 적군의 중앙을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군에 깃발에서 3m 이상 떨어지지 말라고 지시했고, 각 부대는 서로 뭉쳐서 기병대가 양익을 담당하는 하나의 거대한 무리를 형성했다. 그 후 존은 군대를 능숙하게 이끌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리처드 3세는 전사했다.

이리하여 경쟁자를 물리치고 잉글랜드 왕이 된 헨리 7세는 존의 모든 작위를 회복하고 몰수당했던 영지를 돌려줬다. 또한 존은 대법관, 잉글랜드 제독, 트렌트 강 남쪽 랭커스터 공국의 대집사, 런던 탑의 경비대장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왕실 경비대 초대 대장에 임명되었고, 추밀원의 위원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대법관으로서 헨리 7세와 그의 아내 요크의 엘리자베스대관식에 참석했으며, 1486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헨리 7세의 장남인 아서 튜더대부가 되었다. 그는 아서 튜더에게 금박을 입힌 컵이 담긴 두 개의 대야를 선물했다.

1487년 5월,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으로 지목된 램버트 심넬의 반란 진압에 착수한 존은 6월 16일 장미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일컬어지는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이 이끄는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램버트 심넬을 체포해 헨리 7세에게 넘겼다. 1492년에는 피카르디로 가서 프랑스 왕실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한 몫했다. 1497년, 존은 콘월 민중 봉기 진압에 착수해 블랙히스 전투에서 반란군을 섬멸했다. 얼마 후,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를 자칭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망명 생활하던 퍼킨 워벡이 콘월에 상륙한 뒤 리처드 4세의 등극을 선포하자, 존은 다시 진압에 착수해 반란군을 섬멸하고 퍼킨 워벡을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 탑에 가두게 했다.

1499년 11월 21일, 존은 잉글랜드의 수석 집사로서 제17대 워릭 백작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던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의 탈옥 시도를 적발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이 재판에서,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은 퍼킨 워벡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퍼킨 워벡의 깃발 아래 지지자들을 규합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시 15년간 감옥에서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워릭 백작은 자기 죄를 인정했고, 퍼킨 워백과 워릭 백작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퍼킨 워벡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워릭 백작은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플랜태저넷 왕조의 합법적인 남성 계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튜더 왕조를 위협할 만한 왕족은 모두 사라졌다.

존은 헨리 7세의 총애를 톡톡히 받으면서 1,600파운드에 달하는 연간 토지 수입을 얻었으며, 왕이 전국을 순행할 때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509년 4월 22일 헨리 7세가 사망하고 둘째 아들 헨리 8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을 때, 존은 대신관으로서 대관식을 집전했으며 헨리 8세 치세 초기에 튜더 왕조를 수호하는 백작으로서 왕실의 호의를 받았다. 그는 에식스의 위벤호와 헤딩엄 성에 거주하면서, 헤딩엄 성의 망루를 추가하고 새로운 대강당과 여러 개의 탑을 건설했다. 1513년 3월 10일 헤딩엄 성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4월 24일 콜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존은 생전에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이자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누이인 마거릿 네빌과 초혼했고, 마거릿 네빌이 1506년 11월 20일과 1507년 1월 14일 사이에 사망한 뒤 벤틀리의 리처드 스크로프 경의 딸이며 제2대 보몬트 자작 윌리엄 보몬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스크로프와 재혼했다. 그러나 두 아내로부터 자녀를 얻지 못했고, 사후 조카인 존 드 베레가 제14대 옥스퍼드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사생아인 캐서린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비남작 지주로 일컬어진 로버트 브로튼 경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