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3 15:45:54

퍼킨 워벡

파일:Perkin_Warbeck.jpg
성명 퍼킨 워벡
Perkin Warbeck
출생 1474년
플란데런 백국 투르네
사망 1499년 11월 23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타이번
아버지 장 드 베르베크
어머니 카트린 드 파
배우자 캐서린 고든
직위 잉글랜드 왕위 주장자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왕위 요구자.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를 사칭하여 튜더 왕조헨리 7세에 맞서다가 체포된 뒤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한 끝에 처형당했다.

2. 생애

퍼킨 워벡이 체포된 후 심문에서 밝힌 뒤 헨리 7세의 명령으로 대중에 출간된 그의 전기에 따르면, 퍼킨 워벡은 플란데런 백국 투르네에서 시 검사관으로 근무했던 장 드 베르베크와 카트린 드 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벡은 심문에서 자신과 관련 있는 투르네 인사들을 여럿 언급했는데, 이는 투르네 지역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안트베르펜으로 데려간 뒤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했다. 그는 안트베르펜과 미델뷔르흐에서 여러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고, 잉글랜드 상인 존 스트루 밑에서 몇 달간 일했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몇 년간 일한 뒤, 퍼킨 워벡은 해외 여행을 간절히 원해 브르타뉴 상인의 조수로 일했다. 1491년, 퍼킨 워벡은 17살의 나이에 브르타뉴 상인과 함께 아일랜드 코크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 코크 주민들은 그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요크 왕조의 일원이 분명하니 왕실의 영예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벡은 심문에서 이들이 요크 왕조를 타도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그를 에드워드 4세의 어린 아들로 간주하고 일을 벌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퍼킨 워벡이 심문 중에 밝힌 이야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헨리 7세를 따르는 심문관들의 강압을 받았기에 상당 부분 부정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대의 수많은 이가 그의 외모가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과 매우 닮았다고 밝혔기에, 일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4세, 그의 형제 리처드 3세 또는 그들의 누이 요크의 마거릿사생아 중 한 명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1490년, 퍼킨 워벡은 부르고뉴국의 공작 용담공 샤를의 미망인이자 막시밀리안 1세를 대신해 메헬런에서 플랑드르를 다스리던 요크의 마거릿의 궁정에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이며, 그의 형인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감금된 후, 형은 살해되었지만 자신은 나이가 매우 어리고 별다른 죄를 지었지 않기 때문에 몇 년간 자신의 진짜 이름과 출신을 숨기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풀려난 후에는 유럽에 숨어 있었지만, 자기를 보호하던 에드워드 브램튼이 떠난 뒤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당시 형제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요크 왕조를 무너뜨린 헨리 7세를 증오해 어떻게든 축출하고 싶었던 요크의 마거릿은 이에 솔깃해 퍼킨 워벡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공식석상에서 퍼킨 워벡을 자신의 조카로 대접했으며, 외국 통치자들과 교황에게 편지 여러 통을 보내 조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491년, 퍼킨 워벡은 마거릿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4년 전 램버트 심넬이 그랬던 것처럼 아일랜드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램버트 심넬의 반란이 실패한 뒤 헨리 7세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못 내고 있었기에 무산되었다. 이에 워벡은 방향을 돌려 프랑스로 향했는데,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프랑스의 적수인 잉글랜드 왕국을 약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그를 궁정에서 극진히 영접했다. 나중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헨리 7세에 반기를 든 자들을 궁정에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퍼킨 워벡을 부르고뉴 궁정으로 안전하게 보내줬다.

헨리 7세는 요크의 마거릿이 퍼킨 워벡을 숨겨주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펠리페 1세에게 항의했다. 펠리페 1세가 별다른 답변을 보내지 않자, 헨리 7세는 부르고뉴에 대한 무역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퍼킨 워벡은 펠리페 1세의 아버지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초대를 받아 전임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리처드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495년 7월 3일, 퍼킨 워벡은 요크의 마거릿의 자금 지원을 받고 용병을 고용한 뒤 켄트주의 해안 도시 딜에 상륙했다. 그는 주민들이 자기에게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별다른 호응이 없었고, 토벌대가 급습하면서 용병 150명이 전사하자 아일랜드로 피신했다.

그 후 아일랜드에서 제9대 데스몬드 백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지원을 받아 워터포드를 공략해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강한 저항에 직면한 데다 토벌대가 접근하자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스코틀랜드 왕에게 있어 워벡은 환영할 만한 정치적 도구였는데, 헨리 7세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유럽 국가의 왕녀 중 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4세는 처음에는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퍼킨 워벡의 결혼을 추진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의 딸과 맺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두 공동왕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데 관심이 있었고, 결국 이번에도 성사되지 않았다.

1496년 1월, 제임스 4세는 퍼킨 워백과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딸인 캐서린 고든의 결혼을 주선하고, 결혼 축하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이렇듯 퍼킨 워벡의 위세가 위협적으로 커지자,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자기 딸 마거릿 튜더를 제임스 4세의 신부로 제안했다. 제임스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퍼킨 워벡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4세'라고 선포했다. 1496년 9월 20일, 제임스 4세는 퍼킨 워벡을 앞세워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로 진군했다. 노섬벌랜드 주민들이 퍼킨 워벡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스코틀랜드군은 노섬벌랜드를 파괴하고 황폐화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접근하자, 제임스 4세는 즉시 군대를 철수했다.

1496년 11월 5일,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이에 제임스 4세는 국경을 요새화하고 청야전술을 준비했으며,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소규모 습격전을 여러 차례 벌였다. 하지만 헨리 7세와 제임스 4세 모두 전면전을 벌이기엔 재정이 빠듯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곧 평화 협상을 벌였다. 이때 헨리 7세는 퍼킨 워벡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제임스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퍼킨 워벡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워벡은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러던 1497년 초 콘월에서 헨리 7세의 가혹한 세금 징수에 분노한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곧바로 콘월로 가기로 했다. 1497년 9월 7일, 퍼킨 워벡은 콘월에 상륙했다. 당시 농민 반란은 이미 진압되었지만,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퍼킨 워벡은 주민들에게 자신이 승리할 경우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혹한 농민 수천 명이 그를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4세로 받들었다. 그 후 퍼킨 워벡은 콘월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인 엑서터로 진군했고, 9월 17일에 엑서터를 포위했다. 하지만 도시 공략이 쉽지않자 4일 후 포위를 풀고 톤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참패했고, 퍼킨 워벡은 기병 30명과 함께 뷰리외로 도주했지만 끝내 따라잡혀 체포되었다.

그 후 런던 탑에 갇힌 퍼킨 워벡은 자신이 사기꾼임을 자백했다. 헨리 7세는 그가 진술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잉글랜드 전역과 유럽 대륙에 널리 퍼뜨리게 한 뒤, 퍼킨 워벡을 풀어주고 궁정에서 환대받게 했다. 이후 퍼킨 워벡은 왕실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감시를 끊임없이 받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 왕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궁정에서 18개월을 보낸 후, 그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1499년, 그는 런던 탑에 15년째 갇혀 있던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탈출을 계획했다. 워릭 백작 재판 문서에 따르면, 워벡은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선포했고, 워릭 백작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퍼킨 워벡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지지자들을 집결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런던 탑을 불태우고 플랑드르로 탈출한 뒤, 워릭 백작을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퍼킨 워벡의 계획은 이번에도 탄로났다. 1499년 11월 23일, 퍼킨 워벡은 타이번으로 끌려가 자백서를 읽은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6일 후, 워릭 백작 역시 사형을 선고받고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퍼킨 워벡의 유해는 런던의 오스틴 프라이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