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램버트 심넬 Lambert Simnel |
출생 | 1477년경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 |
사망 | 1525년에서 1534년 사이 |
잉글랜드 왕국 | |
직위 | 잉글랜드 왕위 주장자, 왕실 집사, 매사냥꾼 |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에 요크파 잔당에 의해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으로 내세워져 헨리 7세에 대적한 인물.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생포된 뒤 헨리 7세의 용서를 받고 주방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매사냥꾼으로 승격했다.2. 생애
램버트 심넬은 옥스퍼드의 부유한 시민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심넬은 호색한이었던 에드워드 4세가 어느 비천한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낳은 아이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는 연대기 마다 제빵사, 상인, 또는 오르간 연주가 등 다양하게 거론된다. 그의 이름은 일부 사료에서는 '존 심넬'이라고 언급되기도 하며, '심넬(Simnel)'이라는 성씨의 유래도 불분명하다.1486년, 당시 10살이었던 심넬은 옥스퍼드 신학교를 갓 졸업한 28세의 리처드 사이먼 신부와 대면했다. 사이먼은 비밀리에 요크 왕조의 부활을 꿈꾼 인물로, 이 아이가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여겼다. 그는 즉시 이 아이를 앞세워 튜더 왕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그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에 취임해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싶었다. 그는 아이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고, 궁정 예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에드워드 4세의 차남으로, 지난 날 형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가 실종된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를 램버트 심넬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려 했다.
이 무렵, 헨리 7세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혀 있던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이 사망했다는 소문과 탈출했다는 소문이 동시에 퍼졌다. 이에 요크파는 계획을 바꿔 어린 램버트를 워릭 백작과 동일 인물로 내세우기로 했다.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러벨 자작 프랜시스 러벨이 심넬을 데리고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이자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미망인으로서 부르고뉴국을 이끌던 요크의 마거릿이 있는 브뤼헤 궁정에 방문했다. 요크의 마거릿은 존 드 라 폴과 프랜시스 러벨의 설명을 듣고 계획에 동참하기로 마음먹고, 공식 석상에서 램버트 심넬이 워릭 백작과 동일인물이라고 선언했다.
헨리 7세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즉시 대비책을 강구했다. 우선 정치범들에게 사면을 선포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 에드워드 4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리처드 사이먼을 도운 정황이 있다는 이유로 버몬지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녀의 장남인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또한 반란이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구금되었다. 1487년 2월, 헨리 7세는 진짜 워릭 백작을 런던 탑에서 끌어내어 런던 시민들에게 온종일 보여주라고 명령했다. 시민들은 그가 살아 있으며 램버트 심넬은 가짜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요크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을 밀어붙였다. 1487년 5월, 링컨 백작과 러벨 자작은 요크의 마거릿이 지원한 마르틴 슈바르츠 휘하 독일 용병 2,000명과 함께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제8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아일랜드 대법관 토머스 피츠제럴드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 후 램버트 심넬은 링컨 백작, 러벨 자작, 슈바르츠, 제럴드와 토머스 형제의 추대를 받고 더블린의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487년 6월 4일, 새 국왕 '에드워드 6세'를 받든 요크군은 랭커셔의 퍼니스에 상륙했다. 여기엔 토머스 피츠제럴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출신 지원병 4,000여 명이 합류했다. 요크파는 헨리 7세에게 불만을 품은 많은 지역 주민들이 합류할 거라 예상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랭커셔 주민들은 대부분 왕실군에 합류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편, 헨리 7세는 코번트리에서 반란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훌륭하게 조직한 경보 체계 덕분에, 그는 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노팅엄에 군대를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헨리 7세가 노팅엄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북동쪽으로 12마일 떨어진 사우스웰에 도착했다.
6월 14일 노팅엄에서 반란군을 견제하던 스케일스 경 에드워드 우드빌과 합세한 헨리 7세는 스트레인지 경 조지 스탠리와 웨일스에서 헨리 7세의 주요 지자였던 리스 압 토머스와 추가로 합류해, 1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면서 요크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적군보다 무장과 장비가 훨씬 좋았다. 6월 16일, 헨리 7세는 적군이 트렌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뉴어크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링컨 백작과 프랜시스 러벨은 적이 신속하게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따돌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요크군은 트렌트 강변 고지대에 위치한 이스트 스토크 마을 인근 능선에 진영을 세웠다. 중앙에는 란츠크네히트 용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양익에는 잉글랜드-아일랜드 분견대가 배치되었고, 양측면에는 기바병과 대포가 포진했으며, 궁수대는 최전방에 섰다. 얼마 후 튜더군은 적군을 발견했지만, 이때 현장에 있던 이들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선봉대 6천 명 뿐이었고, 헨리 7세와 나머지 군대는 여전히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옥스퍼드 백작은 즉시 언덕 기슭 맞은편에 전열을 배치하고, 하마 기사, 중기병, 궁수들을 소집해 우익을 형성하도록 했다. 요크군 수뇌부는 그 광경을 보고 능선에서 계속 버티는 것과 선봉대를 먼저 격파하고 뒤늦게 도착한 헨리 7세의 나머지 군대를 격파할지를 논의한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요크군은 능선 아래로 진군해 옥스퍼드 백작의 선봉대를 물리치려 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장궁병들에게 집중 사격을 명령했고, 이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많은 아일랜드군이 대량으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은 3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옥스퍼드 백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 사이 재스퍼 튜더가 지휘하는 튜더군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점점 불어났고, 숙련된 장궁병들은 요크군 진영을 향해 일제 사격을 연일 퍼부었다. 이윽고 소모전에 지친 요크군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옥스퍼드 백작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무장 수준이 열악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요크군은 이 돌격 한 방에 붕괴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추격병에게 대거 사살되었다.
이리하여 스토크 필드 전투는 요크군의 참패로 끝났고, 지휘관 링컨 백작은 전사했으며, 라벨 자작은 종적을 감췄다. 램버트 심넬은 그의 후견인인 리처드 사이먼 신부와 함께 왕실군에 체포되었다. 사이먼은 성직자로서 처형될 수 없었기에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코번트리로 압송되어 많은 군중 앞에서 "자백서"를 낭독했는데, 이 자백서에서 처음으로 사칭범의 실명인 램버트 심넬과 그의 출신, 그리고 요크가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이 밝혀졌다.
헨리 7세는 10살을 갓 넘긴 소년이 자신에게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계산적이었지만 잔혹하지는 않았던 헨리 7세는 램버트 심넬을 용서하고 왕실 주방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왕실로 입성한 심넬은 나중에 집사 직위로 승진했다. 한 번은 램버트가 군주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온 아일랜드 대표단에게 와인을 제공하고 있을 때, 헨리 7세는 램버트를 부른 뒤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일랜드 귀족들이여! 그대들은 결국 원숭이들에게 왕관을 씌우게 될 것이오!"
아일랜드인들은 이 농담을 불쾌해했지만 감히 따지지 못하고 침묵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심넬은 오래 살며 튜더 왕조의 휘하에서 일했고 말년에는 매사냥꾼의 지위까지 올랐다. 심넬의 사망년도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1525년에서 1534년 사이로 거론된다. 확실한 것은 헨리 7세보다 오래 살았고 그의 차남이자 후임 왕인 헨리 8세를 몇 년 더 섬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