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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러벨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러벨 자작
프랜시스 러벨
Francis Lovell, 1st Viscount Lovell
성명 프랜시스 러벨
Francis Lovell
출생 1457년
잉글랜드 왕국
사망 1488년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
아버지 제8대 러벨 남작 존 러벨
어머니 조앤 보몬트
배우자 앤 피츠휴
지위 러벨 자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자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 편에 섰으며, 리처드 3세의 친구이자 최측근으로서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위해 싸웠다. 리처드 3세가 패망한 뒤에도 헨리 7세를 상대로 계속 맞서 싸웠다가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한 뒤 종적을 감췄다.

2. 생애

1457년경 제8대 러벨 남작 존 러벨과 초대 보몬트 자작 존 보몬트의 딸 조앤 보몬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계 조상들은 체셔, 요크셔 등 여러 잉글랜드 주에 토지를 소유했으며, 1299년부터 러벨 남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또한 그는 모계 조상을 통해 데인코트 남작령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 1465년 1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에드워드 4세는 그가 사촌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후견을 받도록 했다. 1466년, 프랜시스는 제5대 피츠휴 남작 헨리 피츠휴의 딸 앤 피츠휴와 결혼했다.

1469년, 워릭 백작과 프랜시스의 장인 헨리 피츠휴는 에드워드 4세와 갈등을 벌인 끝에 랭커스터 왕조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후견인 및 장인과 함께 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고, 에드워드 4세는 1470년 9월 프랜시스를 정식으로 사면했다. 워릭 백작이 바넷 전투에서 전사한 후, 에드워드 4세는 1471년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이 프랜시스의 새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앨리스 다인코트의 상속 재산은 1474년 2월 그녀가 죽은 뒤 왕실의 보호 대상이 되었다.

1477년 성인이 된 프랜시스는 1480년 에드워드 4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을 준비할 때 요크셔 북부 지방의 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482년 국왕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의 지휘 아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이 원정 중 베릭 인근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83년 1월 러벨 자작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글로스터 공작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다. 1483년 4월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한 뒤, 호국경이 되어서 어린 국왕 에드워드 5세를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게 된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프랜시스를 잉글랜드의 하이 버틀러로 임명하고, 노샘프턴셔에 있는 소프 워터빌 성과 영지를 수여했다. 이 지역은 글로스터 공작에게 숙청된 리처드 그레이의 영지였다.

1483년 6월 22일,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국왕이 되었을 때, 프랜시스는 궁내장관, 월링포드 성의 보안관,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대관식에서 정의의 검을 드는 역할을 맡았다. 1483년 가을 버킹엄 공작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프랜시스는 리처드 3세로부터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받고 병력을 끌어모아 반란 진압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옥스퍼드셔에서 그를 대신해 군대를 모집했던 가신 한 명이 반군에게 귀순해 버림으로써, 그가 중부 잉글랜드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의 반란이 진압된 뒤, 프랜시스는 버킹엄 공작과 그의 지지자들에게서 압수한 영지 상당수를 받았다. 그는 이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1484년 7월 18일, 시인 윌리엄 콜링본이 "고양이, 쥐, 그리고 우리의 개 러벨은 우리의 개 떼 아래에서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한다.(또는 돼지처럼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한다.)"라는 풍자시를 반포했다. 여기서 '쥐'는 리처드 래트클리프, '고양이'는 윌리엄 케이츠비, '우리의 개 러벨'은 프랜시스 러벨, '돼지'는 멧돼지 머리를 상징으로 삼은 리처드 3세를 가리킨다. 콜링본은 이 시 때문에 체포되어 교수형 후 사지 절단형에 처해졌다.

1485년 8월 초, 헨리 튜더가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하려 했다. 이에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헨리 튜더는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 후 프랜시스는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 참여해 리처드 3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리처드 3세가 전사한 뒤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7세에 의해 반역자로 간주되어 모든 영지와 작위를 몰수당했지만, 요크 왕조를 부활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다짐했다.

1486년 봄, 프랜시스는 스태퍼드 가문의 그래프턴 기사 험프리 스태퍼드 경과 함께 요크셔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요크 귀족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불발에 그치자 토머스 브로튼 경과 함께 랭커셔에 숨어있다가 배를 타고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이자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의 궁정이 있는 브뤼헤로 망명했다. 1487년 봄, 그는 그곳에서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과 합류한 뒤, 에드워드 4세의 조카였고 당시 런던 탑에 감금되었던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사칭한 램버트 심넬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프랜시스와 존은 마거릿에게서 배를 받은 뒤 독일 용병 분견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향했고, 제8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아일랜드 대법관 토머스 피츠제럴드 등의 호응을 이끌어낸 뒤 5월 24일 더블린 대성당에서 램버트 심넬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로 추대했다.

1487년 6월 4일, 반란군은 랭커셔에 상륙한 뒤 남쪽으로 진군했고, 6월 16일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지휘하는 왕실군과 맞붙었다. 요크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했고,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은 전사했으며, 램버트 심넬은 생포되었다. 프랜시스는 전장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뒤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피신했다. 1488년 6월자 스코틀랜드 왕실 자료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특허장을 발행했다.

그 후 프랜시스는 공식 기록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1491년 7월 요크 출신의 어느 빈민이 스코틀랜드에서 프랜시스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이를 부인했다. 또한 프랜시스가 잉글랜드에 있는 동굴이나 지하실 같은 비밀 장소에 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708년 옥스퍼드셔의 민스터 러벨 저택에서 비밀 방이 실제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해골이 책과 원고가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에 이 유해가 프랜시스의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프랜시스는 아내 앤 피츠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의 영지에 대한 권리는 프랜시스의 이부 자매인 브랑이언 스태이플턴 경의 아내 조앤과 에드워드 노리스의 아내 프라이즈와이드에게 넘어갔다. 헨리 8세는 그들의 상속인들에게 보몬트 땅 일부를 하사했지만, 러벨 남작 또는 러벨 자작은 두 번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