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John de la Pole, Earl of Lincoln | |
| 성명 | 존 드 라 폴 John de la Pole |
| 출생 | 1462년경 |
|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 |
| 사망 | 1487년 6월 16일 (향년 24~25세) |
|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스토크 필드 | |
| 아버지 |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 |
| 어머니 | 요크의 엘리자베스 |
| 형제 | 제프리, 에드워드, 엘리자베스, 에드먼드, 도로시, 험프리, 앤, 캐서린, 윌리엄, 리처드 |
| 배우자 | 마거릿 피츠앨런 |
| 자녀 | 에드워드 |
| 지위 | 링컨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백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확고한 요크 왕조 지지자로,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위해 싸웠으며, 2년 후 램버트 심넬을 앞세워 헨리 7세에 재차 도전했다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462년경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에서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과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둘째딸이며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누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467년 에드워드 4세에 의해 링컨 백작에 선임되었고,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뒤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를 밀어내고 잉글랜드 왕이 될 때 강력하게 지지했다. 새 군주는 존에게 연봉 500파운드를 지급했으며, 북부 의회 의장직을 역임하도록 했다. 1484년 4월 리처드 3세의 외아들이자 상속인인 미들햄의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존은 아일랜드의 명목상 부왕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리처드 3세는 그에게 넓은 토지를 하사하고, 콘월 공국의 세입을 하사했다. 일각에서는 리처드 3세가 그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1485년 8월 22일, 존은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 편에 서서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리처드 3세가 패망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그는 헨리 7세의 사면을 받았지만, 내심 헨리 7세를 몰아내고 요크 왕조를 복구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요크파의 은밀한 후원자였던 신부 리처드 사이먼이 링컨 백작에게 자기의 피후견인 램버트 심넬을 소개했다. 이 인물은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이며, 당시 런던 탑에 감금된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과 매우 닮았다. 링컨 백작은 이 인물을 워릭 백작이자 왕위 계승자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다.
1486년 초, 요크파는 램버트 심넬을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누이이며 용담공 샤를의 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의 궁정으로 몰래 데려갔다. 1487년 2월, 링컨 백작은 잉글랜드를 떠나 플란데런 백국으로 향한 뒤, 이모인 요크의 마거릿을 설득하여 헨리 7세에 대항한 군사 원정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1487년 봄, 링컨 백작은 램버트 심넬, 그리고 요크파의 핵심 인사인 프랜시스 러벨을 데리고 2,000명에 달하는 독일 용병 부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일랜드 귀족 제럴드 피츠제럴드를 포섭했고, 5월 24일 더블린 대성당에서 램버트 심넬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로 옹립하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제럴드 피츠제럴드의 동생인 토머스 피츠제럴드 휘하 이일랜드 지원병의 지원을 받은 뒤, 링컨 백작은 랭커셔의 피엘 섬에 상륙한 뒤 리처드 3세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요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요크 시는 반란군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링컨 백작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하루에 약 17마일(약 27km)을 이동했다. 6월 10일, 요크군은 브램햄 무어에 주둔했고, 친튜더군 400명이 태드캐스터 인근에 주둔했다. 러벨은 요크군 2,000명을 이끌고 적을 기습 공격해 몰아넀다. 이후 링컨 백작은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지휘하는 적군을 따돌리기 위해 존 스크루프 경이 이끄는 분견대에게 6월 12일 요크 성벽을 공격했다가 노섬벌랜드 백작이 반격하려고 접근하면 즉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주력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다가 돈캐스터 외곽에서 스케일스 경 에드워드 우드빌이 이끄는 기병대와 마주쳐서 셔우드 숲에서 3일간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링컨 백작은 스케일스 경을 노팅엄으로 몰아냈고, 스케일스의 기병대는 주력군을 기다리기 위해 노팅엄에 머물렀다.
한편, 헨리 7세는 반란군이 램버트 심넬이라는 소년을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진짜 워릭 백작을 런던 탑에서 끌어낸 뒤 런던에서 행진하게 해, 그가 죽었거나 탈출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였다. 그 후 군대를 소집한 헨리 7세는 6월 14일 노팅엄으로 가서 스케일스와 합류했고, 스트레인지 경 조지 스탠리도 가세했으며, 웨일스에서 헨리 7세의 주요 지지자였던 리스 압 토머스도 증원군을 이끌고 가세했다. 이제 헨리 7세는 1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려 요크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적군보다 무장과 장비가 훨씬 좋았다. 6월 16일, 헨리 7세는 적군이 트렌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뉴어크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1487년 6월 16일 이른 아침, 링컨 백작과 프랜시스 러벨은 헨리 7세의 군대가 신속하게 추격하고 있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따돌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들은 트렌트 강변 고지대에 위치한 이스트 스토크 마을 인근 능선에 진영을 세웠다. 중앙에는 란츠크네히트 용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양익에는 잉글랜드-아일랜드 분견대가 배치되었고, 양측면에는 기바병과 대포가 포진했으며, 궁수대는 최전방에 섰다. 얼마 후 튜더군은 적군을 발견했지만, 이때 현장에 있던 이들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선봉대 6천 명 뿐이었고, 헨리 7세와 나머지 군대는 여전히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옥스퍼드 백작은 즉시 언덕 기슭 맞은편에 전열을 배치하고, 하마 기사, 중기병, 궁수들을 소집해 우익을 형성하도록 했다. 요크군 수뇌부는 그 광경을 보고 능선에서 계속 버티는 것과 선봉대를 먼저 격파하고 뒤늦게 도착한 헨리 7세의 나머지 군대를 격파할지를 논의한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요크군은 능선 아래로 진군해 옥스퍼드 백작의 선봉대를 물리치려 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장궁병들에게 집중 사격을 명령했고, 이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많은 아일랜드군이 대량으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은 3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옥스퍼드 백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 사이 재스퍼 튜더가 지휘하는 튜더군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점점 불어났고, 숙련된 장궁병들은 요크군 진영을 향해 일제 사격을 연일 퍼부었다. 이윽고 소모전에 지친 요크군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옥스퍼드 백작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무장 수준이 열악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요크군은 이 돌격 한 방에 붕괴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추격병에게 대거 사살되었다. 링컨 백작은 이 전투에서 프랜시스 러벨 등 대다수 요크파 인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는 생전에 제17대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과 마거릿 우드빌[1]의 딸인 마거릿 피츠앨런과 결혼해 외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지만, 에드워드는 유년기에 사망했다. 그 후 그의 동생인 제3대 서퍽 공작 에드먼드 드 라 폴과 리처드 드 라 폴도 요크 왕조의 후예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도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1] 초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