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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튜더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베드포드 공작
재스퍼 튜더
Jasper Tudor, Duke of Bedford
파일:Cardiff_castle_-_Eingangshalle_1b_Erkerfenster.jpg
이름 재스퍼 튜더
(Jasper Tudor)
출생 1431년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하트필드
사망 1495년 12월 21일 (향년 63~64세)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손버리 성
배우자 캐서린 우드빌 (1485년 결혼)
자녀 헬렌(사생아)
아버지 오언 튜더
어머니 카트린 드 발루아
형제 에드먼드, 에드워드, 캐서린 또는 마거릿
지위 초대 펨브로크 백작, 초대 베드퍼드 공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공작, 군인. 장미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서서 요크 왕조를 상대로 끈질기게 항전했으며, 친조카 헨리 7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는 데 공헌했다.

2. 생애

1431년경, 비밀리에 결혼한 부부 오언 튜더카트린 드 발루아의 차남으로서 하트퍼드셔의 하트필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귀족과 의회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카트린의 영지인 하트퍼드셔에서 은거했다. 어머니 카트린은 1436년 말 중병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버몬지 수도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437년 1월 3일에 병사했다. 그 후 카트린 왕비와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오언 튜더는 체포된 뒤 투옥되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1439년 11월 헨리 5세와 카트린 왕비의 외아들이자 재스퍼의 이부형제인 헨리 6세가 오언 튜더를 사면했다.

그 후 헨리 6세는 이부 형제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에드먼드와 재스퍼 튜더 형제는 왕의 지원에 힘입어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의 자매인 바킹의 수녀원장 캐서린 드 라 폴의 보호를 1442년까지 받았다. 그녀는 소년들의 음식과 옷을 돌봤고, 두 소년은 하인들을 대동했다. 그들이 청소년기에 이르렀을 때, 왕은 두 이부형제의 가정교사를 신중하게 고른 끝에 교회 목사들을 섭외했다. 그들은 우수한 교육을 해줬고, 두 형제가 "젊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올바른 삶을 가르쳤다고 한다.

1452년, 에드먼드와 재스퍼 형제는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실에 편입되었다. 헨리 6세가 그들을 아꼈기도 했지만, 당시 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에 그들을 형제로 인정해 잠재적인 상속인으로 삼으려는 의중도 담겨 있었다. 그 해 11월 23일, 헨리 6세는 에드먼드를 초대 리치먼드 백작으로 선임했고, 재스퍼를 초대 펨브로크 백작으로 선임했다. 1453년 1월 5일, 재스퍼는 형 에드먼드와 함께 런던 탑에서 영주로서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바치는 의식에 참여했고, 1월 20일 의회에 소개되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잉글랜드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펨브로크 백작 외에도 웨일스 남서쪽의 실게란, 란스테판에서 상당한 영지를 받았고, 이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장미 전쟁이 발발하자, 재스퍼는 아버지 오언, 형 에드먼드와 함께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헨리 6세를 위해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에 맞섰다. 재스퍼는 1455년 5월 22일에 벌어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왕을 호위하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1456년 형이 요크 파 인사인 윌리엄 허버트에게 체포되어 사우스 웨일스의 카마던 성에 감금되었다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한 뒤 튜더 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형 에드먼드의 미망인인 마거릿 보퍼트를 펨브로크 성으로 데려왔으며, 그녀가 1457년 1월 28일에 유복자 헨리 튜더를 낳은 뒤 헨리 튜더의 후견인이 되었다.

1457년, 헨리 6세는 재스퍼를 웨일스의 순회 판사로 임명했다. 재스퍼는 이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웨일스 남부와 서부로 확대하여 이전에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 속해 있던 에버리스위스, 카마던, 카레그 세넨 성의 보안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웨일스의 여러 귀족과 동맹을 맺었으며,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와 우호 관계를 맺고, 험프리 스태퍼드의 아들 헨리 스태퍼드와 자기 형수였던 마거릿 보퍼트의 결혼을 성사해 스태퍼드 가문과의 정치적 동맹을 더욱 공고히했다.

1459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그 해 10월 12일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 참여해 요크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1460년 북웨일스에 있는 요크 공작 리처드의 거점이었던 덴비 성을 함락했다. 그 해 6월 말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끄는 요크군이 노샘프턴 전투에서 그의 동맹인 버킹엄 공작을 사살하고 헨리 6세를 생포한 후에도, 재스퍼는 덴비 성의 소유권을 사수했다. 그 해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군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재스퍼는 요크 공작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의 군대를 막기 위해 아버지 오언 튜더와 함께 북상했지만,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마치 백작에게 패배했다. 재스퍼의 아버지 오언 튜더를 포함한 많은 군 사령관들이 생포된 뒤 모조리 참수당했지만, 재스퍼 본인은 체포를 모면하고 웨일스 산악 지대로 피신했다.

1461년 2월 17일,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지도자로 내세운 랭커스터군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3월 29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를 칭한 마치 백작이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섬멸했다. 재스퍼를 포함한 살아남은 랭커스터파 추종자들은 모든 토지와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재스퍼는 가터 기사단 자격도 박탈당했다. 이후 윌리엄 허버트가 웨일스의 순회판사로 선임되어 8월 말 웨일스로 진군했다. 그는 곧 펨브로크 성을 포함한 재스퍼의 모든 소유물을 탈취했으며, 어린 헨리 튜더는 윌리엄 허버트와 그의 아내 앤 데버루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재스퍼는 랭커스터 파 인사들이 결집한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도주했다.

그 후 재스퍼는 9년 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랭커스터 왕조의 복원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462년, 브르타뉴 공국으로 이동하여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호응할 준비를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면서 주모자들이 에드워드 4세에게 처형되자 파리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며, 다시 헨리 6세가 망명 생활을 하던 에든버러로 가서 왕을 알현한 뒤 6월에 플란데런 백국으로 떠났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루이 11세 사이의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6월 24일 루이 11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 간의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다. 루이 11세는 칼레를 받는 대가로 헨리 6세를 잉글랜드 왕위에 복귀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1462년 가을, 재스퍼는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은 랭커스터군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에 참여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후 프랑스로 다시 가서 루이 11세에게 추가 자금을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루이 11세는 1463년 여름 에드워드 4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재스퍼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기회를 엿보던 1468년,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 공국, 브르타뉴 공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루이 11세는 그 해 6월 재스퍼에게 자금을 지원해 웨일스를 침공하도록 했다. 재스퍼는 노스 웨일스에 잠입한 뒤 현지 귀족과 지주들을 포섭해 민병대를 최대한 끌어모은 후 6월 말 덴비를 접수했다. 재스퍼가 덴비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4세는 윌리엄 허버트에게 토벌 명령을 내렸다. 윌리엄 허버트는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 뒤 공세를 개시해 8월 14일에 덴비를 탈환했다. 재스퍼는 브르타뉴로 탈출했고, 에드워드 4세는 9월 8일 윌리엄 허버트에게 펨브로크 백작 작위를 하사했다.

1469년 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에드워드 4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해 7월 26일, 리처드 네빌은 에지코트 전투에서 윌리엄 허버트가 지휘하는 왕실군을 격파했고, 생포된 윌리엄 허버트를 처형했다. 그 후 에드워드 4세를 생포한 뒤 폐위하고 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대다수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난 뒤, 반격할 기회를 엿보다가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윌로비 드 에레스비 남작 로버트 웰스로스코트 전투에서 격파한 뒤 로버트 웰스가 워릭 백작 및 클래런스 공작과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걸 밝혀냈다.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이 일로 체포 위기에 직면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당시 재스퍼는 프랑스 왕의 궁정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파리로 찾아온 워릭 백작과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 사이를 중재해 헨리 6세를 복위하는 데 힘을 합치기로 합의하는 데 일조했다. 1470년 5월 워릭 백작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의 데번에 상륙했을 때, 재스퍼 튜더도 그와 함께 했다. 재스퍼는 상륙 후 웨일스로 가서 워릭 백작을 지원할 군대를 모집했으며, 조카 헨리 튜더와 재회했다. 당시 요크셔에 있던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을 토벌하고자 남하했지만, 그 사이에 워릭 백작의 동생인 몬터규 후작 존 네빌이 잉글랜드 북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 워릭 백작과 몬터규 후작 형제에게 협공당할 위기에 직면하자, 에드워드 4세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다.

1470년 10월 6일 런던에 입성한 워릭 백작은 런던 탑에 갇혀 있던 헨리 6세를 복위했다. 재스퍼는 복위식에 참석한 뒤 헨리 6세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웨일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몰수된 재산과 작위를 돌려받았고, 처형된 버킹엄 공작의 재산 일부와 상속인이 아직 어렸던 포위스 경의 재산도 받았다. 재스퍼는 랭커스터 왕조의 지배하에 다시 두기 위해 사우스 웨일스로 이동해 쉽사리 복종시켰다. 그러던 1471년 3월 12일,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요크셔 해안에 상륙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4월 14일, 그는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과 몬터규 후작을 처단하고 런던을 접수했으며, 헨리 6세는 다시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당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는 워릭 백작과 합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이동 중이었다. 바넷 전투 당일에 웨이머스에 상륙한 두 사람은 며칠 후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로부터 바넷 전투 소식을 접했다. 그들은 재스퍼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웨일스로 진군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가 이들을 맹추격했고, 5월 4일 마르그리트 왕비의 군대를 따라잡고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섬멸했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전사했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생포되었다. 서머셋 공작은 튜크스베리 수도원으로 피신했다가 안전 통행을 보장받고 수도원에서 나왔다가 곧바로 체포된 뒤 5월 6일 처형되었다. 5월 21일,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급사했는데, 랭커스터 잔당이 그를 구출하려 했지만 실패한 직후 사망한 정황으로 볼 때 에드워드 4세의 지시에 따라 은밀히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재스퍼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군대와 조우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체프스토 인근에서 튜크스베리 전투 소식을 접했다. 이후 요크파 추종자 중 한 명인 브렉녹셔 출신의 로저 본을 격파하고 처형한 뒤 펨브로크로 후퇴했다. 이후 로저 본의 사위이며 웨일스 남동부의 상당수 영지를 소유했던 그루퍼드 니콜라스의 손자 모건 토머스의 군대에 포위되었다가, 모건의 동생 토머스의 도움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드워드 4세는 웨일스 내 랭커스터 왕조 추종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새로운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했다. 재스퍼와 그의 조카 헨리 튜더는 이 소식을 접하자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지만, 폭풍을 만나 브르타뉴에 머물었다. 헨리 튜더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와 그녀의 남편은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하기로 했다.

그 후 재스퍼와 헨리는 수년 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의 궁정에서 살았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잉글랜드로 끌어내기 위해, 프랑수아 2세에게 상당한 자금을 제공하고 군사 지원을 약속하면서 두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도 두 튜더를 자기 궁정으로 데려가기 위해 프랑수아 2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2세는 두 사람을 계속 보호하기로 했다. 그들은 처음엔 브르타뉴 제독 장 드 켈레네크의 성에서 살다가 낭트로 옮겨졌다. 1474년 초, 재스퍼는 반 인근의 조셀린 성으로 옮겨졌고,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원수 장 드 리외의 소유인 라르고에 궁전으로 옮겨졌다.

1470년대 중반, 프랑수아 2세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브르타뉴 내에서 분쟁이 벌어질 조짐이 생겼다. 1475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7년 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또한 같은 해에 헨리 4세의 누이의 손자인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익사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또 다른 분파가 사라졌다. 이제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분파인 튜더 가문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건강이 나빠진 프랑수아 2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도 튜더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1472년 헨리 튜더가 어머니의 땅을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했으며, 자기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튜더의 결혼을 제안했다.

1476년 11월, 프랑수아 2세는 재스퍼와 헨리 튜더를 잉글랜드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삼엄한 경비 속에 반으로 이송되었고, 헨리는 그곳에서 생 말로 항구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프랑수아 2세가 마음을 바꿔 잉글랜드로 보내지 않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레르맹 성으로 옮겨졌다. 이후 프랑스 왕실이 그들을 파리로 보내라고 요구했고, 마거릿 보퍼트도 브르타뉴 공작에게 아들을 돌려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프랑수아 2세는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그 후 두 튜더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14873년 6월 26일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의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에 태어난 에드워드 5세 등 자녀들을 사생아로 낙인찍은 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로 등극했다. 이후 에드워드 5세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가 얼마 후 동생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와 함께 실종되었다. 이에 반발한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많은 인사가 브르타뉴로 망명한 뒤 헨리 튜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재스퍼와 헨리 튜더는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프랑수아 2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로 상륙한 뒤 버킹엄 공작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폭풍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얼마 후 리처드 3세가 반란을 진압했고 버킹엄 공작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이후 프랑수아 2세가 마침내 재스퍼와 헨리 튜더를 잉글랜드로 압송하기로 하자, 두 사람은 1484년 9월 앙주로 피신했다. 이후 프랑스의 새 국왕 샤를 8세를 알현한 뒤 잉글랜드 왕위에 도전하기 위한 군자금을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485년 8월, 재스퍼는 헨리 튜더가 이끄는 군대에 가담하여 웨일스의 밀만에 상륙했다. 밀만은 재스퍼 튜더의 옛 영지였다. 그 후 자기들과 같은 출신인 튜더 가문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던 웨일스 귀족과 지주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강화한 후 잉글랜드로 진군했다. 8월 22일, 재스퍼는 보스워스 전투에 참전해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리처드 3세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뒤,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로 선포되었고, 얼마 후 런던에 입성한 뒤 의회의 법령에 따라 자신과 그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다.

1485년 10월, 헨리 7세는 그동안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하며 숱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삼촌 재스퍼를 베드퍼드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 후 재스퍼는 자기의 영지를 모두 되찾았고, 초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의 딸이자 리처드 3세에 의해 처형된 버킹엄 공작의 미망인인 캐서린 우드빌과 결혼하면서 스태퍼드 가문의 영지도 소유했다. 이듬해엔 글래모건도 받았으며, 사우스 웨일스의 순회 판사이자 아일랜드의 중위로 임명되었다. 1487년, 재스퍼는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사칭한 램버트 심넬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에도 헨리 7세의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는 1495년 12월 21일 손버리 성에서 사망했고, 서머셋의 킨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캐서린 우드빌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그의 영지와 작위는 왕실에 귀속되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재스퍼 튜더에게는 사생아 헬렌이 있었다. 그녀는 직물상인 윌리엄 가디녀와 결혼해 윈체스터 주교가 될 스티븐 가디너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