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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그레이(초대 도싯 후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1st Marquess of Dorset
이름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출생 1451년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그로비
사망 1501년 9월 20일 (향년 49~50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제6대 애슬리 남작 존 그레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
형제 리처드 그레이
배우자 앤 홀랜드, 세실리 본빌
자녀 에드워드, 앤서니, 토머스, 리처드, 레너드, 조지, 세실리, 브리짓, 도로시, 엘리자베스, 마거릿, 엘레노어, 메리
직위 제8대 애슬리 남작, 제7대 그로비의 페러스 남작, 본빌 남작, 헌팅던 백작, 초대 도싯 후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리처드 3세의 마수를 피해 해외로 망명한 뒤 헨리 7세를 지지했으며,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른 뒤 영지를 돌려받았다.

2. 생애

1451년생으로, 제6대 애슬리 남작 존 그레이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남이다. 아버지 존 그레이는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섰다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토머스는 10살의 나이에 제8대 애슬리 남작이 되었으며, 동생 리처드 그레이와 함께 어머니와 그녀의 아버지인 리처드 우드빌의 보호를 받았다. 1464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 결혼을 하면서, 토머스는 왕실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466년 10월,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토머스를 남편의 조카딸이자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의 딸이며 상속녀인 앤 홀랜드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자녀를 두지 못했고, 앤은 1473년 8월 26일과 1474년 6월 6일 사이에 사망했다.

1471년 5월 4일, 토머스는 요크 군의 일원으로서 튜크스베리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8월 14일 에드워드 4세가 헌팅던 백작 작위를 복원한 뒤 이 직위를 받았다. 1474년 7월 18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주선으로 제7대 하링턴 여남작, 제2대 본빌 여남작 세실리 본빌과 재혼했다. 이 결혼으로 총 14~15명의 자녀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1474년 4월 18일, 토머스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5월 14일 바스 기사에 선임되었다. 1475년 헌팅던 백작 작위를 포기하는 대신 도싯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에드워드 4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1476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추밀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뒤, 토머스의 이부동생인 에드워드 5세가 새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정변을 일으켜 토머스의 친동생 리처드 그레이와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을 체포하고 에드워드 5세와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를 런던 탑에 가뒀다.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고, 에드워드 4세의 모든 자녀는 사생아로 선언되었고 왕위와 모든 직함에 대한 권한을 박탈되었다. 6월 25일, 리처드 그레이와 앤서니 우드빌은 글로스터 공작을 음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폰트프랙트 성에서 참수되었다.

토머스 그레이는 글로스터 공작의 마수를 피해 잉글랜드 북부로 달아난 뒤 어느 수도원에 숨었다. 이후 제2대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리처드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그에게 가담하여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버킹엄 공작은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토머스 그레이는 또 다른 삼촌 에드워드 우드빌과 함께 탈출한 뒤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그의 작위와 영지는 리처드 3세에게 몰수당했다. 1484년, 토머스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헨리 튜더와 접견한 뒤 그의 주요 추종자가 되었다.

1485년, 토머스 그레이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리처드 3세와 화해했고, 당시 파리에 있던 토머스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 헨리 튜더가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여긴 토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콩피에뉴에서 붙들려 억류되었다. 헨리 튜더는 그에 대한 신뢰를 접고, 잉글랜드 원정에 착수했을 때 그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로 등극한 결정적인 전투인 보스워스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헨리 7세는 왕이 된 뒤 토머스의 이복 누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토머스의 작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487년, 요크파 잔당에 의해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과 동일 인물로 내세워진 램버트 심넬의 반란이 발발했을 때, 토머스는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고 런던 탑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6월 16일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이 섬멸된 뒤, 토머스는 무사히 풀려났다. 1492년 프랑스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를 지원하는 원정에 참전했으며, 1497년 콘월에서 발발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1501년 9월 20일 런던에서 사망했고, 워릭셔주 애슬리 성당에 안장되었다. 장남 토머스 그레이가 그의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다. '9일 여왕'으로 일컬어지는 제인 그레이는 그의 증손녀다.

3. 가족

  • 앤 홀랜드(1461 ~ 1473년 8월 26일과 1474년 6월 6일 사이):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와 요크의 앤[1]의 외동딸.
  • 세실리 본빌(1460 ~ 1529): 제6대 하링턴 남작과 초대 본빌 남작 윌리엄 본빌과 캐서린 네빌[2]의 딸. 제7대 하링턴 여남작, 제2대 본빌 여남작. 토머스 그레이 사후, 윌트셔 백작 헨리 스태퍼드와 재혼.
    • 에드워드 그레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해 런던의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즈 교회에 안장되었다. 서퍽 주의 소머레이든 기사 에드워드 제닝엄의 딸 앤 재닝엄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 앤서니 그레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 토머스 그레이(1477 ~ 1530): 제2대 도싯 후작.
    • 리처드 그레이: 형제인 존 그레이의 유언장에 언급되었다. 플로렌스 퍼드시와 결혼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 존 그레이: 윌리엄 케이츠비 경의 딸이자 노샘프턴셔 블리스워스의 영주 로저 웨이크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케이츠비와 초혼, 링컨셔 버터윅의 하원 의장 로버트 셰필드 경의 미망인 앤 바클리와 재혼. 앤 바클리는 존 그레이 사후 켄트 이그담 모트의 리처드 클레맨트 경과 재혼.
    • 레너드 그레이(1490 ~ 1540): 그래인 자작, 아일랜드 부총독.
    • 조지 그레이: 성직자. 존 그레이의 유언장에 언급됨.
    • 세실리 그레이(? ~ 1554): 제3대 더들리 남작 존 서튼의 부인.
    • 브리짓 그레이: 요절.
    • 도로시 그레이(1480 ~ 1552): 제2대 브로크의 윌로비 남작 로버트 윌로비와 초혼, 제4대 마운트조이 남작 윌리엄 블런트와 재혼.
    • 엘리자베스 그레이(1497 ~ 1548년 이후): 제9대 칼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의 부인. 프랑스 왕비 메리 튜더프랑스의 클로드시녀.
    • 마거릿 그레이: 리처드 웨이크의 부인. 존 그레이의 유언장에 언급됨.
    • 엘레노어 그레이(? ~ 1503): 콘월 세인트 모건의 기사이자 콘월 총독 존 아룬델 경의 부인.
    • 메리 그레이(1493 ~ 1538): 초대 헤리퍼드 자작 월터 데버루의 부인.

[1]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첫째 딸.[2] 제5대 슈루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몬터규 후작 존 네빌의 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