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21 15:23:23

존 팁토프트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우스터 백작
존 팁토프트
John Tiptoft, 1st Earl of Worcester
파일:tiptofteffigy.jpg
성명 존 팁토프트
John Tiptoft
출생 1427년 5월 8일
잉글랜드 왕국 캠브리지셔 그레이트 에버스든
사망 1470년 10월 18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초대 팁토프트 남작 존 팁토프트
어머니 조이스 셔틀턴
누이 필리파, 조앤, 조이스
배우자 세실리 네빌, 엘리자베스 드 그랭두르, 엘리자베스 홉튼
자녀 존, 에드워드
지위 제2대 팁토프트 남작, 초대 우스터 백작, 재무장관, 잉글랜드 무관장, 아일랜드 부총독
1. 개요2. 생애
2.1. 기원2.2. 초년기2.3. 첫번째 결혼과 백작 칭호 수여2.4. 헨리 6세의 신하로서2.5. 에드워드 4세의 신하로서
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 잔인함과 권력 남용을 일삼는 모습을 보여 "잉글랜드의 도살자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2.1. 기원

팁토프트 가문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할 때 참여한 기사 중 한 명에게서 유래한다. 이 가문의 이름은 페캉 시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노르망디 마을 '티보토(Tiboutot)'에서 유래했다. 이 가문의 대표자들은 주기적으로 다양한 문서에 등장하며, 한 분파는 프랑스에 살았다. 그 결과, 이 가문의 대표자들은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쪽에서 싸웠다. 잉글랜드 계통에서 역사에 분명하게 등장하는 첫번째 팁토프트 가문 인사는 로버트 드 티베토이다. 이 인물은 에드워드 1세의 측근으로, 에드워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그는 웩스위치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후 팁토프트 가문 인사들은 이곳에 많이 묻혔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1세 편에서 가스코뉴, 스코틀랜드 왕국, 웨일스 등지에서 싸웠다.

1298년 로버트가 사망한 뒤, 아들 페인이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상속했다. 그는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고, 1308년 3월 10일에 페인 티베토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었고, 그 결과 티베토 남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페인은 1314년 베넉번 전투에서 사망했고, 유일한 아들인 존이 제2대 티베토 남작이 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 휘하에서 스코틀랜드, 프랑스, 가스코뉴 방면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존이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버트는 1368년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지만 세 딸만 남기고 죽었고, 그의 상속 재산 대부분은 딸과 사위들에게 나눠졌다.

한편, 존이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 페인은 작위도, 티베토 영지 대부분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캠브리지셔에 있는 하스턴과 버웰 영지만 물려받았다. 그의 재산은 아룬델 백작과 랭커스터 가문에 봉사하면서 점차 늘어났다. 헨리 4세가 왕이 된 뒤, 그는 캠브리지셔 영주로서 2차례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었다. 이후 페인은 런던의 부유한 가문 출신인 아그네스 로스와 결혼해 상당한 재산을 받아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 존 팁토프트는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6세의 미성년자 통치 기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여러 차례 잉글랜드 의회에 선출되었고, 1406년 장기 의회 동안 하원 의장을 지냈으며, 오아실 재무관, 고위 집사, 잉글랜드 재무장관, 왕립 위원회 위원, 왕실 집사를 지냈다. 또한 자기보다 10살 많은 필리파 구르네와 결혼해 잉글랜드와 가스코뉴에 상당한 영지를 확보했다.

필리파 구르네가 자녀 없이 죽은 뒤, 존은 아키텐 공국의 세네샬로서 훌륭한 보상을 한 공로로 셔틀턴 남작 에드워드 셔틀턴의 딸이며,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인 조이스 셔틀턴과 결혼할 수 있는 왕실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이 결혼으로 셔틀턴 가문과 홀랜드 영지 일부에 달하는 상당한 영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조이스 셔틀턴의 이복 누이 앤 모티머의 아들이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로, 팁토프트 가문은 이 인연으로 요크 가문의 지지자가 되었다. 한편, 조이스 셔틀턴의 이모인 마거릿 홀랜드는 존 보퍼트와 결혼해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요크 공작 리처드의 정적인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였다.

2.2. 초년기

존은 1427년 5월 8일 잉글랜드 왕국 캐임브리지셔의 그레이튼 에버스든에서 태어났다. 누이로 필리파[1], 조앤[2], 조이스[3]가 있었다. 그는 1440년에서 1443년 사이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발리올 칼리지에서 교육받았다. 이는 교회에서 경력을 쌓을 운명이 아닌 귀족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존과 동시대 사람이며 그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연대기 작가이자 골동품 학자 존 로즈는 그를 "매우 박식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대법원장을 맡은 존 포테스큐(1394 ~ 1476)는 저서 <잉글랜드 정부>에서 황제가 원로원의 조언을 무시해 로마 제국이 쇠퇴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쇠퇴는 국왕이 고문에게 의존했기 때문이며 번영을 회복하려면 로마 원로원 의원처럼 현명한 조언자들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인재를 기르려면 고전 역사와 라틴어 문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봤다. 현대의 여러 학자는 존이 옥스퍼드 대학으로 보내진 것은 왕에게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엘리트로 키우려는 가문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존은 평생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졸업생들과 끊임없이 교류했으며, 발리올 칼리지 졸업생 중 주교와 왕실 관리로 발탁된 여러 인사와도 친분을 다졌다. 이러한인맥은 그가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443년 1월 아버지인 초대 팁토프트 남작 존 팁토프트가 사망했다. 그 후 존은 이스트 앵글리아의 팁토프트 남작 작위와 그에 따른 영지, 햄프셔의 네더 윌름과 브로큰허스트 영지, 미들섹스의 엔필드 영지, 에식스 북서부의 윔 비시 영지를 물려받았다. 당시 존은 6살의 미성년자여서, 누이 조앤의 남편인 에드먼드 잉골데소프의 후견을 받았다. 1443년 5월 16일, 존의 누이 필리파의 남편인 제9대 로스 남작 토머스 로스는 존의 생계 유지를 위해 40파운드를 왕실롭루터 직접 받았다. 1445년 8월 20일, 존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의 재산과 존의 생계 유지 및 결혼은 이튼과 킹스 칼리지로 이전했다.

한편, 팁토프트 가문의 가스코뉴 영지는 프랑스 왕국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444년 5월 1일, 헨리 6세는 비도 드 빌제(Bidau de Bilje)가 헨리 5세와 현 국왕에게 헌신한 공로, 특히 프랑스의 샤를 7세가 가스코뉴로 진군하여 여러 지역을 정복하는 것에 맞서 싸운 이유로, 존 팁토프트에게 모든 헌장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렘네(Maremne), 고스(Gosse), 세냥(Seignanx)의 남작령을 비도의 요청에 따라 하사했다. 그러나 이는 큰 반발을 야기했고, 헨리 6세는 6월 20일 비도에게 팁토프트 남작령에 간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445년 7월 14일, 국왕은 아키텐에 있는 왕실 관리들에게 피후견인의 영지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7월 17일, 팁토프트가 고스, 세냥, 마랑생, 본 남작령을 상실할 경우, 그 영지를 반환하라는 내용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후 존의 가스코뉴 영지에 대한 언급은 문서에서 사라졌는데, 학자들은 젊은 상속인이 가스코뉴 영지를 실제로 받았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추정한다. 1446년 9월 22일, 존의 어머니 조이스가 사망했다. 그 후 셔틀턴의 상속 재산은 존과 그의 사촌인 탱커빌 백작 헨리 그레이에게 나뉘어졌다. 1447년,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는 존에게 500마르크를 물려주어 그가 빚진 금액을 갚을 수 있도록 했다.

2.3. 첫번째 결혼과 백작 칭호 수여

존은 1447년 6월 30일 자신의 영지에 대해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전에 왕의 보호 아래 있던 영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관리할 권리를 받았다. 동시에 헨리 6세는 상속권에 포함되는 상속인에게 지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1448년 4월 3일, 존은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장녀이며 워릭 공작 헨리 뷰챔프의 미망인인 세실리 네빌과 결혼했다. 그 후 그의 장인인 솔즈베리 백작이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아내의 형제들, 특히 킹메이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도 그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49년 7월 16일, 존은 우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헌장에는 팁토프트가 "많은 귀족들의 의견에 따르면" 유능한 참모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명시되었다. 다른 사료에는 존의 유사한 자질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용어가 임의적인 것인지, 아니면 문서가 새 백작의 젊은 시절 군사 작전 참여를 반영하지 않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1449년 6월 16일부터 7월 16일까지 우스터 백작으로서 윈체스터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 그런 다음 의회는 런던으로 이동하여 블랙페어(11월 6일~12월 4일)와 웨스트민스터(12월 4일~17일)에서 열렸다. 존은 이 의회에서 가스코뉴와 기타 해외 영토, 그리고 채널 제도의 순회 재판관으로 선임되었다.

1450년 1월 28일,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자였던 초대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노르망디 공국을 프랑스에게 거진반 상실당하는 사태를 초래한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 3월 1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잇는 국왕의 '내실'에 증인으로 모인 이들 중에는 우스터 백작도 있었다. 서퍽 공작은 5년간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하며 늦어도 5월 1일까지 왕국을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4월 30일에 출항했지만 도중에 니콜라스 호 선원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2.4. 헨리 6세의 신하로서

1450년 7월 29일, 존의 아내 세실리 네빌이 사망했다. 그녀는 첫번째 남편인 워릭 공작 헨리 뷰챔프와 함께 튜크스버리 수도원에 묻혔다. 존은 세시리 네빌을 후견자로 거론한 존 리드게이트의 <성무일과>와 <군주들의 몰락>을 소지했다. 1452년 4월, 그는 친구인 수도사 헨리 크레인브로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은 아내의 영혼을 언급하며 자신이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고 밝혔다.

1450년 7월,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프랑스의 공세에 밀려 캉에서 항복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노르망디 공국이 프랑스의 수중에 완전히 넘어가자,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자신이 총독을 맡았던 노르망디를 잃은 것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이 사태를 서머셋 공작의 탓으로 돌렸다. 그는 자기가 잉글랜드의 질서를 회복하고 물명예스러운 서머셋 공작을 몰아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우스터 백작도 요크 공작에 가담했다.

1451년 1월 13일, 켄트의 폭동에 관한 조사 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우스터 백작도 이에 포함되었다. 1월 21일, 그는 잭 케이드의 난 동안 켄트에서 일어난 폭동과 관련된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위원회에는 변호사, 귀족, 지역 지주의 대표가 세 집단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존은 공작, 백작, 남작, 그리고 고위 판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라틴어 지식, 지능, 그리고 아마도 그가 보여준 확고함은 왕과 영주, 판사, 서기관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위원회는 빠른 승진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1451년에 결성된 위원회는 왕에게 대적한 자들을 철저히 응징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2월 8일 하루에만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위원회가 캔터베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2월 15일 로체스터에서 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켄트와 서퍽에서의 분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451년 5월 20일, 헨리 6세는 템스 강 남쪽의 카운티에 일련의 새로운 위원회를 임명했다. 위원회는 6월 24일 크로이던 에서, 6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톤브리지 에서 열렸고, 7월 7일부터 8일까지 루이스에서, 7월 9일부터 13일까지 치체스터에서, 7월 14일 윈체스터에서 , 7월 20일에 솔즈베리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1451년 1월처럼 많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사형을 선고한 자들에 대한 형벌은 매우 잔혹했다고 전해진다.

우스터 백작은 반군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아닌 다른 위원회에도 잇따라 임명되었다. 1451년 4월 6일에는 서퍽 공작의 동료인 존 트레벨리안에 대한 기소를 조사했고, 6월에는 서퍽 공작 본인의 죽음을 조사했다. 6월 27일에는 서퍽 공작 살인과 결해 여러 사람이 기소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아마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관련된 고위 귀족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10월 2일에는 서퍽 공작의 또 다른 동료인 토머스 다니엘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에 참여했지만, 토머스 다니엘이 왕에 의해 사면되자 위원회는 해산되었다. 1452년부터 1454년까지 재무장관을 맡았으며, 1456년부터 1457년까지 아일랜드 부총독을 맡았다. 이후 1458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가 이탈리아로 가서 2년간 파도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 그는 라틴어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2.5. 에드워드 4세의 신하로서

1461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은 요크 왕조의 영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부터 종신 웨일스 대법관과 런던 탑 경비대장 직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잉글랜드 재무장관과 잉글랜드 무관장 직도 받았다. 1462년, 존은 랭커스터 왕조 지지자였던 12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그의 장남 오브리에 대한 재판을 주재해, 두 사람 모두에게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

1463년, 존은 잉글랜드 북부의 랭커스터파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에드워드 4세의 원정에 참여하여 헤즐리 무어 전투, 헥섬 전투, 뱀버러 공방전에 참여했다. 1464년 종신 아일랜드 대법관에 선임되었고, 이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궁정 특사로 활동했다. 1467년 아일랜드 부총독에 선임된 그는 1468년 초 제7대 데스먼드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제7대 킬데어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두 사람은 드로이다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그 해 2월 15일 한 수도원에서 긴급 체포되었다. 데스먼드 백작은 즉시 참수되었고, 킬데어 백작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국왕 앞에서 자신의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탈출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존 팁토프트는 드로이다에서 학교에 다니던 데스먼드 백작의 어린 아들 2명도 살해했다고 한다. 이에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리스와 먼스터를 황폐화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훈계하고, 무기를 내려놓으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곧 사면받았고, 장남 제임스 피츠제럴드는 몰수당했던 가문의 영지를 돌려받은 뒤 제8대 데스먼드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일랜드 부총독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던 그는 1470년 아일랜드 총독으로 재차 부임했고, 링컨셔에서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반란을 엠핑엄 전투에서 잔혹하게 진압하고 주동자 20명을 처형했다.

1470년 9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랭커스터 왕조와 연합하고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토대로 잉글랜드로 진군해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한 뒤, 런던 탑에 갇혀 있떤 헨리 6세를 구출하고 잉글랜드 국왕에 복위했다. 존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체포되었고, 그에게 아버지를 잃었던 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그의 재판을 주관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그 해 10월 18일, 존은 런던 탑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삼위일체론을 신봉한다는 의미로 사형 집행인에게 자신을 세 차례 매질한 뒤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사후 엘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에드워드는 1471년 4월 14일에 제2대 우스터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1485년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고, 우스터 백작위는 왕실에 귀속되었다.

3. 가족

  • 세실리 네빌(1425 ~ 1450):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터규의 장녀. 초대 워릭 공작 헨리 드 뷰챔프의 미망인.
  • 엘리자베스 그레인두르(1420 ~ 1452): 로버트 그레인두르의 외동딸. 제6대 라 워르 남작 레지널드 웨스트의 미망인.
    • 존 팁토프트(1452): 요절.
  • 엘리자베스 홉튼(1427 ~ 1498): 토머스 홉튼 경의 딸. 존 팁토프트가 사망한 뒤 초대 더비 백작 윌리엄 스탠리와 재혼했다.
    • 에드워드 팁토프트(1469 ~ 1485): 제2대 우스터 백작.

[1] 1423 ~ ?, 제9대 로스 남작 토머스 로스와 초혼, 에드워드 그림스턴 경과 재혼.[2] 1425 ~ ?, 에드먼드 잉골데소프 경의 부인[3] 1425 ~ 1485, 에드먼드 서튼 경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