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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퍼트(초대 서머셋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파일: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png
이름 존 보퍼트
John Beaufort
출생 1370년대 초반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공작령
사망 1410년 3월 16일 (향년 30대 후반)
잉글랜드 왕국 런던
배우자 마거릿 홀랜드
자녀 헨리, , 토머스, 에드먼드, 조앤, 마가렛
아버지 곤트의 존
어머니 캐서린 스윈포드
형제 헨리, 토머스, 조앤
직위 서머셋 백작, 시종장, 칼레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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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 캐서린 스윈포드의 사생아였지만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하여 적자로 인정받은 뒤 잉글랜드 정계와 군부에서 활약했다.

2. 생애

아버지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번째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 말기와 리처드 2세 치세 초기에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곤트의 존이고, 어머니는 기사 페인 드 로에의 딸이며 존의 기사이자 젠트리인 휴 드 스윈포드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 스윈포드였다. 캐서린이 언제부터 곤트의 존의 정부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휴 드 스윈포드가 사망한 후인 1371년 11월에 처음으로 기록상에서 곤트의 존의 정부로 지목되었다. 그녀는 곤트의 존과의 사이에서 존 보퍼트 외에 헨리, 토머스, 조앤[1]을 낳았다.

사료에는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장남 존 보퍼트의 생년월일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간접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출생 가능한 연도를 계산했다. 두 사람의 네 자녀들은 모두 1371년에서 1379년 사이에 태어났다. 역사가 제럴드 레슬리 해리스는 1371년에 존 보퍼트가 태어났을 거라고 추정했지만, 앨리스 웨어는 1372년 말과 1373년 초 사이에 태어났을 거라고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1370년대 초반에 태어났을 거라고 본다.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자식들은 모두 '보퍼트'라는 성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랭커스터 가문의 재산에 귀속된 샹파뉴의 보퍼트 성과 연관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존 보퍼트는 아버지가 자신의 외도를 비공개로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캐서린 스윈포드가 소유한 링컨셔의 케틀소프에서 조용히 지냈다. 사생아였기에 아버지로부터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잉글랜드 최강의 권력자인 아버지를 뒀기에 어엿한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1386년 2월 형제 토머스와 함께 링컨 대성당의 챕터 하우스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곤트의 존의 후계자인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대성당 형제단에 입회하는 걸 지켜봤다.

1390년 봄, 존 보퍼트는 칼레 인근의 생 엥글레비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프랑스 기사들과 맞서 두각을 드러낸 잉글랜드 기사 13명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이후 프랑스 기사 장 2세 르 맹그르의 주선으로 루이 2세 드 부르봉튀니스무슬림 해적을 대상으로 벌이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십자군은 마디아에 상륙한 뒤 2달간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식량이 부족한 데다 현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휴전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그가 이 원정에 얼마나 오랫동안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로 귀환한 존 보퍼트는 아버지로부터 오버스톤, 맥시, 에이든, 브램턴 파르바의 일부 영지를 부여받았고, 85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획득했다. 1392년 7월 7일,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존 보퍼트를 "평생 동안 왕과 동행하기 위해 고용된" 궁정 기사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이 직책을 가진 인물은 매년 100 마크의 급료를 받았는데, 곤트의 존은 급여를 100파운드로 인상했다. 1394년 9월 20일, 리처드 2세는 서머셋에 있는 카레 레벨, 랭포트, 마톡의 영지인 존 보퍼트에게 새로운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후 존은 튜튼 기사단에 참여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향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96년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의 요청에 따라 전 유럽에서 십자군이 결성될 때 참여해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한편, 곤트의 존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카스티야의 콘스탄사가 1394년에 사망했다. 그 후 곤트의 존은 오랜 정부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캐서린의 자식들을 합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청과 장기간 협상한 끝에 캐서린과의 결혼을 승인받는 데 성공했다. 결혼식은 1396년 1월 링컨 대성당에서 열렸고, 교황청은 그해 9월에 존과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리처드 2세는 즉시 합법화 특허를 발행했고, 의회도 1397년 2월에 승인했다. 그해 2월 10일 리처드 2세는 존 보퍼트에게 서머셋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제 보퍼트 가족은 잉글랜드 왕실의 정당한 일원이 되었다. 또한 1396년 9월 제4대 보몽 남작인 존 보몽이 사망한 뒤 공석이 된 가터 기사단의 가사가 되었다.

1397년 7월 10일,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청원파를 결성해 자신을 위협했던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그들은 중대한 범죄와 정권에 대한 반역적인 찬탈 혐의로 기소되었다. 아룬델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형이 집행되었으며, 워릭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리처드 2세에 의해 종신 유배형으로 감형된 뒤 모든 영지와 직위를 박탈당하고 맨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재판에 참석한 뒤 글로스터 공작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이 재판에 출석시키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은 법정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다가, 나중에 칼레에 투옥되어 있던 동안 사망했다는 사실이 의회에 발표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글로스터 공작이 리처드 2세의 밀명으로 피살되었다고 보며, 현대 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한다.

리처드 2세는 세 사람의 영지를 몰수한 뒤 여러 귀족에게 보상했다. 존 보퍼트는 1397년 9월 29일에 워릭 백작의 영지 일부를 받고 도싯 후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 양도받은 부동산에는 스태퍼드셔의 드레이튼 바셋, 월솔, 페리, 햄스테드, 바, 노스햄트셔의 버크비, 윌트셔의 처힐, 힌튼, 노퍽의 네크턴, 크레싱햄이 포함되었다. 또한 11월 20일에 최근 사망한 기사 토머스 롤리의 재산 일부를 연간 수입 400마르크와 함께 수여받았으며, 윌링퍼드 성주로 선임되었다. 1398년 2월 2일 아일랜드 함대 제독으로 선임되었으며, 2월 5일에는 도버 성주이자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9일에는 북부와 서부의 제독, 5월 23일에는 아키텐 왕실 총독에 선임되었다.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사망했다. 3월 16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곤트의 존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리처드 2세와 왕실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를 비롯한 보퍼트 가족이 그곳에 있었는지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 후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가문을 분쇄하기로 마음먹고, 1399년 3월 18일에 곤트의 존에게 속한 모든 토지, 소유권 및 재산이 왕실에 넘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존을 포함한 보퍼트 가족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직위를 유지했다. 이후 존은 아키텐으로 항해할 군대를 모집하고자 잉글랜드 해안으로 내려갔다.

1399년 7월 초, 리처드 2세에 의해 해외로 추방되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요크셔에 상륙했다. 7월 7일, 왕실 의회는 존 보퍼트에게 아키텐으로의 항해를 연기하고 글로스터셔에 있는 버클리 성으로 가서 군대를 모은 뒤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호국경으로 선임한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 합류하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물리치라고 요청했다. 그는 지시에 따라 브리스톨로 가서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 가담하려 했지만, 정작 에드먼드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헨리에게 귀순했다. 8월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온 리처드 2세는 대귀족들이 대거 가담한 헨리를 이기지 못하고 붙잡힌 뒤 9월 29일 강제로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 후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에 등극했다.

존 보퍼트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헨리 4세에게 투항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헨리 '핫스퍼' 퍼시는 헨리 4세에게 존 보퍼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처형하라고 조언했지만, 헨리 4세는 그는 자신의 형제라며 거부했다. 그 후 헨리 4세는 대관식을 치른 뒤 존 보퍼트에게서 도싯 후작 작위를 박탈하고 서머셋 백작에 세웠으며, 5개 항구 관리인과 도버 성주 직책을 포기하고, 워릭 백작에게 영지를 돌려주게 했다. 그는 이 모든 요구를 따랐고, 이후로는 헨리 4세를 추종했다.

1399년 11월 7일, 존 보퍼트는 시종장에 선임되어 왕실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이 직위는 왕실의 운영을 감독하고, 왕의 개인 별장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가구가 비치되고, 직원이 적절하게 배치되도록 감독하며, 왕에 대한 신하의 접근을 통제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동시에, 그는 왕과 의회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으며, 왕실 정치에 직접 참여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 직위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1400년 1월, 존 보퍼트는 토머스 아핑햄과 함께 헨리 4세를 주현절에 암살하려 한 귀족들에 맞서 파견된 4,000명의 궁수 부대를 지휘해 반란 평정에 기여했다. 이후 남동생 토머스와 함께 헨리 4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이 무렵,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4세는 정예병을 끌어모아 노스 웨일즈로 진군했는데, 존과 토머스 형제도 원정에 가담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원정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용맹을 보여줌으로써 왕의 신뢰를 얻어냈다. 이후 헨리 4세는 오와인 글린두르를 공식적으로 반역자로 선언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며,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그는 웨일즈 전역에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지만,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를 무시하고 할거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실제로 통치하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웨일스의 영지들을 확보하지 못했다. 1401년, 존은 헨리 4세가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로부터 압수한 고급 침대 2개와 갑옷을 수여받았다. 그 해 가을, 그는 헨리 4세의 2차 노스 웨일스 원정에 종군했다.

1403년 헨리 '핫스퍼' 퍼시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해 9월 28일 사우스 웨일즈의 총독으로 선임되어 웨일즈 반군을 사로잡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탈취하는데 필요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휘하 장병들이 급여를 받을 때까지 전투에 임하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면서 의회에 도움을 청했고, 나중에는 직위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청원했다. 의회는 약간의 돈을 지급했지만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11월 12일에 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로 교체되었다. 1404년 2월 13일 프랑스 외교관으로 선임되었고, 10월 20일에는 잉글랜드 고위 경호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외교 임무에도 종종 참여했다. 1401년 7월 전 국왕 리처드 2세의 왕비였던 발루아의 이자벨 왕비를 프랑스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4022년 여름 헨리 4세의 딸 블랜치를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와 결혼시키기 위한 여정에 동행했다. 1402년에는 헨리 4세의 새 왕비 나바르의 조앤을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남동생이자 주교였던 헨리 보퍼트와 함께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했지만, 도중에 심한 폭풍에 휘말려 영국 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11일간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플리머스 항구에 가까스로 피신했다. 1403년 1월 재차 출항한 두 사람은 브르타뉴의 카마레쉬르메르에 무사히 도착한 뒤 나바르의 조앤을 위한 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100통이 넘는 포도주를 구입했는데, 이로 인해 384파운드 16실링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쓰였다. 이미 심각한 재정 문제를 겪고 있던 잉글랜드 왕실에게는 큰 부담이었기에, 헨리 4세는 돌아온 두 형제를 호되게 질책했다. 이후 보퍼트 형제와 나바르의 조앤은 1월 13일 브르타뉴에서 출항해 6일 후 팰머스에 도착한 뒤, 엑서터로 이동하여 헨리 4세와 합류했다. 뒤이어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헨리 보퍼트가 주례를 맡았다.

존 보퍼트의 주요 관직 중 하나는 칼레 제독이었다. 이 직위를 맡은 이는 영국 해협을 철저히 지키고 칼레를 위협하는 프랑스와 부르고뉴군을 물리쳐야 했다. 그는 1401년 11월 1일에 이 직책을 맡은 뒤 방위에 전념하는 한편, 칼리와 주변 지역 사회의 형사 및 민사 소송을 해결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왕을 알현하려는 모든 외국 사절을 포함해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가려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책임을 맡았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빴던 그는 1403년 4월에서야 칼레로 가서 5월 초에 도착한 뒤 본격적으로 칼레 제독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했다.

1405년 5월, 칼레 인근의 소규모 요새인 마크가 생폴과 리니 백작 발레랑 3세 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 2,000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구원군을 파견해 격파해 주요 프랑스 지휘관 몇 명을 사살하고 60~80명의 기사를 생포했다. 이후 보복 공세에 나선 존 보퍼트는 아르드르 요새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칼레로 물러났다. 5월 21일, 헨리 4세는 승리 소식을 접하자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이복 형제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알렸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는 대주교와 그의 목사들에게 "신민들, 왕과 왕국의 적지 않은 명예를 위해 프랑스 인들을 물리친" 서머셋 백작과 부하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1407년 3월 칼레 수비대가 임금 체불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존 보퍼트는 반란을 겨우 잠재운 뒤 의회를 설득해 칼레 방어에 영구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게 했다. 1408년 7월, 잠시 잉글랜드에 들렀다가 칼레로 돌아온 그는 칼레 수비대 일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식량을 빼앗기 위해 피카르디로 진군했다가 더 큰 규모의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칼레에 남은 수비대의 인력이 부족했지만, 그는 기책을 고안했다. 그는 칼레에서 실종된 군인의 아내를 남장시킨 뒤 장병들과 함께 끌고 가서 아군이 포위된 곳으로 가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프랑스군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자기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걸 확인하고 퇴각했다.

1410년 1월 말에 열린 의회에 참석한 존 보퍼트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요양 생활을 하다가 3월 16일 런던 탑에 있는 성 캐서린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켄터베리 대성당의 성 토머스 채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파일:Margaret Holland.jpg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마거릿 홀랜드(Margaret Holland)

아내 마거릿 홀랜드(1381/1385 ~ 1439)는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이다. 존 보퍼트와 사별한 뒤 그의 이복조카인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와 재혼했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제2대 서머셋 백작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2nd Earl of Somerset)
1401년 11월 26일 1418년 11월 25일
2남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1404년 3월 25일 1444년 5월 30일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
슬하 1녀[2]
1녀 스코틀랜드의 왕비 조앤 보퍼트
(Joan Beaufort, Queen of Scots)
1404년 1445년 7월 15일 제임스 1세
슬하 2남 6녀[3]
제임스 스튜어트
슬하 3남
3남 페르슈 백작 토머스 보퍼트
(Thomas Beaufort, Count of Perche)
1405년 1431년 10월 2일
4남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Edmund Beaufort, 2nd Duke of Somerset)
1406년 1455년 5월 22일 엘레노어 뷰챔프
3남 6녀
2녀 데본 백작부인 마거릿 보퍼트
(Margaret Beaufort, Countess of Devon)
1409년 1449년 제13대 데본 백작 토머스 드 코트니
슬하 3남 6녀

[1] 1379 ~ 1440, 제2대 페러스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와 초혼, 제4대 네빌 남작이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재혼.[2] 리치몬드와 더비 백작부인 마거릿 보퍼트[3] 제임스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