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3 20:35:20

토머스 퍼시(에그리몬트 남작)

성명 토머스 퍼시
Thomas Percy
출생 1422년 11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
사망 1460년 7월 10일 (향년 37세)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
아버지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어머니 엘레노어 보퍼트
형제 존, 헨리, 캐서린, 조지, 랄프, 리처드, 윌리엄, 조앤, 앤
자녀 존(사생아), 메리(사생아)
직위 에그리몬트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가 노샘프턴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422년 11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에서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곤트의 존의 딸인 조앤 보퍼트의 딸인 엘레노어 보퍼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동시대 연대기에서는 그를 "사움을 좋아하고, 성격이 과격하며, 권위를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1447년 7월, 그는 평소 퍼시 가문과 이해관계가 엇갈려서 온갖 마찰을 벌였던 요크 대주교 존 켐프의 부하들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 때문에 요크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는 퍼시 가문의 영지 중 하나인 코커머스를 통치했고, 1449년 11월 20일 컴벌래드에 있는 에그리몬트 성에서 에그리몬트 남작으로 선임되었으며, 연간 임대료 10파운드를 받았다. 당시 그의 영지가 속한 컴벌랜드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토머스는 1449년과 1453년 사이에 여러 폭동에 반복적으로 연루되었으며, 그가 저지른 불법 행위를 조사하려던 왕실 관리들을 위협하기도 했으며, 1453년에는 보안관을 공격하기도 했다. 특히 북부 잉글랜드의 두 주요 가문읜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을 때, 그는 네빌 가문을 대표적으로 적대시하는 인사로서 무력 충돌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1452년 2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런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소집령을 내린 헨리 6세의 부름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왕에게 가세해 칭찬받았다. 1453년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차남인 존 네빌과 불화가 생겨서 요크셔와 요크시 내에서 장병을 모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그 해 6월 왕실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런던으로 출두하라고 명령했지만, 두 사람 모두 복종을 거부했다. 그 해 7월 존 네빌과 싸우지 말고 가스코뉴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무시했다. 8월 24일, 토머스는 동생 리처드와 함께 해워스 인근의 코크머스에서 병사들을 집결한 뒤,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 토머스 네빌과 랄프 크롬웰의 조카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네빌 가문의 행렬을 급습했다. 충돌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상자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이 일로 양자간의 갈등이 극심해진 것은 분명하다.

1453년 10월에는 토프클리프에서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또다른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자기 가문 영지를 넓히기 위해 네빌 가문의 편에 섰다. 1454년 5월, 헨리 6세가 광기에 걸리면서 나라를 통치할 수 없게 되면서 섭정을 맡은 요크 공작 리처드는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의 전쟁을 막고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에그리몬트 남작과 엑서터 공작을 응징하기로 했다. 엑서터 공작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몬내고 항복한 뒤 폰트프렉트 성에 감금되었지만, 에그리몬트 남작은 탈출에 성공했다. 6월에는 엑서터 공작과 에그리몬트 남작이 자신들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을 모집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요크에서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1454년 10월 31일,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 중 하나인 스탬포드 브리지 근처에서 토마스와 존 네빌은 매복을 조직하여 에그레몬트 남작과 그의 동생 리처드 퍼시를 급습해 생포했다. 이때 수백 명이 전사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토머스와 리처드 퍼시는 먼저 미들햄 성으로 이송된 후 요크 공작의 보호 아래 넘겨졌다. 이후 두 퍼시 형제는 11월에 의회에 출두하여 왕명에 거역하고 무력 충돌을 벌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아내, 아들들에게 총 16,800마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선고받았고,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토머스는 2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뒤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서서, 요크 왕조를 지지한 네빌 가문과 대적했다. 1458년 3월, 헨리 6세는 귀족의 주요 구성원들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고 시도했다. 3월 24일에 이뤄진 평화 협정에 따라, 네빌가 퍼시가는 1만 마크의 보석금으로 화해하고 10년간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토머스 역시 이 협정에 참여했다. 또한 이전에 토머스에게 부과된 벌금은 4,000마크로 감액되었으며, 퍼시 가문의 옛 영지였지만 1453년 크롬웰 남작이 네빌 성으로 넘기면서 두 가문의 무력 충돌 원인 중 하나가 된 레슬 성을 평생 소유할 권한을 받았다. 2주 후, 토머스는 하인 12명과 함께 순례를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잉글랜드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1459년 12월 코니스버러 성의 치안관이 되었고, 연간 40파운드의 종신 연금도 받았다.

1460년 7월 10일, 토머스는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요크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설에 따르면 전투 중 전사했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 체포되어 그의 가족에게 입힌 피해에 대한 복수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3. 가족

  • 존 에그리몬트(1459~1505): 토머스 퍼시의 사생아. 헨리 7세가 집권한 후 자신을 '에그리몬트 경'이라고 칭하며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돌려받길 희망했지만 이뤄지지 않자 1489년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을 선동하여 요크셔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살해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메헬렌에 있는 부르고뉴 공작 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의 궁정으로 피신했다가 1492년 헨리 7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와 캠브리지셔의 아일럼과 레스터셔의 포스턴에 있는 영지를 받았다. 1495년 11월 막시밀리안 1세에게 퍼킨 워벡을 돕지 말라는 헨리 7세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 메리: 버월리스 기사 존 개스코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