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18 20:49:27

로버트 헝거포드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3대 헝거포드 남작
로버트 헝거포드
Robert Hungerford, 3rd Baron Hungerford
성명 로버트 헝거포드
Robert Hungerford
출생 1423년, 1428년 또는 1431년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사망 1464년 5월 18일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뉴캐슬어폰타인
아버지 제2대 헝거포드 남작 로버트 헝거포드
어머니 마거릿 보트로
형제 캐서린, 윌리엄, 엘레노어, 아눌프
배우자 엘레노어 몰린스
자녀 토머스, 월터, 레너드, 프라이즈와이드
직위 제3대 헝거포드 남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서서 요크 왕조와 대적하다가 헥섬 전투에서 생포된 후 참수되었다.

2. 생애

제2대 헝거포드 남작 로버트 헝거포드와 제3대 보트로 남작 윌리엄 보트로의 딸이자 제4대 보트로 여남작인 마거릿 보트로의 장남이다. 형제로 캐서린, 윌리엄, 엘레노어, 아눌프가 있었다. 다양한 출처에 따르면, 그는 1423년, 1428년 또는 1431년에 태어났다. 1345년 이전에 버킹엄셔, 윌트셔, 옥스퍼드셔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한 젠트리인 윌리엄 몰린스의 딸이자 상속녀 엘리너 몰린스와 결혼했고, 1445년 처음으로 의회에 몰린스 남작으로 소환되었다.

1448년, 로버트는 노퍽에 있는 그레셤 영지를 놓고 존 패스턴과 분쟁을 벌였다. 그 해 2월 17일, 로버트는 베이컨스토프의 변호사 존 헤이튼의 조언에 따라 무력으로 영지를 빼앗았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은 추방되었다.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는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패스턴은 사병대를 이끌고 영지를 탈환했지만, 로버트는 1450년 1월 28일 병사 1,00명을 파견해 패스턴을 몰아냈으며, 패스턴의 아내 마거릿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왕실이 개입해 중단하라고 명령하자, 그는 결국 패슨턴이 그레셤을 갖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1451년 백년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유럽 대륙으로 갔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된 뒤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7년 반 동안 억류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왕실로부터 오랜 수감 생활에 대한 보상으로 1,500개의 양모 자루를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또한 일정 기간 동안 잉글랜드를 떠날 수 있었고, 그는 이를 이용해 피렌체로 여행했다. 1459년 잉글랜드에 돌아온 직후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윌트셔와 콘월의 소유권과 헝거포드 남작위를 물려받았다.

로버트는 1460년부터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서 장미 전쟁에 참전했다. 그 해 6월,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런던을 점령했을 때, 그는 제7대 스케일스 남작 토머스 스케일스와 함께 런던 탑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요크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파가 패배하고 헨리 6세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 사람은 요새를 넘겨주는 대가로 자유롭게 떠날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는 무사히 떠날 수 있었지만, 토머스 스케일스는 자기들을 향해 대포를 쓴 그에게 원한을 품은 런던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잉글랜드 북부로 가서 랭커스터군과 합류해 요크군에 맞섰지만,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완패한 뒤 헨리 6세와 함께 요크로 피신했다가 다시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 해 11월 4일, 요크에서 소집된 의회는 특별법을 통해 로버트의 땅과 작위를 몰수했다. 로버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가 디에프에서 억류되었다. 그가 디에프에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보낸 편지가 현존하는데, 거기에는 그녀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조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돌아온 로버트는 요크파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노섬벌랜드의 엘닉 성 방어전을 이끌다가 1463년 1월 초 에드워드 4세에게 항복하는 대신 무기를 지닌 채 떠나는 걸 보장받았다.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간 그는 1464년 4월 25일 헤즐리 무어 전투를 치렀고, 5월 15일 헥섬 전투에서 요크군과 맞서다 생포된 뒤 사흘 후인 5월 18일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솔즈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로버트 헝거포드는 엘레노어 몰린스와의 사이에서 토머스 헝거포드, 월터 헝거포드, 레너드 헝거포드, 프라이즈와이드를 낳았다. 에드워드 4세는 헝거포드 영지의 일부를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넘겼고, 나머지는 존 웬록에게 양도했으며, 로버트의 아내와 아이들을 존 웬록이 돌보도록 했다. 장남 토머스 헝거포드는 기사로서 아버지의 항전에 동참했고, 1469년 1월 에드워드 4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된 뒤 처형당했다. 토머스 헝거포드의 딸 메리는 1478년 로버트 헝거포드의 어머니 마거릿 보트로가 사망한 뒤 보트로 여남작이 되었고, 1485년 헨리 7세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튜더 왕조가 집권한 뒤 헝거포드 가문의 상속 재산을 받았다. 메리의 결혼을 통해 모든 작위와 대부분의 가문 토지가 헤이스팅스 가문에 넘어갔으며, 로버트의 둘째 아들 월터 헝거포드의 손자 월터는 1536년 헤이츠베리의 초대 헝거포드 남작이 되었다.

엘리노엉 몰린스는 로버트 헝거포드가 사망한 뒤 올리버 매닝햄과 재혼했으며, 1476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