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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네빌(초대 네빌 남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네빌 남작
존 네빌
John Neville, Baron Neville
성명 존 네빌
John Neville
출생 1410년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
사망 1461년 3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토우턴
아버지 네빌 남작 존 네빌
어머니 엘리자베스 홀랜드
형제 랄프, 토머스, 마거릿
배우자 앤 홀랜드
자녀 랄프
직위 초대 네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가 토우턴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410년경 잉글랜드 왕국 더럼주 라비 성에서 네빌 남작 존 네빌과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조부인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은 잉글랜드 북부의 더럼, 노스 요크셔, 링컨셔 등지에 걸친 대규모 영지를 경영한 귀족으로,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국경을 전담했다. 그러다가 헨리 4세찬탈을 지지한 대가로 여러 직위와 상을 받았으며, 퍼시 가문의 반란 진압에 공헌하면서 명실상부한 잉글랜드 북부 최강의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존 네빌은 네빌 남작으로서 랄프 네빌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아버지 토머스 홀랜드는 모계를 통해 에드워드 1세의 증손자이자 리처드 2세의 이복형제였다. 어린 존 네빌은 아버지 존 네빌로부터 서튼 영지에서 얻은 수입을 받았다. 그러던 1420년 5월 20일, 아버지 존 네빌이 프랑스 전선에서 병사했다. 존 네빌의 장남 랄프 네빌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미성년자였다. 1425년, 장남보다 오래 산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사망했다. 이후 그가 죽기 직전에 작성한 유언장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랄프 네빌은 유언장에서, 장손인 랄프 네빌에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칭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언장에 영지 분할에 관련해 손자 랄프 네빌이 언급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재산의 대부분은 랄프 네빌의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가 낳은 자식들에게 상속되었다. 결국 손자 랄프 네빌은 작위만 주어졌을 뿐 대부분의 영지를 상실했다. 역사가 찰스 로스는 이에 대해 "야심찬 가족 사기"라고 평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자기가 잉글랜드 북부에 건설한 대규모 영지를 상속인이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성인 아들이 미성년 손자보다 이를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이런 유언장을 남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이 된 랄프 네빌과 두 동생 존 네빌, 토머스 네빌은 이 상황에 몹시 분노했고, 영지를 되찾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정을 거머쥔 보퍼트 가문의 비호를 받은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세 사람은 보퍼트 가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끌어들여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 때문에 1430년대 내내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존과 토머스는 형 편에 서서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이 가진 영지를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438년, 그는 법무 장관 존 스태퍼드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되었다. 그는 존 네빌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크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영국 북부 주민들을 “죽이고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1443년, 랄프 네빌과 존 네빌, 토머스 네빌 형제는 잉글랜드 정부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과 비로소 합의를 맺었다. 랄프 네빌은 라비의 남작권을 되찾았지만, 나머지 분쟁 지역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조앤 보퍼트의 장남인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소유가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갈등은 이것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세 아들들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령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은 유언장대로 따랐을 뿐인데도 그들이 행패를 부린다며 반감을 품었다.

그 결과, 장미 전쟁으로 이어진 1450년대의 정치적 사건 동안, 네빌 가문의 두 분파 대표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다. 랄프 네빌, 존 네빌, 그리고 토머스 네빌 형제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지지했고,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두 아들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존 네빌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지지했다. 하지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정치 및 군사 활동을 거의 벌이지 않았는데, 일부 기록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밝혔다. 그 대신, 존이 주도권을 쥐고 솔즈베리 백작과 대립했다. 토머스 네빌도 형 존을 도왔지만 145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455년 5월 21일, 레스터에서 의회가 개최되었다. 존은 이 의회에서 요크셔 서부 지역의 대표로 소환되었다. 요크 공작은 이 의회에서 고발당할 것을 우려해 북쪽으로 가서 솔즈베리 백작 및 워릭 백작과 합세한 뒤 군대를 모아 런던으로 진군했다. 5월 22일, 그들은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왕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헨리 6세를 붙잡았다. 이후 요크 공작은 헨리 6세가 광기에 걸린 것을 빌미삼아 호국경을 칭하고 나라를 대리 통치했다. 하지만 1456년 2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정부를 다시 장악하고 존 네빌이 솔즈베리 백작과의 경쟁을 재개하도록 부추겼다.

1457년 솔즈베리 백작의 동생이자 더럼 주교인 로버트 네빌이 죽자, 왕비는 공석이 된 더럼 주교를 자기 지지자인 로렌스 부스가 차지하도록 했다. 로렌스의 조카딸은 나중엔 존 네빌의 아들인 랄프 네빌과 결혼했다. 로렌 스 부스는 더럼 주교구에서 다양한 행정직을 맡고 있던 솔즈베리 백작의 친척들을 즉시 해임하고 존 네빌 측 인사들을 선임했다. 또한 존 네빌은 순회 재판관의 직책을 맡아 더럼 주교구의 사법권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전임 더럼 주교 로버트 네빌의 재산 일부를 받았다.

1459년 10월, 요크군은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요크 공작과 그의 추종자들은 잉글랜드에서 달아났다. 그들은 반역자로 선언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존 네빌은 충성심에대 한 보상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여기에는 이전에 솔즈베리 백작이 소유했던 영지와 일부 직위가 포함되었다. 11월 20일, 존은 '악마의 의회'로 알려진 코번트리 의회에 네빌 남작이라는 이름으로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의회에 참석한 존은 12월 19일 "반군에 대한 좋은 봉사"로 솔즈베리 성의 미들햄과 셰리프 허튼의 경찰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과 관련된 토지의 통제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존 코니어의 몰수된 영지 일부를 받았다. 또한 더럼 주에서 바너드 성의 보안관과 티스데일 숲의 수석 산림 관리인이 되었고, 연봉은 40마크였다. 1460년 3월 18일, 그는 솔즈베리의 소유지(위튼과 벤브리지 영지, 웬스데일 숲)으로부터 추가 보조금을 받았고, 이를 통해 연간 임대료로 100마크를 더 벌 수 있었다.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왕실군이 패배하고 요크 공작이 재집권하자, 존 네빌은 일단 복종하기로 했다. 그는 1460년 7월 30일 런던 의회에 소환된 뒤잉글랜드 북부에 모인 랭커스터 왕조의 반군을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존은 요크셔에서 군대를 일으킨 마르그리트 왕비와 합류한 뒤 요크 공작의 영지 파괴에 참여했다. 요크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12월 8일에 회의를 열 예정인 재판위원회에 선임하겠다고 통보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했다.

1460년 12월, 자기 영지가 파괴되는 상황을 더는 묵과할 수 없었던 요크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존 네빌은 요크 공작에게 합류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그를 현혹한 뒤, 신병을 모은 후 마르그리트 왕비의 군대에 합류했다. 12월 30일, 그는 랭커스터군의 일원으로서 웨이크필드 전투에 참여해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 등을 처단하는 데 일조했다. 일설에 따르면, 요크 공작은 존 네빌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는 줄 알고 대규모 랭커스터군과 싸우기 위해 요새화된 샌달 성을 떠났다가 존 네빌에게 배신당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후 존 네빌은 랭커스터군과 함께 남하하면서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461년 1월 16일 그의 부하들은 베벌리를 약탈했고, 1월 20일에는 요크를 약탈했다. 또한 존과 형 랄프 네빌은 스코틀랜드가 베릭 요새를 받는 대가로 마르그리트 왕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한 조약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존은 2월 17일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 참전해서 사촌인 워릭 백작이 이끄는 요크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런던의 민심이 랭커스터군에게 매우 적대적이라서 입성이 힘든 데다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웨일스 방면 랭커스터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런던에 입성하지 않기로 하고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갔다.

그 후 런던에 입성하여 잉글랜드 국왕을 칭한 에드워드 4세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랭커스터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북상했다. 존 네빌은 1461년 3월 28일 사촌인 제9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와 함께 페리브리지 전투에서 항전했지만 끝내 패퇴했다. 다음날인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 참가했으나 랭커스터군의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1461년 11월 4일, 에드워드 4세가 소집한 요크 의회는 존 네빌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3. 가족

  • 앤 홀랜드(1432년 이전 ~ 1486): 제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의 딸. 본래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아들인 존 네빌의 아내였으며, 첫 남편과 사별한 뒤 1450년대 초에 네빌 남작 존 네빌과 재혼했다. 존 네빌이 전사한 후 곤궁하게 지내다가 스코틀랜드 귀족인 제9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삼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