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0:54:31

존 모브레이(제2대 노퍽 공작)

성명 존 모브레이
John Mowbray
생몰년도 1392년 ~ 1432년 10월 1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칼레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
아버지 토머스 모브레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피츠앨런
형제 토머스, 마가렛,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아내 캐서린 네빌
자녀 존 모브레이
직위 노퍽 공작, 잉글랜드 백작 원수,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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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1392년경 잉글랜드 왕국에 속한 칼레에서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토머스[1], 마가렛[2], 이사벨라[3], 엘리자베스[4]가 있었다.

1399년 아버지 토머스 모브레이가 볼링브로크의 헨리로부터 반역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이를 부정했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 재판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결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리처드 2세가 나타나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며 지팡이를 던졌고, 토머스 모브레이와 볼링브로크의 헨리 모두 추방되었다. 그 후 토머스 모브레이는 베네치아에서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1399년 10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로 몰래 돌아와서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로 등극했다. 헨리 4세는 존의 형 토머스에게 노퍽 백작과 남작위를 상속하도록 허용했지만, 노퍽 공작은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토머스는 헨리 4세를 타도할 음모에 가담했다가 1405년 6월 발각되어 20세의 나이에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토머스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존 모브레이가 모브레이 가문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제 존은 제5대 노퍽 백작, 제3대 노팅엄 백작, 제9대 세그레이브 남작, 제8대 모브레이 남작이자 왕실의 백작 원수가 되었다.

존 모브레이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1407년 헤리퍼드 백작부인이자 그의 고모인 조앤[5]의 후견을 받았다. 1410년부터는 헨리 4세의 후견을 받게 되었고, 1411년 잉글랜드 북부의 대귀족인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왕에게 2,000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그를 보호하고 결혼을 주선할 권리를 받았다. 1412년 1월 12일, 존 모브레이는 랄프 네빌의 딸인 캐서린 네빌과 결혼했다.

이후 성년이 되면서 영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장인 랄프 네빌의 영지로 귀속된 모브레이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지 못했으며, 그의 재산의 3분의 2가 아직 꽤 어린 그의 어머니와 형의 미망인인 콘스탄스 홀랜드가 과부의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었기에, 만약 그들이 결혼한다면 영지가 그들의 새 남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존은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권리를 확장하고 특권을 강화하는 데 집착했다. 특히 잉글랜드 백작 원수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키우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백작들 중 우선권이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1414년 초에는 새로 잉글랜드 원수가 된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에 대해 자신의 직함이 더 오래되었으니 좀더 우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415년 새 국왕 헨리 5세와 함께 프랑스 원정에 떠나기로 한 존 모브레이는 그해 4월 헨리 5세와 복무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계약에서 기사 4명, 맨앳암즈 45명, 궁수병 150명을 데리고 갈 것이며, 무기, 갑옷, 텐트 등의 구매 비용뿐만 아니라 의사, 성직자, 총포 제작자, 요리사 등 지원 직원의 노동 비용도 지불하기로 했다. 그는 원정 준비에 2,500파운드를 지불했는데, 왕실은 나중에 그에게 1,450파운드만 반환했다. 그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12대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에게 1,000 파운드를 필려야 했으며, 자신의 관할권에 사는 부유한 마을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처벌을 면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1415년 8월 사우샘프턴에서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그의 리처드, 스크루프 남작 헨리 스크루프,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가 헨리 5세를 암살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는 백작 원수로서 조사를 진두지휘했고, 8월 5일 공모자 3명 모두에게 교수형한 뒤 시신을 4개로 토막내 잉글랜드 각지에 보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8월 14일에 프랑스로의 원정에 시작되었다. 그는 8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이어진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곧 이질에 걸렸고, 10월에 1/4 밖에 안 남은 장병들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고, 이 때문에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후 링컨셔에 있는 엡워스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1월에 귀환한 왕을 런던에서 접견하여 승리를 축하했다.

1416년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를 방문할 때 도버에서 맞이한 영주들 중 한 명이었다. 1417년 맨앳암즈 100명, 궁수 300명을 데리고 헨리 5세의 원정에 다시 참여했다. 1418년 2차 캉 공방전, 루비에 공방전,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419년 2월 프랑스 2개 도시 대장에 선임되었지만 곧 취소되어 야전군 사령관으로 복직했다. 1420년 3월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와 함께 프레네르비콩트 시를 공략했으며, 르망에서 도팽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그 해 말 퐁투아즈 대장에 선임되어 직무를 수행하다가 1421년 2월 23일 리처드 뷰챔프에게 넘겼다. 그 직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시신을 운송하여 잉글랜드로 귀향하는 일행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새 국왕 헨리 6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라를 통치하는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423년 115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궁수를 데리고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이때 그와 함께 간 인물로는 제6대 윌러비 남작 로버트 윌러비, 초대 헝거퍼드 남작 월터 헝거퍼드, 초대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가 있었다. 그는 부르고뉴 장성 장 드 룩셈부르크가 보엔을 공략하는 걸 도왔고, 라 포예 성을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도 도팽 샤를이 통제하는 땅을 여러차례 습격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425년 잉글랜드로 귀환한 존 모브레이는 의회에 자신이 백작들 중 최고 서열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리처드 뷰챔프보다 더 오랫동안 원수 직에 있었으니 마땅히 자신이 우대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귀족들은 어느 한 쪽을 편들었다가 다른 한 쪽의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이후 왕실은 그를 달랠 겸 그동안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1425년 7월 14일 노퍽 공작에 선임했으며, 1년 후 그의 외아들 존 모브레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존 모브레이는 이후로는 전쟁에 이전처럼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본국에 머물렀다. 그러던 1428년 11월, 그는 바지선을 타고 가다가 런던 브리지 아래 부두에 배가 충돌하여 전복되는 바람에 템스 강에서 익사할 뻔했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많은 하인이 물에 빠져 사망했다. 한편, 그는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헨리 5세의 동생으로서 더 많은 권한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의회에 참석했다. 1429년 11월 6일,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헨리 6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430년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파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결정됐을 때, 그는 맨앳암즈 120명, 궁수병 360명을 모아 헨리의 여정에 동행하는 군대에 합류한 뒤 군대 전체를 지휘했다. 그는 여정 중에 일드프랑스에 있는 여러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헨리 6세가 1431년 12월 16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즉위하기 전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432년 10월 19일 링컨셔 엡워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사전에 작성된 유언장에 따라 악스홀름 성의 모브레이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베네치아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유해 역시 이곳으로 옮기게 해달라는 유언도 남겼고, 이 역시 나중에 이뤄졌다. 존 모브레이는 생전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 캐서린 네빌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존 모브레이만 낳았고, 이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직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아들인 제3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이스트 앵글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과 갈등을 벌였다. 이후 랭커스터파와 요크파 사이에서 간을 보다가 1460년 요크파를 선택했고, 타우턴 전투에서 요크파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외아들 제4대 공작 존 모브레이를 두었는데, 제4대 공작은 9살에 죽은 외동딸 앤 외에는 후손을 남기지 못해 공작가가 단절되었다. 제2대 공작 존의 누나 마거릿 모브레이가 로버트 하워드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인 존 하워드가 1483년 리처드 3세에게 노퍽 공작으로 임명받았고, 존 하워드의 후손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작가로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캐서린 네빌은 존 모브레이 사후 3번 더 결혼했다. 두번째 남편은 기사 토마스 스트랭웨이즈였고, 조앤과 캐서린이라는 두 딸을 낳았다. 조앤은 버클리 후작 윌리엄 버클리와 결혼했으며, 캐서린은 제4대 코트너의 그레이 남작 헨리 그레이와 결혼했다. 1442년 이전에 토머스 스트랭웨이즈가 사망한 뒤, 캐서린은 1443년에 초대 보몬트 자작 존 보몬트와 세번째로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1460년 존 보몬트가 장미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노샘프턴 전투에서 전사한 뒤, 1465년 6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인 19세의 존 우드빌과 네번째로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오로지 모브레이 가문의 재산 일부를 우드빌 가문의 통제하에 놓이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캐서린 네빌과 존 우드빌 사이의 엄청난 나이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악마적인 결혼"이라며 비난했다고 밝혔다. 캐서린 네빌은 1483년까지 생존했다.


[1] 1385 ~ 1405, 제4대 노퍽 백작, 제2대 노팅엄 백작, 제7대 모브레이 백작, 제8대 세그레이브 남작[2] 1388 ~ 1405, 기사이자 해군 사령관 로버트 하워드의 부인.[3] ? ~ 1452, 기사 헨리 페러스와 초혼, 초대 버클리 남작 제임스 버클리와 재혼.[4] ? ~ 1423년 이후, 제3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의 부인.[5] 험프리 드 보훈의 미망인이자 헨리 4세의 시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