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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colbgcolor=#D7AA9C><colcolor=#000000>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Bernard VII d'Armagnac, Comte d'Armagnac
파일:Bernard VII d'Armagnac.jpg
이름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Bernard VII d'Armagnac
출생 1360년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
사망 1418년 6월 12일(향년 58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베리의 본[1](1393년 결혼)
자녀 장 4세, 베르나르 8세, 마리, 본, 안, 잔, 베아트리스
아버지 장 2세 다르마냐크
어머니 페리고르의 잔
형제 장 3세, 베아트리스
직위 샤롤레 백작, 로데즈와 아르마냐크 백작,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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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아르마냑파의 수장으로서 부르고뉴파와 대적하다가 피살당했다.

2. 행적

1360년경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2세 다르마냐크와 페리고르 백작 로저베르트랑 드 페리고르의 딸인 페리고르의 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장 3세, 베아트리스[2]가 있었다. 1377년 랑그독의 총독을 맡고 있던 앙주 공작 루이 1세 당주의 종자로서 활약했으며, 1379년 베리 공작 장 드 베리를 대신하여 오베르뉴 일대의 샤를 성, 오종 성, 베네반 성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냈다.

138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장 2세가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고, 그는 샤롤레 백작이 되었다. 이후 형과 함께 시골 지역에서 날뛰는 자유 용병대를 여러 차례 물리쳤으며, 용병대를 해외로 보내기 위해 1384년과 1389년 두 차례에 걸쳐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1390년,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3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이사벨라가 장 3세에게 마요르카 왕위 계승권을 양도했다. 장 3세는 마요르가 왕위를 쟁취하는 한편 용병대를 프랑스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 이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용병대를 대거 고용했다. 여기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베르나르 7세의 동의를 받고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50,000플로린을 받고 샤롤레 백국을 양도했다.

1391년 7월 25일,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감금된 여동생 베아트리스를 구하기 위해 출진한 장 3세가 알레산드리아를 포위하던 중 밀라노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불분명한 사유로 사망했다. 이보다 앞서, 아버지 장 2세는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아르마냐크 백작위를 장남이 물려받되, 장남이 적법한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으면 차남이 물려받으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장 3세는 딸 2명만 낳고 사망했고, 아르마냐크 백작령과 로데즈 백작령은 장 2세의 유언에 따라 베르나르 7세에게 이전되었다. 그러나 장 3세가 아내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를 통해 확보했던 코밍주 백작령은 마르그리트에게 도로 돌아갔다. 코밍주 백국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형의 미망인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하려 했지만 교황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베르나르 7세의 친척인 파르디악 백작 장 다르마냐크 페잔사주와 재혼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에 분개한 베르나르 7세는 장 다르마냐크 페잔사주의 아버지인 페잔사주 자작 제로 다르마냐크를 공격해 그 땅을 공략한 뒤 제로를 로델 성에 가두어 얼음물로 가득 찬 형벌 감방에 던졌고, 제로는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제로의 두 아들이 항복하자, 베르나르 7세는 이들을 아버지가 죽은 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둘 중 어린 아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고, 장 다르마냐크 페잔사주는 베르나르 7세의 아내에 의해 눈이 먼 뒤 곧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는 베르나르 7세의 정적들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한다.

좀더 신뢰할 수 있는 기록에 따르면, 마르그리트와 장은 서로 불화를 겪다가 별거생활을 했고, 장은 얼마 후 병사했으며, 제로는 잉글랜드 왕국에 기울다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지시를 받은 베르나르 7세의 공격을 받아 땅을 빼앗겼다고 한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간에, 베르나르 7세는 1403년 무렵에 파르디악, 페잔사주 등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제로의 딸들은 법정에 소송을 걸었지만, 베르나르 7세의 장인이자 베리 공작인 장 드 베리의 개입으로 무효로 처리되었다.

1397년,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피렌체 공화국이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샤를 6세와 프랑스 의회는 베르나르 7세에게 피렌체를 돕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베르나르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아비뇽에 이르렀지만, 군자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거기에 머물러야 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이미 모은 돈을 베르나르 7세에게 주는 대신 밀라노 공작과 휴전을 맺었고, 베르나르 7세는 군대를 해체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고 빚더미에 시달렸다.

1406년경, 베르나르 7세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동맹을 맺었다. 1407년 11월 23일 루이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에 의해 파리 시내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루이 1세의 자녀들을 보호했으며, 새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을 자기 딸 본과 결혼시켰다. 1408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동맹을 맺고 부르고뉴파에 대항했고, 1410년에는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과 그의 아들인 클레르몽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을 끌어들였다. 그가 부르고뉴파에 대항하는 정파의 리더를 자처했기에, 이들 파벌은 그의 가문 이름을 따서 '아르마냑파'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부르고뉴파를 상대로 파리를 탈환하고자 공세를 벌였지만 수년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르그리트가 피난처로 삼았던 아일앙도돈을 점령한 뒤 마르그리트를 체포해 레크투르 성에 감금하고 코밍주를 강점했다. 이에 부르고뉴파의 조종을 받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마그르리트를 석방하고 코밍주를 돌려주라고 요구했고, 그가 이를 무시하자 푸아 백작 장 1세에게 베르나르 7세를 응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베르나르 7세는 1413년부터 푸아 백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한편, 부르고뉴파는 부유한 고위 관료와 귀족들에게 잉글랜드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왕세자 루이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정부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급진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에 파리의 기득권층과 왕실은 심한 위협을 느끼고 아르마냑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13년 7월, 베르나르 7세는 군대를 소집한 뒤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시민들은 부르고뉴파의 전횡으로 상거래가 마비되고 생업에 지장받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이에 호응해 봉기했고, 베르나르 7세는 8월 23일에 파리를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를 플란데런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루이 왕세자는 힘의 군형이 아르마냑파로 지나치게 기울 것을 우려해 아르마냑파를 견제했고, 용맹공 장 1세 역시 루이 왕세자가 아르마냑파의 인질로 이용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했다. 1414년 1월, 루이 왕세자가 부르고뉴 공작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아르마냑파는 왕세자의 측근 몇 명을 체포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를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하지만,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414년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1414년 7월, 베르나르 7세가 지휘하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해 공성전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왕세자 루이가 아르마냑파를 견제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9월 4일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부르고뉴 공작을 사면하고 침공을 중단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라스 공방전이 마무리된 뒤, 베르나르 7세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푸아 백국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잉글랜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그는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푸아 가문과 1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1415년 10월, 프랑스 무관장 샤를 1세 달브레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게 완패하고 샤를 1세 달브레가 전사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즉각 파리로 상경했고, 1415년 12월 30일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세금을 늘리고 동전을 대량으로 발행해 군자금을 가능한 한 끌어모아서 군대를 재건하려 했으며, 파리 시민들에게 성벽을 지키는 경비병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용맹공 장이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하자 이를 저지했고, 장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드는 파리 시민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의 침략과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갈등 재개로 정국이 혼란스럽던 1415년 12월 18일,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가 도팽 루이가 장과 손잡고 파리를 넘길 거라고 의심해 독살했을 것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본다.

1416년, 프랑스 측은 잉글랜드에게 넘어간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벌였다. 프랑스와 제노바 함대는 항구를 봉쇄했고 프랑스 지상군도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잉글랜드 수비대를 육상에서 압박했다. 그러던 1416년 3월 1일, 파리에 도착한 헝가리 왕국의 국왕이자 로마 왕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와 화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베르나르 7세는 잉글랜드군이 해군 기지로 사용하는 아르플뢰르에 대한 해군 봉쇄를 유지해 잉글랜드군을 충분히 약화시킨 뒤 아쟁쿠르 전투의 복수를 하길 갈망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는 지기스문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르플뢰르 수비를 맡고 있던 도싯 백작 토머스 보퍼트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서 1,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한 뒤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1416년 3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다가 카니바빌에서 방향을 돌려 아르플뢰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베르나르 7세가 파견한 프랑스 분견대가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이 모든 말과 짐을 후방에 배치하고 전투 대형을 결성하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하여 적의 전선을 돌파했지만 적군의 후방을 요격하는 대신 짐을 약탈하고 말을 훔치는 데 열중했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인근의 작은 울타리 정원으로 후퇴한 후 해질녘까지 방어했다. 그러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보퍼트는 야간 행군을 감행해 현장을 빠져나갔다.

3월 11일 아르플뢰르 인근 해변에 이른 잉글랜드군은 절벽 위에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결성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시신을 약탈했다. 그 사이에 맨앳암즈 2,000명과 1,000명의 궁수병, 민병대 1,000명이 접근했다. 이들은 잉글랜드군에 접근하지 않고 고지대에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들을 뚫지 못하면 아르플뢰르에 돌아갈 수 없었기에, 보퍼트는 강행 돌파를 명령했다.

잉글랜드군이 명령에 따라 고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아쟁쿠르 전투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 이때 아르플뢰르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수비대가 적의 측면을 요격하자, 간신히 전열을 유지한 채 물러나던 프랑스군은 아예 무기를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160명이 전사한 데 비해 프랑스군은 200명이 전사하고 8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마냑 백작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50명을 추가로 교수형에 처했다.

발몽 전투 이후 프랑스 육군이 아르플뢰르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지만, 해상 봉쇄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에 헨리 5세는 7월 22일 함대를 모집해 이스트 서식스의 비치 헤드 곶에 집결시킨 뒤, 친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지휘를 맡겼다. 베드퍼드 공작은 8월 15일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해군과 셰프드코 해전을 치른 끝에 적선 3척을 나포하고 대형 선박 한 척을 침몰시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15,000명에 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1417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해 2차 캉 공방전에서 2,000명이 넘는 시민을 학살하는 등 종횡무진하며 노르망디를 휩쓸었다. 그해 7월, 베르나르 7세는 샤를 6세의 왕비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사생활이 문란하고 권력욕에 따라 야합을 일삼아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고 비난하며 투르로 추방했다. 이자보는 격분했고, 트루아에서 용맹공 장과 합세했다. 장은 그녀를 앞세워 트루아 정부를 세우고 아르마냑파에 대적했다.

1418년 5월 28일, 부르고뉴군이 파리로 비밀리에 진군했고 이자보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때 베르나르 7세에게 반감을 품은 파리 시민들이 그들을 비밀리에 들여보냈다. 이리하여 파리에 진입한 부르고뉴군은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해 하루 동안 4,000명을 살해했다. 며칠 후, 군중이 살아남은 아르마냑파가 갇혀 있던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6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베르나르 7세는 특별 감옥에 갇힌 뒤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6월 12일에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파리 거리에서 질질 끌려가다가 암매장되었고, 1436년 샤를 7세2차 파리 공방전을 통해 파리를 수복한 뒤에야 자녀들에 의해 수습되어 오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베리 공작 장의 큰딸.[2] 1366 ~ 1410년 2월 이후,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아들인 가스통과 초혼, 파르마 영주 카를로 비스콘티와 재혼.